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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 Newsletter 2호, 2007. 12월



가족소개

저희는 아직 서울에 있습니다. 드디어 오는 12월 25일 성탄일에 대한항공편으로 애틀랜타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단이는 12학년인지라 지금 다니고 있는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하기 위하여 상도동 외조부댁에 머무르고 내년부터 미국에서의 대학생활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윤이는 8학년, 은이는 5학년으로서 3아이 모두 한국공립학교와 외국인학교를 두루 경험한지라 영어와 우리말을 이중언어로 편하게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난 5년 동안의 한국생활에서 감사한 일은 3자녀가 건강하게 주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잘 성장하며 미국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양육된 좋은 시간과 교육이었음입니다. 아마도 Decatur학교 시스템에 무리없이 잘 적응하리라 믿습니다.

가족사진의 배경은 연세대학교 서예반에서 그동안 연습한 실력을 뽐내본 전시회 작품입니다.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잘 쓴 글은 아니지만 왼쪽작품인 ‘침묵’은 행서이고 오른쪽작품인 ‘편죽도의’는 해서로서 물에 빠진 개미 떼를 대나무를 띄어 구한다는 고서입니다. 서예반 선생님이 본인이 목사라고 ‘인간구원’에 대하여 써보라고 주신 글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시각에서도 목사의 할 일을 바로 보고 있더군요. 콜롬비아에서도 서예반(한글과 한문)을 만들어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가르칠 수 있는 분과 배우고 싶은 분을 추천하여 주시면 요일을 정하여 정기적으로 모일까 합니다. 저에게 서예를 학습함이란 한문을 사용하는 아시아의 정서를 묶어주며 표현함에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마도 Labyrinth가 서양에서 몸으로 하는 기도라면 동양에서는 서예가 몸으로 하는 기도의 대표적인 모습인것 같습니다.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인 요즘의 상황이 미국과 한국의 공통적인 모습이겠지요?

기쁜 성탄과 새해인사를 드리며,

허정갑목사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예배학교수 및 한미목회실 소장

북미예배학회

2008년 1월 3-5일 Savannah, GA에서 있을 북미예배학회 모임에 한국과 미국신학교에서 예배학과 설교학을 가르치는 주승중(장신), 김경진(장신), 김세광(서울장신), 박해정(감신), 조기연(서울신), 안덕원(드류신대원)교수 등이 참석할 계획인지라 여러분께 소식을 알립니다. North American Academy of Liturgy로 불리는 예배학회는 매년 첫째 주에 북미 도시를 순회하며 예전에 관련된 전문가들의 학술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예배설교학자들이 대거 참여함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인지라 학회에서 큰 기대를 갖고 한국예배학회와의 교류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흐름과 함께 예배의 정보가 교단과 지역의 경계선을 넘어서 서로 나누어지는 모습을 또한 기대하여 봅니다.

오시는 분들은 저의 집 혹은 콜롬비아 게스트하우스에서 학회전후로 기거할 예정이오니 원하시면 여러분의 교회에서 위의 분들을 1월 6일 주일예배 강단에 설교자로 초빙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학회에 같이 참석하시길 원하시는 분들은 1월 3일(목) 오전 9시에 떠나 5일(토)저녁에 돌아올 예정이오니 www.naal-liturgy.org를 참고하시어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예배와설교 세미나

아울러 한국과 미국에서 예배와 설교를 가르치는 교수님들을 모시고 1월 7일(월) “예배와 설교”에 관한 하루 세미나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세미나는 애틀랜타 지역 교회협의회와 목사협의회가 공동으로 주최하고 있습니다. 현재 확인된 내용은 김세광교수가 ‘이야기식 설교’ 박해정교수가 ‘한국열린예배의 최근동향’ 김경진교수가 ‘이머징예배’ 그리고 저녁예배 설교는 주승중교수가 성만찬은 허정갑교수가 맡게 되었습니다. 안덕원교수와 조기연교수도 예배와 설교에 관련된 워크샵을 맡아 여러 교단의 예배동향과 정보를 서로 나누게 되겠습니다.

베다니교회 최병호목사님께서 본교회에서 행사를 준비하고 계시니 자세한 일정은 최목사님께 문의하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이 때 여러분들을 뵙고 인사드리며 함께 성만찬을 노래로 집례하는 신년기도회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참석을 바랍니다.

성서정과 1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주현절: 빛, 세례, 가나의 혼인, 그리고 동방박사들

2008년은 무자년(戊子年) 쥐띠해라고 세상은 말하지만 교회력은 예수님의 생애를 중심으로 주현절을 시작한다. 우리가 주현절로 알고 있는 신년의 첫째 주일은 이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에게 2세기에서 3세기로 전환하면서 알려진 것으로 그는 요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수세일을 같은 이날로 기념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주제로서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인 가나의 혼인잔치도 이날에 행하여진 것으로 추가된다. 왜 이러한 축일들은 이렇게 많은 주제들을 가지고 있는가? 한 단서가 후의 자료에서 제공되는데 이것은 아타나시우스의 캐논(Canon of Athanasius)으로서 여기에서는 그 해의 시작을 주현절로 정의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왜 주현절로 시작되었을까?

마태복음서의 시작을 보면 우리는 그 복음서가 탄생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마가복음서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로 시작하고, 요한복음서는 서문 후에 가나의 혼인잔치로 시작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우리는 요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를 축하하는 것과, 마가복음서의 시작과, 또한 1월 7일에 시작되는 예수님의 금식을 본 딴 40일간의 금식일에 대한 증거를 그의 세례 이후 바로 뒤 따르는 광야 생활에서의 그의 승리와 함께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주현절의 복합적인 주제는 지역적으로 선호하는 복음서 봉독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4세기 마지막 분기에 동방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아프리카와 로마에서는 주현절을 승인하여 통합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세례 두 가지 모두를 주현절로 기념하였던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은 탄생을 12월 25일로 변경하였고 1월의 축제는 요단강에서의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는 탄생 이야기가 나누어져서 주현절은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기념하였다.

1월 1일: 신정

전3:1-13; 시8; 계21:1-6a; 마25:31-46

우리는 지금 영원히 지나가버릴 해를 닫고 새롭게 다가오는 해를 열기 위해 모여 하나님의 심판을 조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이다.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기 전에, 우리를 속여 온 시간의 비밀을 알아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잊고 살았다. 세상의 시계를 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의미 없이 산 시간도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속고 살았다. 한 해 동안 그 많은 시간들을 다 써버린 지금, 그 많은 시간을 우리에게 주신 시간의 주인 되신 하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인간의 역사는 우리가 행한 죄(간음, 속임, 화, 거짓 등)를 거론하고 있지만 오늘의 본문은 다른 성격의 죄를 담고 있다. 이는 우리가 미처 행하지 못한 책임성의 죄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비롯하여 비신앙인, 특히 타종교인들과 대화하며 지극히 ‘작은 자’를 존중하는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반성하며 새로운 해를 열어간다.

1월 6일: 주현주일

사60:1-6; 시72:1-7, 10-14; 엡3:1-12; 마2:1-12

마태가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기록한 목적은 다윗의 족보에서 난 아이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과 관련된, 왕정의 이상을 완성할 것이란 점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 외에도 이미 그의 이름이 유아기부터 알려졌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간혹 역사적 근거가 없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을 전설이라 간주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왜, 어떻게 이것이 생겨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엄밀히 보면 특성상 전설적이라고 볼 만한 모습이 것의 없다. 동방박사들을 멀리 동방에서부터 인도했다고 나오는 부분은 실상 2절과 9절의 잘못된 번역에 기초한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유대에 도착한 후 한 말은 ‘우리가 떠오르는 그의 별(즉, 그가 태어났거나 혹은 곧 태어날 징표이라고 추측한 별)을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 경배하기 위해 왔다.’이다. 이들 노련한 점성가들이 과학자들의 특성인 끝없는 호기심으로 현저한 점성술적 현상을 보았던 것이다. 그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온 세상의 경배를 받으며 평화로 다스릴 왕이 유대에서 나타날 때가 되었다는 널리 퍼진 믿음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현상이었다.

인간이 왜 태어났으며 무슨 목적으로 사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세상 안에는 수많은 방황과 부조리와 불합리가 존재하고 그런 현실로 인해 고통과 절망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을 분명히 알 때 우리는 진정한 인생의 길을 찾게 되고 헛된 수고를 피하게 되고 복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동방박사들은 이런 최고의 목표를 향하여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들이 할 일이 없어서,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생의 해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그들의 실천을 통해서 웅변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신앙을 따라 살아갈 때 겪을 수 있는 어려움 속에서도 명심해야 되는 한 가지는 진리는 희생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는 것이다. 본문에 보면 동방박사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천신만고 끝에 희생을 감수하며 이곳까지 찾아왔다. 그런데 이 희생이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하지만 알고 보면 진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매우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신앙의 삶, 곧 진리의 삶은 때로 희생을 동반한다. 희생이라는 말은 자주 제물이라는 의미와 혼용하여 쓰기도 한다. 주님은 우리의 희생을 원하신다.

오늘 말씀에 보면 또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별의 인도를 받는다. 본문 속에 나온 별은 곧 진리를 가리켜 주는 빛을 상징하고 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별의 인도를 받는다. 또 그 후 헤롯이 자기들을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서 자기 나라로 무사히 돌아가게 되기까지 계속적으로 인도를 받는다. 우리의 신앙의 삶은 비록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아야 하는 우리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올 한해를 시작하며 빛 되신 주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가 되기를 다짐하여본다.

1월 13일: 주님의 수세주일

사42:1-9; 시29; 행10:34-43; 마3:13-17

우리는 실상 모두 요한처럼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하시도록 예비하고 터를 닦는 사람들이다. 세상을 향해 회개를 요청하고 변화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메시아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오염된 세상을 향해 외치는 소리의 역할을 해야 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만 이 일의 궁극적 행위는 주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우리의 할 일과 위치를 알게 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예비하는 우리를 단지 그의 종속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매우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인정하시고 격려하신다. 마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처럼 당신 자신을 낮추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우리(for us)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선언하면서 우리가 그의 중차대한 일들을 위한 동역자임을 분명히 하신다. 우리의 역할은 하나님 안전에서 적은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를 믿고 맡기신 일이기에 그 일에는 정당성이 있으며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일에 담대할 수 있다.

주님은 또한 화해와 협력의 모델이 되신다. 어쩌면 당시 경쟁적 관계에 놓여있을지도 모르는 에세네파 공동체의 수장, 세례 요한을 오히려 그의 안으로 끌어안으시고 겸손으로 요한을 압도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한 목적을 품었지만 다만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타 지도자를 독선과 배타로 공격하거나 적대시하지 않고 오히려 합력하여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일하신다. 오늘의 우리 속에 나와 다름이 있는 사람들과 과연 협력적 관계를 가져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세례 요한은 또한 역사 속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역할이 다하면 그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설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진리에 진정 충실한 사람은 그 진리가 다가왔을 때 그 진리를 정확히 볼 줄 안다. 요한은 그가 진리를 추구해온 사람이었기에 그 진리의 주체인 메시아를 알아보았고 그를 위해 기한이 다한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넘겨주려 하고 있다. 매사에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합한 사람을 위해 우리의 책임과 일을 위임할 줄 아는 지혜와 자세가 필요하다.

상황설교

오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수세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한국의 개신교예배 또한 세례를 시작으로 탄생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매킨타이어(J. MacIntyre)목사가 1879년에 만주에서 베푼 첫 한국인 세례가 한국 개신교 예배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세례는 목회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개신교의 탄생은 1884년 선교사의 입국으로서가 아니라 예배, 그것도 한국인으로서의 첫 기독교인의 탄생을 의미하는 1879년도의 세례가 그 시작인 것입니다.

영어 속어 가운데 “귀밑을 적시다”(”Wet behind the ear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다는 말로서 비슷한 우리말이 있는데 생일을 가리키는 “귀빠진 날”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명이 태어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 물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전통적으로 한 생명이 태어나자마자 대야에 따뜻한 물을 담아서 어머니 태아에서 나온 생명을 깨끗이 목욕시키는 것은 그 어머니와 하나였던 몸이 단독적인 개인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며, 마찬가지로 세례를 통하여 씻김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한 인격으로 탄생되고 독립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태어난 생명체는 ‘내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부여되며 그 탄생의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두 딸을 둔 어느 어머니가 자신이 십대였을 때에 여드름으로 고생한 일에 대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녀의 얼굴에 흉하게 핀 여드름 때문에 창피하여 밖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을 때에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새롭게 얼굴을 씻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면대에 가까이 다가가서 물을 그의 얼굴에 끼얹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처음 물을 튀기면서는 ‘성부의 이름으로’ 두 번째는 ‘성자의 이름으로’ 세 번째는 ‘성령의 이름으로’ 이렇게 반복하고 나서는 거울을 보고 이렇게 말해라. ‘너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아름답게 지으신 하나님의 딸이다’라고 말이야” 이 여인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몸에 대한 존경의 가르침을 그녀의 딸들을 목욕시키면서 세례를 베풀 듯이 실천하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들은 목욕을 하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몸의 각 부분들을 창조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축복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였습니다.

한국에는 공중목욕을 좋아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대중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씻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편의시설이 각 지역마다 있어서 대형 찜질방에서부터 시골동네의 대중목욕탕까지 그 종류 또한 다양합니다. 저 또한 외국여행을 하고 올 때에는 동네 목욕탕부터 찾는 버릇이 있습니다. 물을 통하여 피로를 씻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곤 합니다. 우스운 얘기지만 외국 때를 말끔히 씻고 일을 시작하여 보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5절 말씀대로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새 생명가운데서 행하게 하십니다.

2001년 가을학기에 이화여대의 객원교수로 오셔서 예배학을 가르친 두류대학교의 헤더 엘킨스(Heather Elkins)교수는 다음과 같이 임진강 이야기를 들려주며 세례의 물이 주는 생명과 죽음의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다소 긴 문장이지만 외국인교수가 한국에서 경험한 세례의 보편적의미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아버님이 2001년 10월에 한국을 방문하셨습니다. 지금 연세가 85세이신데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시고 평생을 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경험한 한국은 51년 전 남북전쟁으로 찢어지고, 피로 물든 나누어진 분단의 모습이었습니다. (2001년 9월 11일사건 이후로)세계가 테러로 경악하는 시기에 아버님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무엇을 보시기를 원하는지 또 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전에 무엇이 아버님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한국에 도착하시자마자 다리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다리, 길, 사람들을 말입니다. 아버님은 전쟁 중에 육군공병에 계시면서 다리를 놓고, 길을 닦는 일을 하셨답니다. 아버님은 서울에 18개의 다리가 있음을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다리 하나하나를 일일이 방문하셨습니다. 아버님은 북쪽의 비무장지대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자유의 다리”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서해바다로 향하는 분기점을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강물이 합치는 모습을 보시면서 그는 친구들에 대하여 이야기 하셨습니다. 한국인 친구, 미국인 친구, 총알과 폭탄 속에서 같이 강을 건너던 그들을 말입니다. 그리고 강을 바라보면서 예전에 아버님이 세례 받으시던 이야기를 다시 또 한 번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10살에 세례를 받았는데 아버님의 형과 함께 추운 2월에 얇은 흰 가운만 걸쳐 입은 맨발로 강물에 들어갔었답니다. 그 때 회중은 강가에 모였습니다. 시골교회 목사님께서 무릎높이의 강물에 서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회중을 따뜻하게 하였습니다. 그 때 목사님으로부터 나의 아버지가 들은 이야기는 어느 시골목사가 추운강물에서 세례를 베푼 이야기였습니다. 세 번 물에 아주 푹 잠그는 침례 말입니다. 한번은 성부의 이름으로, 두 번째는 성자의 이름으로,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그런데 두 번째 물에 잠근 후에는 목사님의 손이 너무 차갑고 시려운 나머지 그만 잡았던 손을 놓쳐버리고 말았답니다. 세례를 받던 사람이 물살에 떠내려가자, 목사가 소리를 외쳤답니다. “주님이 주시고, 주님이 가져가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송축합시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저의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경직되어 얼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생각하기를 “세례를 받다가 죽을 수 도 있다고 아무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는 그날 강가에서 첫 번째 진짜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 저를 붙잡아 주세요! (Jesus, Hold on!)”

고령의 아버님이 DMZ비무장지대 근처의 강가에 서서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에 나는 비로소 그가 저 강을 다시 한 번 건너려 함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것은 더 차가운 ‘인생의 강’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이번에도 같은 기도를 드리실 겁니다, “예수님 저를 붙잡아 주세요!”

세례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죽음의 모습이 담긴 사건임을 풍자적으로 잘 표현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에서 사용하는 물의 양은 얼마가 좋을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세례냐? 침례냐? 의 질문으로서 무엇이 올바른 세례인가를 확인하고픈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물의 양에 대한 대답은 ‘죽음을 느낄 수 있을 만큼’입니다. 다시 말하여 물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물이 표현하는 그 힘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또 표현되어야 합니다. 아낌없이 풍성히 사용되어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례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입니다.

2. 세례는 중생, 용서, 그리고 씻김을 말합니다.

3. 세례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4.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됨입니다.

5. 세례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은 죽음의 물에서 나오셔서 하나님의 회중과 함께 계시며 첫 번째 자유를 얻은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모습(Imago Dei)’을 망치는 모든 것들을 물속에서 씻겨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모든 세례자들은 사회의 부조리, 노예근성, 이권다툼, 가짜특권, 신분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등의 죽음의 권세로부터 해방과 자유 함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전통은 사순절동안 준비하여 부활절 철야예배에 세례를 베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력에 맞추어 주현절에 행하는 세례식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방문하고 다녀간 주현절은 박사들의 우리의 감각을 흥분시키는 예물들을 떠올립니다. 마찬가지로 주현절의 세례는 물에 잠김이 주는 생명의 선물을 확인하는 교회의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들이 왜 값비싼 선물들을 바치고 싶었는지 상상하여봅니다. 엄청난 가능성을 안고 태어난 어린 아기와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한 여인의 수고에 감사하며 우리에게 준 그 축복의 시간을 선물로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인줄 압니다.

1월 20일: 2번째 평주일

사49:1-7; 시40:1-11; 고전1:1-9; 요1:29-42

고린도전서의 시작부분은 1세기 편지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송신자의 이름에 이어 수신자의 이름, 그리고 기도가 나오고 있다. 바울은 그의 편지 서두에서 일반적으로 감사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본문에서도 예외 없이 고린도인들의 신앙과 관련된 감사가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감사에 대해 말하기를 뒤에 나오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신랄한 책망으로 비추어 볼 때 일종의 풍자가 아니겠느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자 된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칭찬하는 바울의 습관으로 보아 단순하고 진정한 감사임이 분명하다. 물론 인간적 성취에 대한 감사보다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감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여기서 바울은 진리를 말하는 능력으로서의 ‘구변’(5)과 진리를 이해하는 것으로서의 ‘지식’(5)이라는, 고린도인들이 가진 두 강점을 언급하면서 감사를 드리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고린도인들이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12장 8절에 가 보면 고린도인들이 ‘지식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재확인하는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편지의 서두에 담은 고린도인들을 향한 칭찬은 후에 계속적으로 언급하게 될 그들의 부정적 측면, 즉 분열의 양상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매우 컸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편지의 처음에서 언급한 사도성을 배경으로 이들 고린도인들에 대한 애정과 훈계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1월 27일: 3번째 평주일

사9:1-4; 시27:1, 4-9; 고전1:10-18; 마4:12-23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사역을 갈릴리 지방에서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다. 갈릴리는 역사적으로 여호수아에 의해 납달리, 스불론,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이스라엘의 최북단 지역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북방 이방민족의 영향을 받아 이스라엘의 영토로써의 정체성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도 갈릴리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유대 지방과 구별되어 갈릴리 지방으로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갈릴리는 본래 이스라엘 땅이었지만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이방 변두리의 소외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갈릴리 나사렛으로 피난하여 사셨고, 유대 지방의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갈릴리 지방으로 가셔서 사역을 감행하셨다. 이러한 갈릴리 연고성에 대하여 마태복음은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14-16절). 이제 갈릴리에서 주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복음을 선포하셨고(17절),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다(18-22절). 그리고 온 갈릴리를 다니시며 복음과 치유 사역을 실행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연고성은 고통당하는 모든 인류에게 위로와 희망이 된다. 갈릴리는 구약부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잊혀지기 시작한 지역이다. 갈릴리는 역사적 문화적인 소외를 상징할 뿐 만 아니라, 인간의 당하는 정신적 육체적 억압과 고통을 상징한다. 오늘도 복음의 메시지는 소외와 고통의 사람과 지역에 전파되어야 한다. 소외와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또한 이렇게 구원받고 회복된 자들이 다시 복의 사도가 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KAM Newsletter 1호, 2007년 11월



인사말

서울 연희동에서 인사드립니다. 2008년 1월부터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 예배학교수로 부임하는 허정갑 목사입니다. 현재 저와 저의 가족은 아직 한국에 있으며 오는 12월 25일 성탄일을 한국과 하늘의 비행기, 그리고 애틀랜타에서 보낼 계획입니다. 다음 주에 이삿짐을 보내고, 비행기로 가져갈 이민가방에서 옷을 꺼내 입으며 생활하면서, 이곳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비록 어수선하고 정리가 안 된 날들이지만 앞으로 여러분과 가까이서 교제하며 한인교회와 미국장로교단을 위한 일을 위하여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기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내년부터는 여러분 교회를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하며 1세 및 2세 목회자, 평신도, 신학생을 위한 교육과 목회를 심도 있게 나누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가르친 지난 5년 동안의 한국경험과 뉴저지 베다니교회에서의 미국인회중 및 한인1세, 그리고 2세 회중을 비롯한 다양한 목회훈련이 앞으로의 사역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콜롬비아에서 가르치는 교수직과 함께 한미목회실 소장직을 맡게 됨은 그동안 애틀랜타 지역에서 수고하고 애쓰신 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여깁니다. 미국 남부지역에 대하여서는 잘 모르는 부족한 저에게 아낌없는 지도와 협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후원요청

구체적으로 2008년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서 새로이 시작하는 한미목회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고 내년도 예산에 line item으로 꼭 넣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현재 학교예산에는 아무것도 배려되어 있지 않고 오직 한인교회의 후원을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여러분과 여러분 교회의 의지를 표현하여 주신다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애틀랜타에 도착하면 ‘한미목회실 후원회(가칭)’를 조직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의 의견과 함께 같이 만들어가는 아름다운 한미목회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일에 참여하실 분들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귀교회의 2008년 예산편성에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한미목회실 후원을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북미예배학회

2008년 1월 3-5일 Savannah, GA에서 있을 북미예배학회 모임에 신학교에서 예배학과 설교학을 가르치는 주승중(장신), 김경진(장신), 김세광(서울장신), 박해정(감신), 조기연(서울신), 안덕원(드류신대원)교수 등이 참석할 계획인지라 여러분께 소식을 알립니다. 위의 분들을 1월 6일 주일예배 강단에 설교자로 초빙하실 수 있으며 1월 7일(월) “예배와 설교”에 관한 하루 세미나를 준비하고자 합니다. 많은 분들의 참석을 바랍니다. 강의내용과 자세한 안내는 추후에 다시 안내하겠습니다.

성서정과 12월(A) 설교자료

*현재 「목회와 신학」별지부록 「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하려 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본문안내를 그동안 연재하였는데 이번 호는 Year A가 시작되는지라 특별히 신경 써서 상황설교를 같이 실었습니다. 여러분의 목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림절

대림, 강림, 대강, 이 모든 단어들은 ‘주의 오심’을 전하고 있다. 바로 교회력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서 기다리며 주를 바라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앞으로의 4주 동안 강림절은 그리스도인들을 다음과 같은 2가지의 종말론적 기다림으로 안내한다. 첫째는, 성탄절을 통하여 인간으로 오시는 아기예수님의 첫 번째 모습을 다룬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 구원의 복음, 즉 기쁜 소식을 바라보는 것이다. 성탄의 참 의미를 기리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15:28의 말씀대로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 즉 나사렛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 세상의 역사가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맞이하며 그 날을 바라본다.

강림절은 예수님을 통하여 말씀이 육신이 됨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점차적인 기다림을 통하여 다가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나누어지고 깨어진 세상의 모습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실현으로 서로 하나가 된다. 세계는 분열에서 평화의 모습으로 변화됨을 경험한다. 강림절은 평상시 보통의 모습이 깨지고 혼란케 되는 시간이다. 교회력의 가장 먼저 있는 절기만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생명의 시작되는 시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임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을 주시길 원하신다. 바로 그 선물은 신앙공동체가 오랫동안 열망하고 소망하며 기다려 왔던 구약에서의 예언과 시편이 가리키는 정의와 평화, 그리고 메시아의 오심 바로 그 것이다. 이것이 현대사회에서 이야기하는 웰빙(Well-being)의 참 모습인 것이다.

12월 2일: 강림절 1번째 주일

사2:1-5; 시122; 롬13:11-14; 마24:36-44

본문은 처음 시작과 마지막 절 모두에서 인자가 오는 때를 아무도 모른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때를 아무도 계산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어 깜짝 놀라게, 소리 없이 다가옴을 적고 있다. 본문 속의 노아도 마찬가지였다(24:39,43). 깨어 있지 않았기에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와도 막지 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자가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심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명하신다.

사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예수님의 재림이다. 아기의 탄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다시 오심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림이다. 주의 백성 되는 공동체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예배인 것이다. 성탄절을 축하함이란 복음의 약속과 함께 우리를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환영하고 기쁜 마음으로 영접함에 있는 것이다.

상황설교

저는 목회자로서 그리고 예배와 설교를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로서 학생들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의 신앙이야기를 듣습니다. 신앙이야기뿐 아니라 거의 매일 진행되는 채플의 설교를 통해 한 주일에도 여러 편을 들으면서 설교를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기를 그 많은 신앙이야기들이 비록 서로 차이는 있을지언정 중심적 주제는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요 또 그로 인한 예기치 못한 ‘놀라움’이 주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하나님은 그를 맞을 준비된 자들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예기치 않게 찾아오심을 봅니다. 아주 흔히 아직 혹은 결코 준비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는데,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또 하나님이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오신 겁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오시고 싶으실 때 오시고 가시고 싶으실 때 가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하다고 해서, 우리가 부르짖는다고 해서, 우리의 영성이 민감하고 죄가 없이 깨끗하다고 해서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지 우리의 그 어떤 모습도 하나님을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예기치 않게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오고 가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관에 달려있지 우리가 좌우지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가족이 이민을 하여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살았습니다. 환경이 좋지 않은 지역인지라 하루는 도둑이 비어있는 저희 집 아파트에 들어와서 집 물건을 몽땅 들고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로 값이 나가지도 않던 접시, 수저, 오디오, TV 등 우리가 즐겨 사용하던 모든 것을 깨끗이 쓸어갔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정이 떨어지면서 그곳에서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았고 저희 집 식구들은 빨리 이사 나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우리는 오히려 그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날 도둑맞은 일은 우리에게 오히려 좋은 일이 될법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그 날 도둑이 든 사건은 결과적으로 저와 제 동생에게는 오히려 유익한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에 저와 동생들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텔레비전과 오디오에 하루 온종일 빠져 있는 일이 많았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일이었지요. 지금도 저의 아이들이 필요이상으로 TV에 빠져 할 일을 안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생각이 절로 납니다. 몰래 TV를 숨겨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입니다.

삶은 모순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도둑을 맞았을 때에는 겁도 나고 두렵기만 하더니 사실 잃어버린 물건들을 생각할 때에 차라리 없는 것이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일생을 통하여 물건을 모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주워 모은 그 물건들이 우리의 삶을 좌우지하며 끌고 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냅니다. 우리는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더 많은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잃는 것 같아도 참된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는 경우들을 체험합니다. 우리의 소유는 사라졌어도 삶의 질은 풍부하여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준비된 삶을 살면서 기다려온 사람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때가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다렸습니다. 그 세대가 지나가고 다음세대들이 또한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다림의 연속에서 또한 실망도 커져 갔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렇게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 그리고 여유 없이 안타까워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도적이 밤의 어느 시간에 오는지 알지 못함과 같이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러나 여기의 도적은 정말 이상한 도적입니다. 우리의 것을 빼앗아 가는 도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도적입니다. 어떤 때는 우리가 스스로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져가심으로서 그것에 우리도 모르게 매여 있는 우리자신들을 자유롭게 놓아주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전심으로 살게 하기 위하여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우리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지도 못하였던 선물들을 주시며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사람들의 간증 속에 그들이 미처 알지도 못하는 것들을 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들을 많이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믿음을 주십니다. 구하지도 않았는데 필요이상으로 풍성하게 허락하십니다. 얼마나 훌륭한 도적이십니까? 오늘은 강림절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찾아오시고 그분을 영접하도록 준비하는 날입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시간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도적과 같이, 밤의 도적과 같이 축복으로 다가오십니다. 맞을 준비 하십시오!

12월 9일: 강림절 2번째 주일

사11:1-10; 시72:1-7, 18-19; 롬15:4-13; 마3:1-12

강림절 두 번째 주의 구약말씀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어온 해석으로 왕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다윗과 메시아로서 오신 아기예수의 관계를 궤도에 올려놓고 있다. 3절과 4절에 보면 새로운 왕은 성령의 능력을 가진 분으로서 불의의 뇌물을 탐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달콤한 유혹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며, 귀의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주며 정직으로 겸손한 자를 세우는 통치를 펼친다.

이사야 기자는 계속하여 이 왕이 칼과 활, 그리고 창으로 무장하는 모습이 아니라 공의로 허리띠를 삼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는다고 기록한다. 새로운 세상은 창조의 회복과 화해를 통한 일치를 이루며, 난폭함이 온순하게 길들여지고 죽음의 위험까지도 극복됨을 그리고 있다. 오랫동안 서로의 적이었던 이리와 어린양, 표범과 어린염소, 송아지와 어린 사자, 암소와 곰, 사자와 소가 친구가 되며 독사와 어린아이가 함께 장난할 것을 예언한다.

6절의 어린아이 및 8절의 젖 먹는 아이와 젖 뗀 어린 아이를 통하여 세 번 씩이나 나오는 어린아이는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있는 열방을 다스릴 인물을 가리키고 있다. 어린아이는 때 묻지 않은 순수이다. 부드럽고, 친근하며 잘 믿는 순진함이 그들의 특징이다.

이러한 모든 가능성은 성령의 바람에 있다. 불어오는 바람은 나무의 그루터기를 흔들어 놓으며 뿌리 채 뽑아버리기도 한다. 대림은 이미 실패하고 희망 없는 나무들을 뽑아버리는 새롭고 강력한 바람을 믿고 의지하며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는 때인 것이다.

상황설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우리의 순진함을 너무도 일찍 잃어버립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어린이들이 품는 꿈과 상상력들을 너무도 쉽게 포기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이 회복되는 때가 올 것이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두려움으로 인해 움츠러들고 제한되어진 어른들의 시각이 아니라 착하고 꾸밈없는 순진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는 오늘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은 어린아이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제가 지금보다 한참 어렸을 적에 누군가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너의 아이디얼한 젊음의 상상력과 꿈은 다 좋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꿈의 날개를 접고 세상의 현실과 타협하여야 하고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갖도록 성장하여야 한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성장하여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을 버리고 어린 아이의 일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고전13:11). 그러나 아직도 생각되기는 이 세상에서 현상유지에 만족하지 않고 이상을 꿈꾸며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를 순진하고 철없는 낙천주의자 정도로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삶이란 지극히 신비롭고 경이에 찬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동화 속 상상의 이야기와 역사 속 실화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놓고 가기를 기다리는 어린이들은 선물을 받고 신기해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년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기다림이 재미없어 질 때에 선물 또한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 또한 기다림과 신기함은 사라지고 세상의 모든 것이 시계 톱니바퀴 돌아가듯 의례히 일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소나무의 색깔이 초록색임은 달리 다른 선택이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 들이 예상되는 대로 시간의 흐름과 함께 설명되어지고 오늘도 저물어 가는 해는 지며 이번 2007년도 한 해도 12월 달 달력을 넘김으로 새로운 해가 여지없이 시작되겠거니 생각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생명체인 어린이들은 그들이 즐길 수 있고 신기한 일을 발견하였을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외칩니다, “아빠, 한번 더 해요!” 아이들의 기쁨에 못 이겨 어른들은 그 일을 계속 되풀이 하며 놀아줍니다. 반복 또 반복… 어린이들이 싫증이 나서라기보다는 어른들 자신이 지쳐서 못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사실상 어른들은 계속되는 반복을 쉽게 지루해 합니다. 재미가 사라집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매일 마다 꽃들에게 “우리 또 하자!”라고 말하고 계신지 모릅니다. 다행이도 하나님께서는 매일 계속되는 반복을 지루해 하지 않으시기에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인도되며)”(사11:1,6)

이러한 세상은 전쟁의 모습이 아니라 평화의 모습입니다. 서로 싸우며 서로를 잡아먹는 짐승세계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같이 노는 비전을 이사야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전을 이사야 선지자는 10절에서 ‘기호’(개정판, banner-NIV)라고 합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남을 ‘만민의 표징’이라고 말하며 이것을 보며 열방이 위대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리라고 예언합니다.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합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장차 오실 그 나라에 참여하고자 우리와 함께 하실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바라보고자 기도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언가 행하여야 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로 볼 줄 아는 비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바쁜 듯이 계속하여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이러한 비전을 바로 볼 줄 아는 삶을 말합니다. 이 비전에는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12월 16일: 강림절 3번째 주일

사35:1-10; 시146:5-10; 약5:7-10; 마11:2-11

강림절 셋째 주일에 해당하는 구약 본문은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한 희망을 다룬다. 이사야 35장은 시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이 있음을 선언한다. 본문은 자연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1-2절)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하나의 형식을 제공한다. 자연은 새로운 구원을 가져오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본문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출현은 하나님의 임재를 묘사하고 있는 이사야 34장의 문맥에서 구원이라기보다는 심판을 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사야 34:2-4는 하나님이 어떻게 나라들을 진멸하시며, 어떻게 그들의 시체에서 악취가 솟아오르며, 어떻게 해와 달과 별들이 붕괴되고 하늘이 마치 두루마리처럼 말릴 것인지를 설명한다. 이사야 34장과 35장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을 강조한다. 심판(34장)과 구원(35장), 그리고 파멸(34장)과 재창조(35장)가 동시에 경험될 수 있다. 희망과 신뢰가 이사야 34장과 35장 사이를 구분하는 선인 것이다. 인간의 힘에 대한 희망이 나라들의 파멸 원인이 되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은 살아남는다.

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희망하는가? 본문은 크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시는 것(1-6상절)과 새로운 구원(6하-10절)으로 구분된다. 하나님의 재출현에는 자연(1-2절)과 하나님의 남은 자들(3-6상절)의 반응이 따른다. 하나님의 재출현을 동반하는 새로운 구원은 버려진 사막을 비옥한 오아시스로 만들며(6하-7절), 사막을 지나는 새로운 탈출을 위한 거룩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며(8-9절),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시온으로 돌아오게 만든다(10절).

본문이 이사야 34장의 배경과 상치되도록 이해될 때는, 구원이 철저하게 반전되는 이유가 인류와 창조 모두를 위한 것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나라들이 파괴되고 그들의 경작지가 승냥이와 사나운 짐승들을 위해 버려진 땅으로 바꾸어질 때(34:8-12), 이사야 35장은 동시에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지를 묘사한다. 광야가 풍부한 농경지로 바꾸어질 수 있으며(1-2, 6상-7절) 구원의 도로가 이전에 생각할 수 없었던 길로 변할 수 있다(8-9절). 더구나 사람들도 새롭게 되어(5-6상절)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리고 시온을 향하여 항상 노래를 부르면서 구원의 도로를 지나갈 수 있게 된다.

이사야 35장을 설교할 때 중심 주제는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때에라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출현을 동반해야하는 필수적인 사건들로 독자에게 표현되는 자연과 인류의 철저한 반전은 강림절에 중심이 되는 하나님에 대한 희망의 동기와 견고한 기초를 제공한다. 이와 같은 철저한 반전은 우리의 현재 경험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이나 확실성에 대한 최후의 말이 될 수 없는지를 강조한다. 강림절에 우리가 할 일들의 하나는 이사야 선지자의 눈을 통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신앙공동체를 살피고 3-4절에 나오는 그의 격려의 말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연약한 손”이 “강해져야 하는지” 또는 우리의 “약한 무릎이” “견고해져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물어보아야 한다. 두려움은 어디로 들어오며 희망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하나님께서 필히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이 강림절의 메시지를 필요로 하는 자는 누구인가?

특별설교 마11:2-11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

성서정과를 따라가면서도 시대적 상황에 맞는 상황설교를 적용하는 것은 설교자의 민감한 영적 반응이다. 대통령 선거일이 있는 이번 주 본문인 마태복음 11장 세례요한의 이야기를 통하여 한 나라의 중요한 대선을 준비하는 위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신앙인의 자세를 고찰하고자 한다. 교회가 세상의 정치에 침묵하지 않고 어느 누구 편을 들지도 않으며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외침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책임이라고 믿는다.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을 통하여 과연 예수가 기다리던 메시아인지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요한의 사역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한 자로서 담대하고도 힘 있는 리더십으로 로마 군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그에게 오게 하였고 회개하며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묻게 하였다(눅3:1-20). 예수님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11절). 그런 요한도 죽음을 앞두고 흔들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예수님이 과연 그가 죽음을 담보로 일생을 건 메시아인지 확인하고픈 것이었다.

요한의 시작은 엄청난 힘을 갖고 헤롯당의 정치계를 포함한 사회 구석구석에 선지자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런 요한도 여자의 자식으로서 우리와 같은 연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하기에 이번 대선에서도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가 중요함이 아니라 어떤 대통령을 원하느냐가 더 중요한 우리의 염원이다. 한 지도자의 판단력과 영향력이 앞으로 5년, 아니 더 많은 시간을 좌우할 것이기에 예수님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세례요한의 리더십을 희망하여 본다.

2007년 미스유니버스 대회 마지막 5명 결선에서 이하늬에게 ‘수퍼파워가 주어지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대선주자들에게 같은 질문이 주어진다면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요한이라면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메시아를 알아보길 원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회중 속에 섞여계신 예수를 볼 줄 아는 지도자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아름다운 정치를 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요한의 큰 그릇됨을 칭찬하시며 11절에서 ‘천국의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하신다. 주님과 함께 하나님나라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희망과 복음의 메시지이다. 세례요한보다 크게 된다는 상상이 가는가?

12월 23일: 강림절 4번째 주일

사7:10-16; 시80:1-7, 17-19; 롬1:1-7; 마1:18-25

이제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의 삶과 신앙의 전부인 예수님의 탄생이 바로 눈앞에 있다. 우리의 역사와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 수많은 노력으로 예수를 설명하여 왔는데 본문에서도 두 가지 갈림길의 방법으로 서로의 긴장을 초래하고 있다. 이는 다윗의 계보를 통한 오래된 약속과 오래된 예언의 실현이요, 또 하나는 성령으로 잉태된 새로운 실현의 모습이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23절) 마태의 서술에서 예수의 이름을 설명함이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마태는 예수의 탄생을 기록함보다 그가 어떻게 잉태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절인 25절 단 한절에서 예수의 탄생이 기록되고 이어서 요셉이 마리아가 낳은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음으로서 예수의 족보는 이어진다. 예수의 잉태에 대한 기록은 첫째,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다른 문화권들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건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은 다른 모든 이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예고하고 있다. 오직 그는 성령의 도움으로 존재하며 하나님의 권능으로 시작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둘째로, 마리아가 동정녀이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요셉이 자신이 갖고 있던 의심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서 독자들의 궁금증까지 해결하여주는 진행으로 안내하고 있다. 동정녀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창조의 방법으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었고 준비하셨음에 있다. 바로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임을(21절) 확인시키며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게 된다. 16절에서 불리어진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기름 부은 자의 뜻으로서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를 가리키며 앞으로 있을 죽음과 부활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시는 자이심을 나타낸다. 본문은 그리고 또 하나의 이름을 밝히는데 이사야서 7:14절에 나타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다. 예수는 한 지역과 민족에 묶여있지 않으며 열방과 온 민족에게 구원자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총괄하여 우리와 함께 존재하심을 의미한다.

상황설교

‘이름은 잘 지어야 오래 산다, 또 이름대로 사람의 인생이 다루어진다.’고들 합니다. 이름이 주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이들의 이름을 지을 때 고민 끝에 이름을 짓습니다. 성경에도 이름을 중요시 여김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증거로 하나님은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며, 야곱이 이스라엘, 시몬이 베드로, 사울이 바울로 바뀌는 등 여러 가지 예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기독교인이란 이름을 갖고 변화된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생활전선에서 여러분은 아무리 억울한 일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하나로 양보를 하였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그것은 그 이름이 그 사람의 모든 생활을 대표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서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이름에 대한 집착이 상당히 큰 편입니다. 선조의 명성과 명예, 선과 덕을 쌓아 이름을 세우는 것은 곧 자손에게 물려주는 가장 훌륭한 유산이라고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부모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서양 사람에 비해 한국인은 선조나 선친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을 부덕이요, 죄악시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어 글을 읽을 때에 최소한도 5대조까지의 이름자가 글에 나오면 읽지 않고 묵음을 하고 넘어가거나 ‘애고애고’ 하며 곡으로 대신하여 읽어 내렸다고 합니다. 이 풍습은 원시적인 주술사고의 영향에서 비롯됩니다. 이름이 단지 기호가 아니라 그의 생명을 좌우하는 주술을 지닌 것으로 알고 이름을 저주하거나 이름을 훼손하면 생명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는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우리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뜻은 자기백성과 관계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우리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게 제3계명을 철저하게 지켜 그 거룩한 이름을 전혀 발음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를 읽어야 할 경우 ‘그 이름’이라는 뜻의 ‘하솀’을 외치던지 주님을 의미하는 ‘아도나이’로 읽었는데 후에 이로 인해 여호와에 대한 원래의 발음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이지만 그 이름이 제대로 맞게 불리어 지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그 이름은 예수라 하라, 또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그 어려운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이 예언되시며 그 사역이 시작되어집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수아의 헬라어로서 죄에서 구원할 자, 즉 하나님은 구원이시라는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감추어진 지혜를 알게 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날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역사가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다 주셨고 어두운 이 세상에 밝은 빛으로 언약의 아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온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임재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키 위하여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니 나의 모든 죄와 고통 속에서 해방을 주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바로 나를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생각해 봅니다. 제가 태어난 동양문화와 성장하며 고등교육을 받아온 서양문화의 차이점을 비교하면서 동서양문화의 만남인 우리 한국교회라는 이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물어봅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기에 앞서 어린아이들에게 지난 1년 동안 어떤 착한 일을 했느냐고 묻고 거기에 맞는 상을 주는 것은 서양적 교육방식입니다. 설날 세배하는 어린이들에게 착한 아이가 되라고 가르치며 세배 돈을 주는 것은 동양적 교육방식입니다. 어린이라는 이름 하에서 서양에서는 어떤 일을 했느냐(Doing)가 중요하지만 동양에서는 어떤 아이인가(Being)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서구문화권에서는 재능과 전문성을 띈 교육을 시키고 동양에서는 전문성 보담은 전인격적인 의미에서의 무엇에든지 적응하는 쓸모 있는 사람 되기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가르침 중에서 효의 진정한 의미는 부모님을 잘 공경함도 중요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속한 가문의 이름을 빛냄에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 이란 이름을 어떻게 빛내시렵니까? 히브리서 13:15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서 여러분이 예수님을 뵈올 때 주님께서 너는 많은 일을 하였다 하시기전에 여러분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이 사람을 내가 아노라”하실 때의 감격이 기다려집니다.

고요한밤, 거룩한 밤, 진정 그렇습니까?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그토록 기다리던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예언을 합니다. “칼들이 너의 가슴을 찌를 것이라” 헤롯의 칼을 피하여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을 갑니다. 동방박사의 선물 중에 있는 몰약은 슬픔을 뜻하는 향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상품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징글벨을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외롭고 쓸쓸하며 허전함을 느끼는 때도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특히 도심지에서는 여러분의 빛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 자루의 촛불의 희망이 이처럼 안타깝게 느껴지는 때도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 이란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그 이름은”크리스천”이란 말에서 오는데 교회에 다닌다는 의미가 아닌 그리스도를 증거함에 있습니다. 오늘은 강림절의 마지막 주일로서 앞으로 거의 매일저녁마다 성탄절과 연말연시를 기념하는 모임과 행사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이모든 귀중한 행사들을 준비하고 참여하면서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을 어떻게 증거하시렵니까?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9-11)

성탄절

언제가 성탄일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지 성탄절의 기간이 3세기 초까지 지켜지지 않은 가운데 그 근원을 찾는다면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날(춘분, vernal equinox)이라고 믿는 3월 25일을 기점으로 9개월을 계산하면 12월 25일이 된다. 또한 이때는 12월 21일로 정하여진 동지(winter solstice)의 시간과 맞추어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며 빛으로 오신 예수를 상징함에 창조신학과 맞물린다.

성탄전야, 성탄일 새벽, 성탄일에 사용되는 본문들은 성서정과 3년 내내 똑같은 본문들로서 서로 호환성을 갖고 바꾸어서 사용되어지기도 한다. 성탄절후 1째 주는 예수님의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예배한다(Holy Family Sunday). 우리는 지난 한해를 돌아보며 우리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을 이야기하고 과거와 현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도 같이 고통에 임하고 계심을 전한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새로운 출애굽을 위한 시작일 뿐임을 강조하여 준다. 예수의 탄생을 시작으로 죽음에서 부활로 이어지는 고백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신학 및 새로운 출애굽의 시작임을 선포한다.

이번 한해를 비롯하여 역사 속에서의 재난 및 인간 살상의 범죄의 모습은 히로시마의 원자폭탄을 비롯하여 이라크 전쟁, 북의 핵문제, 나누어진 대한민국의 사회현황 등 인간의 모습으로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고백하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새날과 새해를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초청을 하여본다.

12월 24일: 성탄전야 혹은 성탄일 새벽

사62:6-12; 시97; 딛3:4-7; 눅2:(1-7)8-20

누가복음 1-2장은 누가가 전하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매우 극적이며 매우 유대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누가의 이야기를 읽거나 듣는 사람은 유대주의의 종교 세계가 헬라-로마의 정치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상당히 잘 짜여 있다. 누가복음 1:5-25에서 요한의 출생이 예고되고 눅 1:26-38에서는 예수의 출생이 예고된다. 그 다음, 눅 1:57-66은 요한의 출생, 할례, 이름 짓기에 관해 전하고, 그 후에 눅 2:1-21은 예수의 출생, 할례, 이름 짓기를 전한다.

본문은 자연스럽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눅 2:1-7은 인구조사와 예수 출생에 관해 말하고, 2:8-14은 목동들과 천사들과의 만남을 설명하며, 2:15-20은 목동들의 방문을 거룩한 가족과 연결시킨다. 혹자는 본문을 장편 3부작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와 예배를 위해 3부작 중에서 하나 또는 두개를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본문의 시작 부분인 눅 2:1-7은 로마가 지배하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전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지고 있는 다윗의 후손에 의한 통치의 기대를 간단하게 그리고는 예수의 출생을 이야기하려 한다. 예수 출생의 겸허한 상황이 강조된다.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다가왔는데도 숙박할 시설이 없었기에 아기예수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 있다. 이것은 앞으로 예수의 역할이 세상을 구하는 음식(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며 내 피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곧 출생할 아기 예수를 위한 방 하나 없다는 것은 앞으로 예수가 자신의 인생과 사역에서 만나게 될 실제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다.

다음의 구절들(8-14)은 다윗 도성에 적절한 인물들인 목자들을 소개한다. 목자들이 천사의 출현에 대해 반응한 것에 주목하라.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누가는 목자들의 두려움을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해하여 그들의 경건함을 알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천사들의 영광이 자신들을 비출 때 목자들은 단지 수동적으로 두려움에 갇혀있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부름에 대해 반응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들의 다양한 행동들에 주의해야 한다. 한편으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져다 준 결과들을 경험하고 사건들에 대해 묵상하였다. 반면, 목자들은 두 번째 복음전도자들이 된다(첫 번째 복음전도자들은 천사들이다). 그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곧 떠났다. 그들의 선포는 예수의 출생 이야기를 들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였다. 그들이 유명인사가 된 것은 단순히 천사들의 방문을 받고 아기예수를 본 것 때문이 아니었다. 목자들은 두려움에 갇혀있지 않고 첫째는 복음을 나눔으로,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예배함으로 자신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12월 25일: 성탄일

사52:7-10; 시98; 히1:1-4(5-12); 요1:1-14

요한복음의 서문은 성육신 교리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게 된다. 말씀인 로고스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여 요한복음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한 복음서이다.

창조와 계시는 하나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창세기 1장1절을 상기시키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창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말씀은 새로운 창조의 모습임을 표현하고 만물이 그로인하여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은혜와 자연의 조화는 구원의 완성으로서 생명과 빛의 상징을 통하여 진행되며 이세상인 지구를 사랑하여 이 땅에 오신 참 빛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이 시작되는 창조 및 출애굽은 생명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고 생명신학의 초석을 놓는 사건이다.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시간이다. 특별히 이 날은 설교자의 말씀보다는 성가대의 찬양이 귀에 맴돌고 가슴에 여운을 남기며 남아있는 날이다. 그렇다고 결코 설교준비에 소홀히 하여 찬양대나 주일학교 발표에 만족하여야만 하는 예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더욱 설교말씀에 충실하여 본문과 씨름하며 예수님 탄생의 기적을 표현하여야겠다.

상황설교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화가가 추운겨울날의 모습을 그림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산천초목위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몇 채 있는 그런 쓸쓸한 모습이었는데 해가 이미 저문 모습으로 점점 바뀌어 갑니다. 그림이 어두워지더니 전체가 진한회색으로 변하며 침침하고 썰렁한 찬바람이 곧 불 것 같았습니다. 가운데 자리 잡은 초가집조차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화가는 노란색 물감을 찍어 몇 번 손을 움직이더니 초가집 창문에다가 작은 촛불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 노란 촛불의 빛이 하얀 눈 위에 비쳐지며 어둡기만 하던 그림은 밝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한 자루의 촛불은 어두침침한 한겨울밤의 모습에 밝은 희망과 내일의 새아침을 약속하듯 힘 있게 타들어 갑니다.

바로 이 그림에서 일어난 변화가 2000년 전 이 세상에 일어났습니다. 어둡기만 하고 찬바람만 일던 이 세상에 어린 아기가 태어나 그 빛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따뜻하고 밝은 빛으로 죄 많고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셨습니다. 그 어린 아기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 나셨습니다. 흔히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보는 잘생기고 토실토실하여 쿡 찌르면 방긋 웃을 것만 같은 귀여운 모습이 아닙니다. 핏덩어리 모습의 아기 그대로 이 세상에 오시었습니다. 아기를 배고 해산할 날을 기다리시던 분들은 아기가 태어나기를 위하여 기다림이 어떠신 줄 아실 겁니다. 그 기다림보다 더한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줄 압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아기예수에 대하여 힘 있는 성탄절 설교를 다음과 같이 한 바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주위에서 태어나는 어린생명들을 접함과 같이 구주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신성과 위엄성을 생각지 말고 그의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세요. 어린 아기예수를 바라보세요. 그의 신성은 우리가 감히 바라볼 수 가 없습니다. 그의 위대하심에 우리가 얼굴을 들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인간의 형태로서 이 땅에 오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를 위로하시며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볼 수 있는 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너무 빛이 세서 우리의 눈이 멀어 장님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악을 이기며 어두움을 물리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그 아기를 통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깨닫습니다. 그 아기의 작은 불빛이 그 주위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기예수는 어둡기만 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무도 마리아가 임신한 것에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기를 낳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는 이 조차 없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봅니다. 따뜻한 불도 물도 없이 깜깜한 오밤중에 산파조차 없이 마구간에서 혼자 아이를 낳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요셉과 마리아가 여행 중에 아이를 낳을 줄 조금이라도 예상하였더라면 나사렛에 그대로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상보다 일찍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옷으로 아기를 싸서 구유에 누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소나 말이 먹는 여물통입니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침대나, 의자, 이부자리, 아니면 땅바닥도 아닌 여물통일까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침대도 없고, 의자도 없고, 이부자리도 없습니다. 여물통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쓸쓸한 마구간에서 물도, 불도, 빛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하나님은 겸손히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어두움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밝게 빛나는 빛이십니다. 그 빛을 보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물질의 빛이 아니시고 우리 영혼의 빛이시라고 합니다. 이 빛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마치 태양빛 아래에 서있는 장님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 빛은 아무도 피할래야 피할 수 가 없이 온 세상에 두루 비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앞이 안 보이는 장님일지라도 그 영혼 속에 비치는 그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십니다. 많은 찬송가를 지은 훼니 크로스비(Fanny Crosby) 여사는 사고로 장님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되어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사는 늘 말하기를 사고로 실명한 눈을 다시 뜨게 되었을 때에 제일 처음 보고 싶은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라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얼굴 앞에서 웃으시며 계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한 감격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은혜로서 우리 모두에게 비추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의 뜻과 복음적 사명을 전하라 명하십니다. 빛은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빛은 더러운 것과 지저분한 것도 밝힙니다. 빛은 우리의 텅 빈 모습도 밝혀 줍니다. 빛은 우리의 꿈과 좌절까지도 확대하여 보여줍니다. 빛은 다시 말하여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밝히기 보담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 그대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힙니다. 어두움에 잠긴 밤의 시간이 제일 길다고 하는 동지를 전후하여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앞으로 조금씩 길어지는 태양의 시간을 누리시며 저와 여러분도 빛의 자녀로 살기를 다짐하여 봅니다.

12월 30일: 성찬절후 1번째 주일

사63:7-9; 시148; 히2:10-18; 마2:13-23

피의 베들레헴으로 불리어지는 본문은 2살 미만의 남자아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개정공동성서정과(1992)에 새로이 추가된 본문으로서 예수탄생의 기록과 함께 참혹하게 죽어간 어린생명들의 가슴 아픈 내용을 싫고 있다.

이번 기록들은 이스라엘의 역사기록으로 나타난다.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지형들인 베들레헴, 애급, 이스라엘, 나사렛, 갈릴리 등은 세상에 함께 계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순서적으로 나타내며 매우 중요한 여행을 하고 있는 예수님의 가족을 친히 지키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확인할 수 있다. 천사는 3번씩 나타나서 요셉에게 나아갈 길과 때를 분명하게 지시하고 있다 (2:13, 19, 22).

아기 예수와 그 가족이 행한 애급으로의 도피는 모세의 출애굽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서로 상반되는 상황이지만 모세와 예수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역사를 제시하며 새로운 출애굽을 예고하고 있다.

본문에서의 지혜로운 안내자는 요셉이 맡고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함에 헤롯과 그의 살인적인 군대의 손을 피하여서 나사렛에서 무사히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낼 수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출현이 악의 세력에게는 큰 위협인 것이다. 예수의 탄생과 함께 등장하는 악의 모습이다. 아무 죄가 없는 어린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슬피 우는 어머니들의 탄식소리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예레미야 시대의 통곡(예31:15)을 반영하고 있다. 잔인한 악의 모습은 결코 헤롯의 죽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하여 진행되며 마침내 잔혹한 형벌로 생명을 다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결코 이 모든 파괴와 폭력이 하나님의 힘과 사랑을 능가하지 못함을 본문은 예고하고 있다.

그러기에 베들레헴에서 시작된 아픔과 분노의 현장은 세상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고 왕으로 오신 아기예수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우리의 노래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함께 고백하여야 한다. 즐거운 성탄절은 아픔과 고통의 성금요일 십자가상의 모습을 함께 포함하여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회복시켜야 한다.

상황설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은 현재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서 이스라엘군대와 무장충돌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입니다. 오늘날 베들레헴은 평화로운 시골 도시로서 관광객들이 예루살렘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와 예수님의 탄생지에서 사진을 찍고 쉽게 돌아갈 수 있는 곳으로 막연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 지저분하고 가난하며 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안한 날이 없는 곳으로 크리스마스의 축제적 분위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여러분을 베들레헴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3-23절을 봉독한다)

우리는 권모술수로 좋지 않은 일들을 도모하는 세상의 정치가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바로 오늘 성탄절이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12절이나 되는 구절 속에 예루살렘의 정치가 헤롯왕의 음모와 만행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2살 미만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끔찍한 만행입니다. 일찍이 애굽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사내아이들이 산파의 손으로 죽음을 당하였던 시대에 태어난 모세가 바로의 궁중에서 그 목숨을 살렸던 것과 같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머무름을 보게 됩니다.

헤롯왕은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말에 당황하여 그 씨를 말리는 유아학살을 저지릅니다. 과거의 독재자들, 폭군, 그리고 잔인한 정치인들이 죄 없는 백성들을 죽였듯이 헤롯은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저지릅니다. 이 이야기가 다음의 찬송가사와 너무나 대조되지 않습니까? 통일찬송가 120장입니다. “오 베들레헴 작은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그러나 이 평화로운 찬송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차라리 다음과 같은 가사가 어울릴지 모릅니다.

(찬송가 120장 곡에 맞추어 불러본다) “오 베들레헴 작은골, 비명의 소리와 어린이들의 피 냄새 진동을 하도다 그 어미들의 절규 소리가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퍼진 줄 너 어찌 모르나” 저 잃어버린 어린 생명들을 위한 부모들의 울부짖는 탄식소리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저 기쁘기만 하고 그저 즐겁기 만한 성탄절의 평화를 외치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캐롤의 이면에는 이처럼 잔인하고 슬피 우는 탄식의 소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헤롯왕의 피 비린내 나는 학살만행을 배경으로 한 채 마태복음의 성탄절 기록은 그 끝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의 소리와 함께 라헬의 울부짖음, 자식들을 잃고 크게 슬피 우는 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2:18)

이것이 베들레헴의 진짜 크리스마스입니다. 헤롯은 바보가 아닙니다. 배운 것이 없는 무식한 목자들도 알아본 아기예수입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의를 갖추어 찾아올 정도의 분명하고도 위협적인사건을 무시할 그는 아닙니다. 노련한 정치가로서 그의 정치세력을 위협하는 그 어떤 것도 가만 놔두지 않습니다. 그는 역사 속에 그 악명 높은 이름을 남긴 다른 정치인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중에는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과 같이 그들의 신념과 이상을 위하여 반대세력들을 무참히 처단한 권력이 있습니다. 세상은 베이루트라고 하는 도시에 중동지역의 평화라는 명목으로 무참히 폭격을 가하였습니다. 세상은 보스니아라고 하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도록 보고만 있었습니다. 세상은 베이징이라고 하는 도시에 탱크가 시민과 학생들을 진압하여도 구경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세상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어 무력으로 평화를 만든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으로 세계는 보스니아, 베이루트, 벨파스트, 베이징이라고 부르지만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솔직하지 못하고 무력으로 우리의 것을 지키겠다고 합리화 시킵니다. 잠시라도 주위의 시끄러운 소음들을 제거하고 조용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묵상한다면 아마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크게 슬피 우는 소리들을 쉽게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을 베들레헴으로 초청합니다.

낙태라는 수술의 칼로서 어린 생명들을 죽이는 곳을 세상은 병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주한미군들이 탱크 훈련 중에 어린 여자중학생들을 깔아 뭉갠 곳을 우리는 파주시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미국교회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미국의 원자폭탄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성탄절후 주일에 일본에 희생된 생명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로 지킵니다. 바로 이것을 성경은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세상의 아픔들이 크리스마스와 상관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크리스마스에 꼭 기억해야할 이야기들입니다. 이처럼 아픔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아픔의 베들레헴에 오시기를 거부하는 신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려오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천사들에게 고상하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에 오신 예수님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피로 얼룩진 우리 인간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누군가 피를 흘릴 희생을 무릅쓰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의 피의 사건은 바로 나중에 갈보리에서 흘리실 십자가상의 피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인 그 분께서 세상의 왕들과 그 권력이 쏟아내는 서슬 푸른 폭력을 마주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감당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베들레헴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