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M Newsletter 12호, 2008년 12월


2008평신도 제직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 콜롬비아에서의 수업과 베다니교회 안수직분자들 축하연

11월3일 Harrington Center Auditorium

인사의 글

대림절의 인사를 드립니다.

2008년의 마지막 한 달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역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연구소 모금운동을 시작한 이후 가장 먼저 뉴져지 연합장로교회(이종안목사)에서 $2,000 수표를 보내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전화 대화속에서 도와주시마고 쾌히 약속하여 주신 분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부디 년말결산이 확정되는대로 보내드린 봉투에 약정액수를 기입하여 우송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여러분들의 뜻이 담겨지고 모여진 정성이 함께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실줄 믿습니다.

12월 6일 (토) 저녁 7시에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캠벨홀 예배실에서 그동안 10주동안 수업에 임하였던 평신도 제직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 제1기 졸업식이 거행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강사로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여러 목사님들과 교회제직들에게 감사드립니다. 4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이번 교육은 여러면에서 성공적이었으며 많은 분들이 다음학기에도 이어지는 계속교육을 원하고 있습니다. 애틀란타에서 거리가 있는 지역에는 프로그램을 압축하여 여러분의 교회로 가지고가는 맞춤형 주말 ‘장로교 제직교육’ 프로그램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12월 14일(주일) 오후 5시에는 알라바마주 버밍햄 장로교회에서 박관준목사의 사회와 손순목사의 이임사, 조연형목사의 취임사, 그리고 허정갑교수의 설교로 이취임 예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미 메일 받으신 바와 같이 2009년 3월 2-5일 KPC 목회자 평생교육이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학교의 정책상 2인1실 15개 숙박실이 현재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은 안된다고 합니다. 타지역에서 오시는 분들은 필히 예약신청을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선착순으로 30명에게만 Harrington Center의 방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또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달력에 날자를 기입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모임이 시작되는 날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시길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드림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12월(B) 교회력에 따른 설교

기쁨의 노래

대림절(Advent)

(1) 대림절의 의미 - 대림절은 성탄절 이전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4주를 지칭하는 절기이다. 대림절을 뜻하는 영어 단어 advent는 라틴어의 두 단어 - ad와 venire로 이루어져 “다가옴”(coming)을 뜻한다. 대림절은 오래 전부터 대강절이라는 이름과 혼용되어 쓰이는데, ‘대’(待)는 ‘준비하고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강’(降)은 ‘내리다’, ‘림’(臨)은 ‘임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에 따른다면 ‘강’의 쓰임은 상징적, 시각적, 일시적 의미가 강하며, ‘림’은 실제적, 현실적, 과정적의미를 강조한다. 대림절은 오늘날의 축제와 같이 성탄절을 성원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림절은 엄청난 긴장이 존재하는 절기이다. 2000년 전에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다시 오실 재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표현하는 절기인 것이다. 즉,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에 감사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기대를 담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예배 준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의미뿐 아니라,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표현하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림절의 전통적인 색깔은 근신과 절제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사용된다.

(2) Year B의 성서 정과와 대림절 설교 준비

그리스도께서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는 말씀은 삶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배에서 어떤 한 계층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면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계층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러한 점을 모두 고려하여 모두에게 향하는 메시지를 전달해야한다. 대림절의 성서정과에서 이러한 신분의 높고 낮음으로 인한 삶의 차이 그리고 그리스도를 맞이한 자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았다; 어떠한 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선 대림절 첫째 주에는 ‘경계’라는 주제 하에 고린도전서 1:3~9의 말씀을 통해서, 오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견고케 하실 것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면서 대림절을 열어간다. 두 번째 주에 선지자 이사야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에 관한 예언으로 대림절을 이어간다. 희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희망의 이사야로 불리는 40:1~11의 본문을 가지고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는 돋우어진다.’는 말씀을 우리의 높아져야할 부분과 낮아져야할 부분으로 나눠 주님의 오심을 준비시킨다. 세 번째 주에 이르러서는 다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이사야 61:1~4, 8~11) 나에게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시 되새김으로써 내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접근을 가져올 수 있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은 누가복음 1:26~38의 마리아를 통해, 말씀이 이뤄지길 바라는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전할 수 있다.

11월 30일: 대림절 1번째 주일

사64:1~9; 시80:1~7, 17~19; 고전1:3~9; 막13:24~37

바울의 사도성과 교회에 관한 정의로 자주 언급되는 구절(1,2절)을 피한 채 3절의 인사로부터 시작되는 본문을 대림절 첫 번째에 넣은 것은, 7절의 기다림, 8절의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강조의 의도를 담은 것으로 보여 진다.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서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적 이었는데, 아볼로와 같이 뛰어난 성서적 지식의 소유자와 같은 인물의 등장은 그의 사도성에 대한 재확인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다(1:13). 바울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로 초점을 맞추면서 문제해결의 시작을 이끌어내고(1:10, 24, 2:16), 리더들의 사역에 있어서 역할을 분담하여 이해함으로써 문제의 위기를 극복해나간다(3:4~9).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분열은 리더십 뿐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어떤 ‘영적인 지식(Gnosis)’을 소유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혹은 방언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유대인과 헬라인, 문벌 좋고 학식이 많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등. 이러한 분열은 고린도 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위기에 처하게 한다. 바울은 이러한 위기 앞에서 십자가의 신앙을 통해 서 즉, 우리의 자랑의 대상은 외형적 소유가 아니라 십자가임을 통해서 일치를 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소외된 자들에게 주님의 오심이 그들의 삶을 견고케 하셨고,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의미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상황설교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며…”

모든 사람은 안정적인 삶을 살기 원합니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우리가 가는 어느 곳에서든지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고,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칩니다. 돈이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면 돈을 찾고, 높은 위치가 위기를 극복하게 한다면 높은 위치를 구하며, 많은 지식이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말입니다. 어떤 문제와도,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평화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데, 그 이유는 어떤 이들이 풍족하게 그리고 부족함 없이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시만, 그들이 견고케 되었다는 것은 곧 이전의 부족한 어떤 상태를 암시해줍니다. 기다림,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평화로운 그 무엇을 얻게 된다면 그 시간을 우리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시간이 평화로운 때는 많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삶 속에서, 피곤하고 지친 우리에게 그 시간은 오히려 고통이요 괴로움의 시간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조급해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시간을 앞당기려 합니다. 그 시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갈증 나게 만듭니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디서든 긴 줄을 설 때마다 일렬로 서있는 줄의 중간에서 ‘언제 내 차례가 오나!’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삐쭉 내미는 사람이 바로 한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농담이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 민족의 ‘빨리빨리’라는 습성에 대해서 꼬집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오랜 기간 동안의 외침에 시달려 길고 긴 기다림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 한국전쟁을 치룬 후에도 우리는 빠르게 극복해내고 급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연약함을 극복해 내야 했던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급함이 만연해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의 폐단을 우리는 적지 않게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는 것은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우리 사회 깊이 뿌리내린 불신과 그로인해 나타나는 폐단들은 이런 조급함 때문에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급함은 파멸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제 기다림에 대해서 배울 때입니다.

본문은 연약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기다릴 수 있었는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5,6,7절은 어떤 연속적인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데 그 감사의 이유를 5,6,7절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왜 감사한지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구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잘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입술에서는 원망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끝없는 의심이 몰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러한 무지로부터 벗어나 ‘풍족한’ 앎의 경지에서 우리의 삶의 환경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이런저런 계략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증거를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점점 견고한 신앙의 집을 세워가게 됩니다. 7절은 Therefore(그렇기 때문에)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즉 주님의 은혜로 견고한 신앙을 가지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8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 큰 확신을 심어줍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는 흠이 없는 자로 서기 위해 주께서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날마다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 앞에서 무기력한 채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 주님이 임하시는 때에 흠 없는 자로, 완전한 모습으로 주님을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고 우리의 소망을 떨어뜨리지 맙시다. 마치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의 예언으로부터 시작된 400년의 침묵과 그들의 어두움이 가장 깊은 순간에 예수님이 오셨던 것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한숨과 고독 속으로 우리 주님은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분을 기다립시다. 주님의 신실함은 우리를 견고케 하시며, 주님과의 교제로 우리는 늘 소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12월 7일: 대림절 2번째 주일

사40:1~11; 시85:1~2, 8~13; 벧후3:8~15a; 막1:1~8

이사야서는 둘로 구분된다는 견해가 있다(혹은 셋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제1이사야서는 1∼39장이고 제2이사야서는 40∼66장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1부는 39장이고 2부는 27장으로 성경 전체의 구조와 유사하다. 구조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1부는 구약처럼 주로 심판에 관한 예언으로 돼 있고 2부는 신약처럼 주로 위로의 말씀으로 짜여있다. 대림절 첫 주일의 약자의 소망과 기다림에 이어서 생각해본다면, 제2 이사야서의 첫 번째 부분인 본문에 나오는 위로의 말씀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의 말씀으로 매우 적절한 배치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의 3절 말씀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 생애 바로 앞에 등장한 세례요한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다(마 3:1~3). 본문의 이사야서에서의 배치가 절망에서 희망이듯이, 세례요한 역시 어둠의 시간을 뚫고 빛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와 천국에 대한 선포는 어둠은 물러가고 새 날이 다가옴을 알린다. 또한 임박한 진노에 대한 강력한 경고는 그 날이 속히 오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소외되고 낮은 곳인 ‘광야’에서 임하는 메시지 앞에서, 높은 산처럼 부유하고 자랑할 것이 많은 자들은 낮아져야 한다. 반대로 골짜기처럼 낮아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되찾게 될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7절)”의 구절은 역시 강자와 약자의 구도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위에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름다운 소식이며 곧 그 소식을 믿는 자는 높은 산위에 오르게 된다는 희망을 주시는 것이다.

상황설교 “더 높은 산”

인도의 한 왕이 하루는 신하들에게 신하들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내었습니다. 종이 위에 짧은 선을 그리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이 종이에 손을 데지 말고 이 선을 더 짧게 만들어 보아라!’ 신하들이 아무리보고 또 보아도 지우개로 지우지 않고서 그 선을 더 짧게 만들 수 없기에 모두들 난감해 하고 있을 때, 한 신하가 용감히 나섭니다. 그리고는 다른 종이 한 장을 가져오더니 긴 선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종이를 가지고 왕이 들고 있는 종이 옆에 갖다 비교해 놓으니 왕이 들고 있는 종이의 선은 더욱 짧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왕은 이 신하의 지혜에 감탄하면서 큰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도전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 또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문제 자체만을 볼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보이지만, 그 문제를 능가하는 더 큰 능력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을 때에 그 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괴롭힐 만한 것이 되지 않는 다는 깨달음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서 중 제2의 이사야라고 불리는 두 번째 부분의 첫 말씀입니다. 39장까지는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심판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40장부터는 우리를 향한 용서의 의지를 보이시고 그 아들을 통해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새로운 세상을 펼쳐나가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여주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께서 오시는 그 길에는 어떠한 것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돈과 명예, 지식과 힘으로 가득 채운 높은 산도 그 길 앞에선 낮아져야 합니다. 반면 가난과 소외, 무지와 무기력함으로 낮아진 골짜기는 돋우어져야만 합니다.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아무리 많은 인생의 부끄러움이든지 자랑거리든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들풀과 같고 들풀의 꽃과 같습니다. 그것은 모두 마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구원하심을 사모해야합니다.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에 관한 선포는 화려한 궁전이나 강력한 군사와 더불어 오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외면당한 광야로부터, 외롭고 고독한 사막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 아름다운 소식은 높은 곳에서 외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다스리심 앞에서 교만한 자에게는 보응이 있으며, 겸손한 자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천하고 낮은 곳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서부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갑시다. 우리의 삶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더 큰 능력과 사랑과 은혜로 새로운 시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육체보다 더 높은 산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그분의 오실 길을 예비합시다.

12월 14일: 대림절 3번째 주일

사61:1~4,8~11; 시126편/눅1:47~55; 살전5:16~24; 요1:6~8, 19~28

제3이사야서라고 불리는 이사야서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안식일에 읽으신 내용이다(눅4:16~30). 예수그리스도의 첫 사역이 바로 이 본문의 선포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은 본문이 그리스도 사역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의 내용에서 조심스럽게 관찰할 수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일련의 범위가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 슬픈 자이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서 본문의 말씀을 읽으신 후에 엘리야 시대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은혜를 입은 자는 과부뿐이며, 엘리사 때에 수많은 문둥이 중 나아만 장군만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환영 받지 않을 때는 그 역사가 이뤄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외되고 약한 자를 향해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초점에 맞춘 B 해의 대림절의 맥락에서, 본문을 대림절 세 번째 주일 말씀으로 정하는 것이 통일성을 가져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대림절 3번째 주일은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세례요한을 기억하게 한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다루는 요한복음의 본문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의 모습을 다루며 우리가 하는 목회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주의 백성들을 위함임을 고백하게 한다.

상황설교 : “세례요한의 소리”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광야에서의 외침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한 세례요한의 거친 목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번의 소리는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다음 첫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읽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을 베풀지 않으실 것이란 암시를 주십니다. 그분은 당시에 이미 충분히 주목을 받고 있었고 곧 행하실 기적들로 순식간에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자리를 거부하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찾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마음이 상한자이며, 포로 되고 갇힌 자들, 슬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찾아가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나만의 문제에 얽매어서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의 신이 내게 임하신다는 말씀은, 나에게도 그러한 성령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그들을 찾아가야하는 사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들의 무너지고 황폐한 삶을 찾아가서 일으키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셔서 참된 기쁨과 만족, 행복과 평안을 누리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찾아가서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함께 나눠야 합니다.

주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2000년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의 삶에 다시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의 약속을 주시면서 구원의 백성으로 의의 자손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이러한 복음의 씨앗을 통해 온 땅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사명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세례요한의 소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길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설교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목회에 전념하다 보면 지금의 모습에 전전긍긍하며 내일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때에 한 해를 정리하며 다음 해를 바라보면서 내일의 일군들을 세우는 준비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1세대를 넘어서 다음 세대의 리더십을 준비함을 말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있으면 거두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겸손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들리는 세례요한의 소리입니다.

12월 21일: 대림절 4번째 주일

삼하7:1~11,16; 눅1:47~55/시89:1~4,19~26; 롬16:25~27; 눅1:26~38

대림절 네 번째 주일에서는 주어진 5개 중 3개의 본문에서 하나의 공통된 약속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으로, 사무엘하 7장 16절에서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는 말씀이, 시편 89편에서 반복되고, 다시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장 31~33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영원한 왕위 계승으로서의 위대한 언약이, ‘미천한 여종’ 마리아의 고백인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믿음의 응답을 통해 성취되는 것을 통해, 작고 천하지만 겸손한 자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대림절 네 번째의 주일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마리아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은 마리아의 겸손함과 순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시편을 대신하는 마리아의 찬가(눅1:47-55)는 대림절 4주 동안 매 주 봉독하거나 찬송하여도 좋은 말씀이다.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에게 오셔서 가장 큰 일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2008년 한 해의 어려움을 가장 어둡고 깊은 골짜기에서 헤매는 교우들에게 전하여주는 위대한 기쁨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

성탄절

성탄절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부활절에만 관심을 두었을 때 그 축제에 대해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복음 선교적 입장에서 이교도의 태양신 생일을 지킨 날을 주님의 탄생일로 정했다고 한다. 성탄일에 우리가 자주 혼동하는 것이 바로 성탄아침예배이다. 크리스마스의 전야 예배(혹은 행사)와 다음 주일 예배 사이에 끼어 어정쩡한 분위기가 되기 쉽다. 성탄에 관한 상징과 의식보다는 칸타타가 공연되는 음악회로 그치거나, 전날의 늦은 시간까지의 행사로 인해 정작 중요한 주님의 탄생 축하를 게을리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을 더 부각하기 위해서는 대림절로부터 이어지는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방법으로 대림절 첫 주부터 매주 점층적으로 초를 한 개씩 밝히는 방법이 있다. 또는 마리아찬가, 천사들의 노래, 동방박사의 노래, 목자들의 노래를 점차 배운 후 성탄 아침예배에서 합창 형식의 연출을 통해 예배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수 있다.

성탄 전야의 축제를 간소화 시키는 방향을 가지고, 성탄마지 새벽 촛불예배를 고안해 볼 수도 있다. 여러 색을 가지고 있는 촛불을 켜고 끄면서 성탄절에 있던 사건을 재현해 보는 것은 촛불 예배의 특징인 숙연함을 가져오면서 동시에 성탄일 아침의 예배에 대한 준비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칸타타에 집중되는 메시지를 분산시켜 성탄절을 더욱 풍성하게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2월 24일: 성탄 전야

사9:2~7; 시96:1~13; 딛2:11~14; 눅2:1~14

성탄전야의 여러 순서와 함께 짧고 간단명료한 메시지의 전달이 필요 되는 시간이다.

상황설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의 노래’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셔서 모든 억눌림과 멍에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어둠속에서 신음하며, 낮은 곳에서 고통스러워할 때에, 그분은 함께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에 못 이겨 하늘의 영화로운 영광을 뒤로하신 채 낮고 낮은 나의 삶 속으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 능력을 더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초대하시며 평화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우리에게 이뤄주셨습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 모두 2000년 전 목자에게 나타났던 천사가 되어봅시다. 천사들의 영광송을 힘차게 불러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하나님의 열정적이 사랑을 전달하는 천사가 되어, 이전에 우리와 같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웃들에게 찾아갑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복스러운 소망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약한 것으로부터 구속하시며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으니,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그분의 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다합시다.

12월 25일: 성탄일

사52:7-10; 시98; 히1:1-4(5-12); 요1:1-14

요한복음의 서문은 성육신 교리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게 된다. 말씀인 로고스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여 요한복음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한 복음서이다.

창조와 계시는 하나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창세기 1장1절을 상기시키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창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말씀은 새로운 창조의 모습임을 표현하고 만물이 그로인하여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은혜와 자연의 조화는 구원의 완성으로서 생명과 빛의 상징을 통하여 진행되며 이세상인 지구를 사랑하여 이 땅에 오신 참 빛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이 시작되는 창조 및 출애굽은 생명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고 생명신학의 초석을 놓는 사건이다.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시간이다. 특별히 이 날은 설교자의 말씀보다는 성가대의 찬양이 귀에 맴돌고 가슴에 여운을 남기며 남아있는 날이다. 그렇다고 결코 설교준비에 소홀히 하여 찬양대나 주일학교 발표에 만족하여야만 하는 예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더욱 설교말씀에 충실하여 본문과 씨름하며 예수님 탄생의 기적을 표현하여야겠다.

상황설교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화가가 추운겨울날의 모습을 그림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산천초목위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몇 채 있는 그런 쓸쓸한 모습이었는데 해가 이미 저문 모습으로 점점 바뀌어 갑니다. 그림이 어두워지더니 전체가 진한회색으로 변하며 침침하고 썰렁한 찬바람이 곧 불 것 같았습니다. 가운데 자리 잡은 초가집조차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화가는 노란색 물감을 찍어 몇 번 손을 움직이더니 초가집 창문에다가 작은 촛불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 노란 촛불의 빛이 하얀 눈 위에 비쳐지며 어둡기만 하던 그림은 밝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한 자루의 촛불은 어두침침한 한겨울밤의 모습에 밝은 희망과 내일의 새아침을 약속하듯 힘 있게 타들어 갑니다.

바로 이 그림에서 일어난 변화가 2000년 전 이 세상에 일어났습니다. 어둡기만 하고 찬바람만 일던 이 세상에 어린 아기가 태어나 그 빛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따뜻하고 밝은 빛으로 죄 많고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셨습니다. 그 어린 아기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 나셨습니다. 흔히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보는 잘생기고 토실토실하여 쿡 찌르면 방긋 웃을 것만 같은 귀여운 모습이 아닙니다. 핏덩어리 모습의 아기 그대로 이 세상에 오시었습니다. 아기를 배고 해산할 날을 기다리시던 분들은 아기가 태어나기를 위하여 기다림이 어떠신 줄 아실 겁니다. 그 기다림보다 더한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줄 압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아기예수에 대하여 힘 있는 성탄절 설교를 다음과 같이 한 바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주위에서 태어나는 어린생명들을 접함과 같이 구주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신성과 위엄성을 생각지 말고 그의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세요. 어린 아기예수를 바라보세요. 그의 신성은 우리가 감히 바라볼 수 가 없습니다. 그의 위대하심에 우리가 얼굴을 들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인간의 형태로서 이 땅에 오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를 위로하시며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볼 수 있는 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너무 빛이 세서 우리의 눈이 멀어 장님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악을 이기며 어두움을 물리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그 아기를 통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깨닫습니다. 그 아기의 작은 불빛이 그 주위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기예수는 어둡기만 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무도 마리아가 임신한 것에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기를 낳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는 이 조차 없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봅니다. 따뜻한 불도 물도 없이 깜깜한 오밤중에 산파조차 없이 마구간에서 혼자 아이를 낳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요셉과 마리아가 여행 중에 아이를 낳을 줄 조금이라도 예상하였더라면 나사렛에 그대로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상보다 일찍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옷으로 아기를 싸서 구유에 누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소나 말이 먹는 여물통입니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침대나, 의자, 이부자리, 아니면 땅바닥도 아닌 여물통일까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침대도 없고, 의자도 없고, 이부자리도 없습니다. 여물통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쓸쓸한 마구간에서 물도, 불도, 빛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하나님은 겸손히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어두움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밝게 빛나는 빛이십니다. 그 빛을 보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물질의 빛이 아니시고 우리 영혼의 빛이시라고 합니다. 이 빛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마치 태양빛 아래에 서있는 장님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 빛은 아무도 피할래야 피할 수 가 없이 온 세상에 두루 비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앞이 안 보이는 장님일지라도 그 영혼 속에 비치는 그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십니다. 많은 찬송가를 지은 훼니 크로스비(Fanny Crosby) 여사는 사고로 장님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되어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사는 늘 말하기를 사고로 실명한 눈을 다시 뜨게 되었을 때에 제일 처음 보고 싶은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라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얼굴 앞에서 웃으시며 계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한 감격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은혜로서 우리 모두에게 비추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의 뜻과 복음적 사명을 전하라 명하십니다. 빛은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빛은 더러운 것과 지저분한 것도 밝힙니다. 빛은 우리의 텅 빈 모습도 밝혀 줍니다. 빛은 우리의 꿈과 좌절까지도 확대하여 보여줍니다. 빛은 다시 말하여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밝히기 보담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 그대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힙니다. 어두움에 잠긴 밤의 시간이 제일 길다고 하는 동지를 전후하여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앞으로 조금씩 길어지는 태양의 시간을 누리시며 저와 여러분도 빛의 자녀로 살기를 다짐하여 봅니다.

12월 28일: 성탄절후 1번째 주일

사61:10-62:3; 시148; 갈4:4-7; 눅2:22-40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의 노래는 어린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맞이하며 부르는 노종의 찬송이다. 2장 29-32절을 보게 되면 그의 고백이 흘러나온다.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한 성령의 지시대로 의롭고 경건하게 평생을 성전에서 살다가 그의 마지막 고백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노래에는 대단한 만족감이 흐르고 있다. 2008년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며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맞이한 주님의 백성으로서 시므온과 같은 만족감을 누리고 있는가? 2000년 교회역사에서 이 찬송만큼 예배에서 많이 불리어진 것도 없을 것이다. 매일 저녁예배마다 촛불을 끄면서 드리는 마침찬송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마음에 모신 만족으로 잠자리를 준비하고 어둠을 맞이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장가로 불리어지기도 한 이 찬송은 한 해를 마치며 2009년 새 해의 신년예배를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찬송으로서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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