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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November 2008
KAM Newsletter 12호, 2008년 12월
November 30, 2008 by admin.


2008평신도 제직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 콜롬비아에서의 수업과 베다니교회 안수직분자들 축하연
11월3일 Harrington Center Auditorium
인사의 글
대림절의 인사를 드립니다.
2008년의 마지막 한 달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와 가정, 그리고 사역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연구소 모금운동을 시작한 이후 가장 먼저 뉴져지 연합장로교회(이종안목사)에서 $2,000 수표를 보내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전화 대화속에서 도와주시마고 쾌히 약속하여 주신 분들이 여러분 계십니다. 부디 년말결산이 확정되는대로 보내드린 봉투에 약정액수를 기입하여 우송하여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여러분들의 뜻이 담겨지고 모여진 정성이 함께할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실줄 믿습니다.
12월 6일 (토) 저녁 7시에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캠벨홀 예배실에서 그동안 10주동안 수업에 임하였던 평신도 제직 리더십 훈련 프로그램 제1기 졸업식이 거행될 예정입니다. 그동안 강사로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여러 목사님들과 교회제직들에게 감사드립니다. 4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이번 교육은 여러면에서 성공적이었으며 많은 분들이 다음학기에도 이어지는 계속교육을 원하고 있습니다. 애틀란타에서 거리가 있는 지역에는 프로그램을 압축하여 여러분의 교회로 가지고가는 맞춤형 주말 ‘장로교 제직교육’ 프로그램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12월 14일(주일) 오후 5시에는 알라바마주 버밍햄 장로교회에서 박관준목사의 사회와 손순목사의 이임사, 조연형목사의 취임사, 그리고 허정갑교수의 설교로 이취임 예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미 메일 받으신 바와 같이 2009년 3월 2-5일 KPC 목회자 평생교육이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학교의 정책상 2인1실 15개 숙박실이 현재 예약되어 있습니다. 그 이상은 안된다고 합니다. 타지역에서 오시는 분들은 필히 예약신청을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선착순으로 30명에게만 Harrington Center의 방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또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달력에 날자를 기입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모임이 시작되는 날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주간입니다.
기쁨과 평안이 충만하시길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드림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12월(B) 교회력에 따른 설교
기쁨의 노래
대림절(Advent)
(1) 대림절의 의미 - 대림절은 성탄절 이전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4주를 지칭하는 절기이다. 대림절을 뜻하는 영어 단어 advent는 라틴어의 두 단어 - ad와 venire로 이루어져 “다가옴”(coming)을 뜻한다. 대림절은 오래 전부터 대강절이라는 이름과 혼용되어 쓰이는데, ‘대’(待)는 ‘준비하고 기다리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강’(降)은 ‘내리다’, ‘림’(臨)은 ‘임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에 따른다면 ‘강’의 쓰임은 상징적, 시각적, 일시적 의미가 강하며, ‘림’은 실제적, 현실적, 과정적의미를 강조한다. 대림절은 오늘날의 축제와 같이 성탄절을 성원하기 위한 준비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대림절은 엄청난 긴장이 존재하는 절기이다. 2000년 전에 오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다시 오실 재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표현하는 절기인 것이다. 즉,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에 감사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에 대한 기대를 담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림절의 예배 준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의미뿐 아니라, 통치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표현하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림절의 전통적인 색깔은 근신과 절제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사용된다.
(2) Year B의 성서 정과와 대림절 설교 준비
그리스도께서 낮은 곳으로 임하셨다는 말씀은 삶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배에서 어떤 한 계층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면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계층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이러한 점을 모두 고려하여 모두에게 향하는 메시지를 전달해야한다. 대림절의 성서정과에서 이러한 신분의 높고 낮음으로 인한 삶의 차이 그리고 그리스도를 맞이한 자에 대해 초점을 맞춰보았다; 어떠한 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오심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우선 대림절 첫째 주에는 ‘경계’라는 주제 하에 고린도전서 1:3~9의 말씀을 통해서, 오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견고케 하실 것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면서 대림절을 열어간다. 두 번째 주에 선지자 이사야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에 관한 예언으로 대림절을 이어간다. 희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희망의 이사야로 불리는 40:1~11의 본문을 가지고 ‘산이 낮아지고 골짜기는 돋우어진다.’는 말씀을 우리의 높아져야할 부분과 낮아져야할 부분으로 나눠 주님의 오심을 준비시킨다. 세 번째 주에 이르러서는 다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이사야 61:1~4, 8~11) 나에게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사명을 다시 되새김으로써 내 삶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접근을 가져올 수 있다. 대림절 네 번째 주일은 누가복음 1:26~38의 마리아를 통해, 말씀이 이뤄지길 바라는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전할 수 있다.
11월 30일: 대림절 1번째 주일
사64:1~9; 시80:1~7, 17~19; 고전1:3~9; 막13:24~37
바울의 사도성과 교회에 관한 정의로 자주 언급되는 구절(1,2절)을 피한 채 3절의 인사로부터 시작되는 본문을 대림절 첫 번째에 넣은 것은, 7절의 기다림, 8절의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강조의 의도를 담은 것으로 보여 진다. 바울의 고린도 교회에서의 위치는 매우 불안정적 이었는데, 아볼로와 같이 뛰어난 성서적 지식의 소유자와 같은 인물의 등장은 그의 사도성에 대한 재확인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다(1:13). 바울은 이에 대해 그리스도께로 초점을 맞추면서 문제해결의 시작을 이끌어내고(1:10, 24, 2:16), 리더들의 사역에 있어서 역할을 분담하여 이해함으로써 문제의 위기를 극복해나간다(3:4~9).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분열은 리더십 뿐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어떤 ‘영적인 지식(Gnosis)’을 소유한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혹은 방언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유대인과 헬라인, 문벌 좋고 학식이 많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 등. 이러한 분열은 고린도 교회의 정체성을 흔드는 위기에 처하게 한다. 바울은 이러한 위기 앞에서 십자가의 신앙을 통해 서 즉, 우리의 자랑의 대상은 외형적 소유가 아니라 십자가임을 통해서 일치를 추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본문을 통해서, 오늘날 소외된 자들에게 주님의 오심이 그들의 삶을 견고케 하셨고,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의 의미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상황설교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리며…”
모든 사람은 안정적인 삶을 살기 원합니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우리가 가는 어느 곳에서든지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고,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칩니다. 돈이 위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면 돈을 찾고, 높은 위치가 위기를 극복하게 한다면 높은 위치를 구하며, 많은 지식이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많은 지식을 얻으려고 말입니다. 어떤 문제와도, 어느 누구와도 부딪히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오늘 그것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평화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데, 그 이유는 어떤 이들이 풍족하게 그리고 부족함 없이 기다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하시만, 그들이 견고케 되었다는 것은 곧 이전의 부족한 어떤 상태를 암시해줍니다. 기다림,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평화로운 그 무엇을 얻게 된다면 그 시간을 우리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시간이 평화로운 때는 많지 않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의 삶 속에서, 피곤하고 지친 우리에게 그 시간은 오히려 고통이요 괴로움의 시간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조급해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시간을 앞당기려 합니다. 그 시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갈증 나게 만듭니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디서든 긴 줄을 설 때마다 일렬로 서있는 줄의 중간에서 ‘언제 내 차례가 오나!’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삐쭉 내미는 사람이 바로 한국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과장된 농담이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 민족의 ‘빨리빨리’라는 습성에 대해서 꼬집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오랜 기간 동안의 외침에 시달려 길고 긴 기다림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고 한국전쟁을 치룬 후에도 우리는 빠르게 극복해내고 급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것은 연약함을 극복해 내야 했던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조급함이 만연해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의 폐단을 우리는 적지 않게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붕괴되는 것은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우리 사회 깊이 뿌리내린 불신과 그로인해 나타나는 폐단들은 이런 조급함 때문에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조급함은 파멸을 가져옵니다. 우리는 이제 기다림에 대해서 배울 때입니다.
본문은 연약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어떻게 기다릴 수 있었는가를 발견하게 합니다. 5,6,7절은 어떤 연속적인 과정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4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데 그 감사의 이유를 5,6,7절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왜 감사한지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구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잘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입술에서는 원망의 탄식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는 끝없는 의심이 몰려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이러한 무지로부터 벗어나 ‘풍족한’ 앎의 경지에서 우리의 삶의 환경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이런저런 계략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증거를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점점 견고한 신앙의 집을 세워가게 됩니다. 7절은 Therefore(그렇기 때문에)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즉 주님의 은혜로 견고한 신앙을 가지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8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더 큰 확신을 심어줍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우리는 흠이 없는 자로 서기 위해 주께서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날마다 새로운 어려움에 부딪히게 됩니다.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 앞에서 무기력한 채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날, 주님이 임하시는 때에 흠 없는 자로, 완전한 모습으로 주님을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어두워진다고 우리의 소망을 떨어뜨리지 맙시다. 마치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의 예언으로부터 시작된 400년의 침묵과 그들의 어두움이 가장 깊은 순간에 예수님이 오셨던 것처럼, 우리의 가장 깊은 한숨과 고독 속으로 우리 주님은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분을 기다립시다. 주님의 신실함은 우리를 견고케 하시며, 주님과의 교제로 우리는 늘 소망을 품게 될 것입니다.
12월 7일: 대림절 2번째 주일
사40:1~11; 시85:1~2, 8~13; 벧후3:8~15a; 막1:1~8
이사야서는 둘로 구분된다는 견해가 있다(혹은 셋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제1이사야서는 1∼39장이고 제2이사야서는 40∼66장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1부는 39장이고 2부는 27장으로 성경 전체의 구조와 유사하다. 구조뿐만 아니라 그 내용도 1부는 구약처럼 주로 심판에 관한 예언으로 돼 있고 2부는 신약처럼 주로 위로의 말씀으로 짜여있다. 대림절 첫 주일의 약자의 소망과 기다림에 이어서 생각해본다면, 제2 이사야서의 첫 번째 부분인 본문에 나오는 위로의 말씀은 대림절 두 번째 주일의 말씀으로 매우 적절한 배치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의 3절 말씀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 생애 바로 앞에 등장한 세례요한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다(마 3:1~3). 본문의 이사야서에서의 배치가 절망에서 희망이듯이, 세례요한 역시 어둠의 시간을 뚫고 빛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 세례요한의 회개의 세례와 천국에 대한 선포는 어둠은 물러가고 새 날이 다가옴을 알린다. 또한 임박한 진노에 대한 강력한 경고는 그 날이 속히 오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소외되고 낮은 곳인 ‘광야’에서 임하는 메시지 앞에서, 높은 산처럼 부유하고 자랑할 것이 많은 자들은 낮아져야 한다. 반대로 골짜기처럼 낮아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되찾게 될 것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7절)”의 구절은 역시 강자와 약자의 구도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위에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는 아름다운 소식이며 곧 그 소식을 믿는 자는 높은 산위에 오르게 된다는 희망을 주시는 것이다.
상황설교 “더 높은 산”
인도의 한 왕이 하루는 신하들에게 신하들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문제를 내었습니다. 종이 위에 짧은 선을 그리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이 종이에 손을 데지 말고 이 선을 더 짧게 만들어 보아라!’ 신하들이 아무리보고 또 보아도 지우개로 지우지 않고서 그 선을 더 짧게 만들 수 없기에 모두들 난감해 하고 있을 때, 한 신하가 용감히 나섭니다. 그리고는 다른 종이 한 장을 가져오더니 긴 선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종이를 가지고 왕이 들고 있는 종이 옆에 갖다 비교해 놓으니 왕이 들고 있는 종이의 선은 더욱 짧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왕은 이 신하의 지혜에 감탄하면서 큰 상을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의 삶에 도전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 또한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문제 자체만을 볼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보이지만, 그 문제를 능가하는 더 큰 능력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을 때에 그 문제는 더 이상 우리의 삶을 괴롭힐 만한 것이 되지 않는 다는 깨달음을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이사야서 중 제2의 이사야라고 불리는 두 번째 부분의 첫 말씀입니다. 39장까지는 인간의 죄로 인한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심판에 대해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40장부터는 우리를 향한 용서의 의지를 보이시고 그 아들을 통해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새로운 세상을 펼쳐나가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보여주십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께서 오시는 그 길에는 어떠한 것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돈과 명예, 지식과 힘으로 가득 채운 높은 산도 그 길 앞에선 낮아져야 합니다. 반면 가난과 소외, 무지와 무기력함으로 낮아진 골짜기는 돋우어져야만 합니다.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아무리 많은 인생의 부끄러움이든지 자랑거리든지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들풀과 같고 들풀의 꽃과 같습니다. 그것은 모두 마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구원하심을 사모해야합니다. 그 입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를 구원하실 메시야에 관한 선포는 화려한 궁전이나 강력한 군사와 더불어 오는 것이 아니라, 소외되고 외면당한 광야로부터, 외롭고 고독한 사막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 그 아름다운 소식은 높은 곳에서 외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분의 다스리심 앞에서 교만한 자에게는 보응이 있으며, 겸손한 자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천하고 낮은 곳에 있다 할지라도 그곳에서부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갑시다. 우리의 삶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더 큰 능력과 사랑과 은혜로 새로운 시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육체보다 더 높은 산에 오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함께 그분의 오실 길을 예비합시다.
12월 14일: 대림절 3번째 주일
사61:1~4,8~11; 시126편/눅1:47~55; 살전5:16~24; 요1:6~8, 19~28
제3이사야서라고 불리는 이사야서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안식일에 읽으신 내용이다(눅4:16~30). 예수그리스도의 첫 사역이 바로 이 본문의 선포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은 본문이 그리스도 사역의 목표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의 내용에서 조심스럽게 관찰할 수 있는 내용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일련의 범위가 지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 슬픈 자이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에서 본문의 말씀을 읽으신 후에 엘리야 시대에 흉년이 들었을 때 은혜를 입은 자는 과부뿐이며, 엘리사 때에 수많은 문둥이 중 나아만 장군만이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환영 받지 않을 때는 그 역사가 이뤄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외되고 약한 자를 향해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를 초점에 맞춘 B 해의 대림절의 맥락에서, 본문을 대림절 세 번째 주일 말씀으로 정하는 것이 통일성을 가져온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대림절 3번째 주일은 선지자 이사야와 함께 세례요한을 기억하게 한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다루는 요한복음의 본문은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의 모습을 다루며 우리가 하는 목회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함이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주의 백성들을 위함임을 고백하게 한다.
상황설교 : “세례요한의 소리”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광야에서의 외침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한 세례요한의 거친 목소리입니다.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번의 소리는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이기시고 다음 첫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읽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기적을 베풀지 않으실 것이란 암시를 주십니다. 그분은 당시에 이미 충분히 주목을 받고 있었고 곧 행하실 기적들로 순식간에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한 자리를 거부하시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찾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마음이 상한자이며, 포로 되고 갇힌 자들, 슬픈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향해 찾아가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 자신은 나만의 문제에 얽매어서 그들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의 신이 내게 임하신다는 말씀은, 나에게도 그러한 성령을 주셔서 나로 하여금 그들을 찾아가야하는 사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들의 무너지고 황폐한 삶을 찾아가서 일으키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다가오셔서 참된 기쁨과 만족, 행복과 평안을 누리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찾아가서 사랑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함께 나눠야 합니다.
주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2000년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우리의 삶에 다시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의 약속을 주시면서 구원의 백성으로 의의 자손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뿌려진 이러한 복음의 씨앗을 통해 온 땅이 그리스도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사명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광야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세례요한의 소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길을 준비하는 아름다운 설교자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목회에 전념하다 보면 지금의 모습에 전전긍긍하며 내일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그러한 때에 한 해를 정리하며 다음 해를 바라보면서 내일의 일군들을 세우는 준비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1세대를 넘어서 다음 세대의 리더십을 준비함을 말합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있으면 거두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자라고 겸손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들리는 세례요한의 소리입니다.
12월 21일: 대림절 4번째 주일
삼하7:1~11,16; 눅1:47~55/시89:1~4,19~26; 롬16:25~27; 눅1:26~38
대림절 네 번째 주일에서는 주어진 5개 중 3개의 본문에서 하나의 공통된 약속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말씀으로, 사무엘하 7장 16절에서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는 말씀이, 시편 89편에서 반복되고, 다시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1장 31~33절에서 다시 반복된다. 영원한 왕위 계승으로서의 위대한 언약이, ‘미천한 여종’ 마리아의 고백인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는 믿음의 응답을 통해 성취되는 것을 통해, 작고 천하지만 겸손한 자에게 위대한 일을 행하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대림절 네 번째의 주일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마리아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천사 가브리엘의 방문은 마리아의 겸손함과 순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시편을 대신하는 마리아의 찬가(눅1:47-55)는 대림절 4주 동안 매 주 봉독하거나 찬송하여도 좋은 말씀이다.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에게 오셔서 가장 큰 일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은 2008년 한 해의 어려움을 가장 어둡고 깊은 골짜기에서 헤매는 교우들에게 전하여주는 위대한 기쁨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지어다.
성탄절
성탄절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부활절에만 관심을 두었을 때 그 축제에 대해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복음 선교적 입장에서 이교도의 태양신 생일을 지킨 날을 주님의 탄생일로 정했다고 한다. 성탄일에 우리가 자주 혼동하는 것이 바로 성탄아침예배이다. 크리스마스의 전야 예배(혹은 행사)와 다음 주일 예배 사이에 끼어 어정쩡한 분위기가 되기 쉽다. 성탄에 관한 상징과 의식보다는 칸타타가 공연되는 음악회로 그치거나, 전날의 늦은 시간까지의 행사로 인해 정작 중요한 주님의 탄생 축하를 게을리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 중요성을 더 부각하기 위해서는 대림절로부터 이어지는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방법으로 대림절 첫 주부터 매주 점층적으로 초를 한 개씩 밝히는 방법이 있다. 또는 마리아찬가, 천사들의 노래, 동방박사의 노래, 목자들의 노래를 점차 배운 후 성탄 아침예배에서 합창 형식의 연출을 통해 예배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킬 수 있다.
성탄 전야의 축제를 간소화 시키는 방향을 가지고, 성탄마지 새벽 촛불예배를 고안해 볼 수도 있다. 여러 색을 가지고 있는 촛불을 켜고 끄면서 성탄절에 있던 사건을 재현해 보는 것은 촛불 예배의 특징인 숙연함을 가져오면서 동시에 성탄일 아침의 예배에 대한 준비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칸타타에 집중되는 메시지를 분산시켜 성탄절을 더욱 풍성하게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12월 24일: 성탄 전야
사9:2~7; 시96:1~13; 딛2:11~14; 눅2:1~14
성탄전야의 여러 순서와 함께 짧고 간단명료한 메시지의 전달이 필요 되는 시간이다.
상황설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천사들의 노래’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셔서 모든 억눌림과 멍에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어둠속에서 신음하며, 낮은 곳에서 고통스러워할 때에, 그분은 함께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에 못 이겨 하늘의 영화로운 영광을 뒤로하신 채 낮고 낮은 나의 삶 속으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를 통해서 우리의 삶에 능력을 더하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초대하시며 평화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이것을 우리에게 이뤄주셨습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 모두 2000년 전 목자에게 나타났던 천사가 되어봅시다. 천사들의 영광송을 힘차게 불러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2:14)
하나님의 열정적이 사랑을 전달하는 천사가 되어, 이전에 우리와 같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웃들에게 찾아갑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복스러운 소망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약한 것으로부터 구속하시며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으니, 선한 일에 열심을 다하는 그분의 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다합시다.
12월 25일: 성탄일
사52:7-10; 시98; 히1:1-4(5-12); 요1:1-14
요한복음의 서문은 성육신 교리의 기본이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접하게 된다. 말씀인 로고스는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여 요한복음은 유대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한 복음서이다.
창조와 계시는 하나임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창세기 1장1절을 상기시키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창조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말씀은 새로운 창조의 모습임을 표현하고 만물이 그로인하여 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은혜와 자연의 조화는 구원의 완성으로서 생명과 빛의 상징을 통하여 진행되며 이세상인 지구를 사랑하여 이 땅에 오신 참 빛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이 시작되는 창조 및 출애굽은 생명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고 생명신학의 초석을 놓는 사건이다.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예수를 기뻐하며 축하하는 시간이다. 특별히 이 날은 설교자의 말씀보다는 성가대의 찬양이 귀에 맴돌고 가슴에 여운을 남기며 남아있는 날이다. 그렇다고 결코 설교준비에 소홀히 하여 찬양대나 주일학교 발표에 만족하여야만 하는 예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더욱 설교말씀에 충실하여 본문과 씨름하며 예수님 탄생의 기적을 표현하여야겠다.
상황설교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십니다. 어느 날 화가가 추운겨울날의 모습을 그림에 옮기고 있었습니다. 눈 덮인 산천초목위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 몇 채 있는 그런 쓸쓸한 모습이었는데 해가 이미 저문 모습으로 점점 바뀌어 갑니다. 그림이 어두워지더니 전체가 진한회색으로 변하며 침침하고 썰렁한 찬바람이 곧 불 것 같았습니다. 가운데 자리 잡은 초가집조차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데 화가는 노란색 물감을 찍어 몇 번 손을 움직이더니 초가집 창문에다가 작은 촛불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 노란 촛불의 빛이 하얀 눈 위에 비쳐지며 어둡기만 하던 그림은 밝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한 자루의 촛불은 어두침침한 한겨울밤의 모습에 밝은 희망과 내일의 새아침을 약속하듯 힘 있게 타들어 갑니다.
바로 이 그림에서 일어난 변화가 2000년 전 이 세상에 일어났습니다. 어둡기만 하고 찬바람만 일던 이 세상에 어린 아기가 태어나 그 빛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따뜻하고 밝은 빛으로 죄 많고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셨습니다. 그 어린 아기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 나셨습니다. 흔히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보는 잘생기고 토실토실하여 쿡 찌르면 방긋 웃을 것만 같은 귀여운 모습이 아닙니다. 핏덩어리 모습의 아기 그대로 이 세상에 오시었습니다. 아기를 배고 해산할 날을 기다리시던 분들은 아기가 태어나기를 위하여 기다림이 어떠신 줄 아실 겁니다. 그 기다림보다 더한 기다림으로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할 줄 압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아기예수에 대하여 힘 있는 성탄절 설교를 다음과 같이 한 바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주위에서 태어나는 어린생명들을 접함과 같이 구주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신성과 위엄성을 생각지 말고 그의 인간의 모습을 바라보세요. 어린 아기예수를 바라보세요. 그의 신성은 우리가 감히 바라볼 수 가 없습니다. 그의 위대하심에 우리가 얼굴을 들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우리인간의 형태로서 이 땅에 오사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처를 위로하시며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볼 수 있는 참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너무 빛이 세서 우리의 눈이 멀어 장님이 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배하고 악을 이기며 어두움을 물리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탄생했습니다. 그 아기를 통한 전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깨닫습니다. 그 아기의 작은 불빛이 그 주위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는 것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아기예수는 어둡기만 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무도 마리아가 임신한 것에 신경을 쓰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아기를 낳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는 이 조차 없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봅니다. 따뜻한 불도 물도 없이 깜깜한 오밤중에 산파조차 없이 마구간에서 혼자 아이를 낳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 요셉과 마리아가 여행 중에 아이를 낳을 줄 조금이라도 예상하였더라면 나사렛에 그대로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상보다 일찍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이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옷으로 아기를 싸서 구유에 누이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소나 말이 먹는 여물통입니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침대나, 의자, 이부자리, 아니면 땅바닥도 아닌 여물통일까요? 왜냐하면 거기에는 침대도 없고, 의자도 없고, 이부자리도 없습니다. 여물통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쓸쓸한 마구간에서 물도, 불도, 빛도,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이 하나님은 겸손히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그러나 이세상의 어두움과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밝게 빛나는 빛이십니다. 그 빛을 보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물질의 빛이 아니시고 우리 영혼의 빛이시라고 합니다. 이 빛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마치 태양빛 아래에 서있는 장님과 같다고 표현합니다. 그 빛은 아무도 피할래야 피할 수 가 없이 온 세상에 두루 비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앞이 안 보이는 장님일지라도 그 영혼 속에 비치는 그 빛은 어두움을 물리치십니다. 많은 찬송가를 지은 훼니 크로스비(Fanny Crosby) 여사는 사고로 장님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빛으로 인도되어 신앙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사는 늘 말하기를 사고로 실명한 눈을 다시 뜨게 되었을 때에 제일 처음 보고 싶은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것이라고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녀의 얼굴 앞에서 웃으시며 계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 뭉클한 감격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빛은 은혜로서 우리 모두에게 비추십니다. 교회를 통하여 그의 뜻과 복음적 사명을 전하라 명하십니다. 빛은 모든 것을 밝혀줍니다. 빛은 더러운 것과 지저분한 것도 밝힙니다. 빛은 우리의 텅 빈 모습도 밝혀 줍니다. 빛은 우리의 꿈과 좌절까지도 확대하여 보여줍니다. 빛은 다시 말하여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밝히기 보담은 우리의 진정한 모습 그대로 우리가 누구인가를 밝힙니다. 어두움에 잠긴 밤의 시간이 제일 길다고 하는 동지를 전후하여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과 함께 앞으로 조금씩 길어지는 태양의 시간을 누리시며 저와 여러분도 빛의 자녀로 살기를 다짐하여 봅니다.
12월 28일: 성탄절후 1번째 주일
사61:10-62:3; 시148; 갈4:4-7; 눅2:22-40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의 노래는 어린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맞이하며 부르는 노종의 찬송이다. 2장 29-32절을 보게 되면 그의 고백이 흘러나온다.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한 성령의 지시대로 의롭고 경건하게 평생을 성전에서 살다가 그의 마지막 고백을 노래하고 있다.
그의 노래에는 대단한 만족감이 흐르고 있다. 2008년의 마지막 주일예배를 드리며 우리에게도 예수님을 맞이한 주님의 백성으로서 시므온과 같은 만족감을 누리고 있는가? 2000년 교회역사에서 이 찬송만큼 예배에서 많이 불리어진 것도 없을 것이다. 매일 저녁예배마다 촛불을 끄면서 드리는 마침찬송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마음에 모신 만족으로 잠자리를 준비하고 어둠을 맞이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장가로 불리어지기도 한 이 찬송은 한 해를 마치며 2009년 새 해의 신년예배를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지막 찬송으로서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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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갑의 예배탐방5]보스턴 Old South Church
November 24, 2008 by admin.
추수감사절 예배
미국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혹독한 한 해를 보내며 감사의 잔치를 벌인 역사적인 사건의 추수감사주일예배를 오늘은 17세기에 세운 보스턴 시내의 오래된 교회이자 보스턴 마라톤의 종점지역으로 알려진 Old South Christ Church (United Church of Christ) 회중들과 드렸다. 교회본당은 Copley Square에 위치하고 있으나 이번 주일은 감사절을 기념하여 이교회의 모체인 Old South Meeting House 에서 매사추세츠 주지사의 환영인사와 하버드 대학의 교목인 Peter Gomes목사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보스턴에 온 이유는 북미설교학회와 성서학회(SBL)가 이번 주말 보스턴 Convention Center에서 열리는지라 처음으로 참관하게 되었고 특별히 그랜트를 받게 된 Society of Art and Religion 회의에 참석차 오게 되었다. 금년부터 AAR학회가 SBL과 나뉘어져 모이기에 축소되어서 약 5,000여명이 모인다고 하지만 엄청난 숫자의 기독교 학자들과 관계자들이 북적되는 1년 중 최고의 학회 잔치이다. 프린스턴에서 M.Div.를 같이 공부한 친구들을 새롭게 만나고 보니 훌쩍 지나간 20년의 시간이 되돌려진다.
예배가 드려진 Meeting House는 초기 보스턴 정착인들이 세운 교회이자, 시민회관, 시청, 및 법정의 역할을 감당하는 다목적 기능의 장소이다. 영국으로부터 식민지 미국의 독립선언을 유발한 보스턴 Tea Party가 의논되고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서 미국 추수감사절이 시작된 보스턴의 정서를 배경으로 그 시대의 찬송을 부르며 성서학회에 참석한 여러 교단의 신학자들이 함께하는 특별한 예배가 준비되었다.
예배공간은 1729년도에 지어졌으며 1669년도에 Old South 교회 회중이 지은 목조 건물을 허물고 현재의 벽돌건물이 세워진 것이다. 독립이 되면서 미국의 가장 큰 모임장소로 사용되어지며 신앙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하는 중심적인 장소가 되었다.
영국교회의 압박을 거부하여 신대륙에 정착한 청교도의 후예들은 복잡한 성공회 예전을 거부하며 개인의 신앙과 하나님의 관계를 조명한 설교와 음악을 중심으로 한 기도, 성경, 그리고 악기를 사용하지 않고 회중이 시편찬송을 할 수 있는 아름답고 심플한 예배공간들을 창출하였다.
17세기와 18세기에 만들어진 찬송들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악보가 아닌 Shaped Note를 사용하여 노래하였는데 그 때 작곡된 노래들을 성가대가 예배 전에 노래하였고 청교도 신앙을 반영한 예배공간인지라 파이프 오르간이 없기에 브라스 5중주와 팀파니가 찬송반주를 맡고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시대의 찬양들을 회중이 부를 기회가 없었음이다. 약 8년 전 북미 찬송가 공회 모임으로 이 장소에서 오랜 역사적 노래들을 회중 속에서 부르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 때는 악기 반주도 없이 4부 화성으로 노래하며 시간의 초월성을 경험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약 500여명의 좌석에 가득 찬 직4각형의 예배실은 그 둘레를 사각형의 Cubical 들이 있다. 이곳에 5-8명의 가족이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노예제도가 있던 콜로니얼 시대에는 흑인 노예들이 발코니에 앉아 있다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30분 간격으로 각 가정이 가지고 온 화로의 석탄을 갈아 주었다고 한다. 가족은 1층 자리에 앉고 노예는 발코니 앉아 드리는 예배를 상상하여 보았고, 또한 수입하여 들여온 차에 부가된 엄청난 세금을 더 이상 낼 수 없음을 선언하기 위하여 모인 수많은 회중들의 상기된 얼굴들을 그려 보았다. 이 좁은 곳에 약 3,000에서 5,000여명이 모여서 독립운동의 연설을 들었다고 하니 그 당시 그 열기가 느껴지기도 하였다.
오늘은 감사절, 그 기원을 찾아 이곳에 예배하러 왔기에 이 역사 깊은 교회가 지키는 미국의 추수 감사절 예배와 그 배경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676년 6월 20일 매사추세츠 주 모임에서 새로운 땅의 안전한 정착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로 정하여 6월 29일 선포한 것이 그 유래의 가장 처음이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1777에서 1784년 사이에 새로이 조직된 의회를 통하여 감사절을 전국적으로 선포되었고 1789년 조오지 워싱톤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의 감사절 인사선포가 줄을 이었으며 그 중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감사절 선포가 그 대표적 연설이었다. 그의 영향력으로 1863년 감사절이 미국의 공식 공휴일로 채택된 것이다. 이 때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이 끝나고 그 후유증으로 나눠진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하며 서로 하나 될 것을 강조하는 감사의 메시지를 선포한다. 링컨은 미국 국민들이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서로 화해하여 떡을 떼고 나눌 것을 전쟁 후 상처와 아픔 속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호소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기억하는 감사 중에 가장 큰 대감사인 성만찬 신학으로 볼 때에 한 해를 돌아보며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누는 식탁의 교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케 하시는 시간인 것이다.
오늘 예배를 드린 유서 깊은 교회의 정치적 힘을 발휘하듯 매사추세츠 주지사(그의 딸이 이곳 교인이라고 한다.)의 감사절 선포식을 거행하며 시작된 예배는 어린이들을 위한 설교순서에서도 20살 미만의 자녀를 시작으로 40살 미만, 60살 미만, 100살 미만의 순서로 하나님 자녀들의 감사하는 고백의 선언을 선포하였다. 온 가족이 참석하여 감사절의 의미를 되풀이 하여 기억하는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오늘 예배드린 이 교회 멤버 중에는 1706년에 세례를 받은 Benjamin Franklin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인사들이 있다. 오늘 설교를 전한 Gomes 목사도 United Church of Christ 교단의 유명인사로서 현재 하버드 대학의 교목으로 제직하고 있다.
그는 하박국 3:17-19을 봉독하였다, “무화가 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는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함을 설교하며 어려운 이 시대에 감사하기를 기억하도록 그 특유의 억양과 문장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는 흑인으로서 이 지역 Plymouth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자란 보스턴 특유의 본토인임을 자랑하며 본인이 대학생이었을 때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리고 이교회가 본 교회에서 나뉘어져 분리되던 과정의 역사를 예로 들며 아무것도 없을 때에 어떻게 감사할 것인가를 설교하였다.
감사절은 분명 교회력은 아니다. 기독교 역사는 2000년이 넘지만 감사절은 이제 겨우 300년이 조금 넘는다. 그것도 미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된 해석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은 곳마다 11월 3째 주일을 감사절 예배로 드리는 그 모습은 받은 은혜를 감사함에서 우리는 조물주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오늘의 만족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보스턴을 2주 만에 다시 와서 학회에 참석한 옛 친구 동료들과 같이 예배드리고 하버드대학에 입학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시간과 여비가 허락지 않아 휴일에 집에 오지 못하는 아들을 위로할 수는 없었지만 함께 예배하며 한 공동체임을 확인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린다. 예배를 마치고 에모리대학의 은퇴교수 단 샐리어스와 함께 공항으로 향하였다. (허정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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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갑의 예배탐방4]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November 17, 2008 by admin.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정인수목사의 리더십으로 성장한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는 미국장로교의 가장 큰 한인교회에 속한다. 정 목사는 4년 전『교회를 혁신하는 목회 리더십』이라는 변화를 주저하는 기성교회에서의 목회경험을 담은 책을 냈다. 책을 낸 후 3배 이상의 교회 성장을 이루어 내 3천여 명이 출석하는 교회의 영적 성장이 됐다. 그리고 다시 2008년『영혼을 혁신하는 목회 리더십』이라는 제목의 책을 두란노에서 냈다.
정 목사는 “어떤 추상적인 목회이론을 도출한 것이 아니라 피와 눈물과 발로 쓴, 검증된 목회이야기”라고 책을 소개한다. 왜 성도들은 변하지 않을까? 왜 어려움에 처하면 목회자는 감정의 먹구름 속에서 십자가를 보지 못하곤 할까? 그것은 말만 변했지 영혼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혼의 혁신을 통해 진정한 교회혁신의 리더로 갈수 있다고 말하는 정 목사는 “영혼을 변화하지 않고는 결코 변화의 리더십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변화의 시대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교회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아틀란타 연합장로교회 예배현장을 찾아보았다. 연합교회 예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몇 차례 설교도 전한 바 있고 애틀랜타에 이주한 이후로 예배자로서 가족이 같이 등록하여 출석하는 모교회이다. 4번의 주일예배가 있는데 이 중 3부예배를 가게 되는 것은 아이들이 선택한 우리말 주일학교가 동시간에 제공되기 때문이다. 사실 전통적인 성가대가 있는 2부예배에 제일 많은 사람들이 출석하고 교회 지도자들과 어른들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와이프는 찬양팀이 이끄는 3부 예배를 지향하며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맞출 수 있음을 감사하고 있다.
목사로서 신학교교수의 직책은 주일예배 시에 여러 교회를 다닐 수 있게 하여 주지만 그 가족은 같이 할 수 없기에 한 가족의 신앙생활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하기에 비록 주일예배만 출석하지만 나의 가족이 교인으로 생각하는 연합교회를 향하여 오랜만에 온 가족이 자동차에 몸을 실고 40여분의 드라이브를 하였다.
오늘도 3부예배에 임하니 찬양팀의 인도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좋은 음향도구와 최고의 시설 및 연주자로 구성되어 역동성 있는 리더십으로 순식간에 회중을 사로잡고 주님의 존귀를 찬양하게 하는 팀이다. 가장 감사한 것은 가사의 글자만 스크린에 띄우지 않고 단선율 악보를 보여주고 있음이다. 이는 찬송의 4마디를 2줄에 나누어서 계속 악보를 바꾸어가며 보여주는데 음악을 읽는 사람들에겐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음이다. 특별히 새 찬송을 소개할 때 큰 도움이 된다.
귀한 사역을 감당하는 찬양팀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싶은 생각이다. 좋은 시스템을 사용하는 찬양팀의 가장 큰 취약점은 바로 회중의 소리가 들리지 않음에 있다. 성가대와 찬양팀의 사명은 무엇인가? 바로 회중의 찬양을 돕기 위한 것이다. 회중의 찬양을 대신 하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덮어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 점점 커지는 찬양팀의 소리에 옆 사람의 소리는 고사하고 내 목소리도 들리질 않으니 찬송이 주는 상징적 요소인 온 회중이 연합하여 한 목소리로 찬양함이 아닌 확성된 찬양팀의 소리에 이끌린 만들어진 소리에 따라가는 수동적 예배자가 됨을 경험한다.
그나마 잘 아는 찬송에는 힘이 실리지만 그렇지 않은 새로운 곡에는 따라가기를 아예 포기하고 가만히 듣기만 하는 여러 회중을 발견한다. 그러다 보니 인도자는 계속하여 요구의 강도를 더욱 높여간다. 두 손을 드세요… 영광의 박수를… 일어나서 찬양합시다… 사람들과 인사를 시키며 적어도 4사람과 하라는 등 주문이 끊이질 않는다. 과연 회중의 자율성을 위한 장기적인 준비와 교육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소리의 웅장함에 파묻혀 심취해 있는 사람들과 아예 목소리를 잃고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들의 엇갈린 박자와 얼굴에서 무엇인가 변화가 있어야만 모두 한 마음으로 찬양에 임할 수 있음을 감지한다. 사실 800석 본당 전체에 깔려있는 카펫이 치명적이긴 하다. 회중의 소리는 죽어있고 인도자의 소리만 확성된 공간의 구조가 예배의 구조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천장과 스며드는 자연채광의 12각으로 건축된 아름다운 성전의 자연스러운 음향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지 못함이 아쉽게만 느껴진다.
서울 명성교회와 온누리교회 모델의 중간모습을 띄고 있는 연합교회 예배는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는 분명한 듯 보이나 중간에 위치한 평신도 지도자들의 참여는 분명치 않음을 보게 된다. 찬양이 마지막 20분에 이르러서는 정 목사가 직접 단에 올라가 찬양인도자가 되어 찬양 사이사이에 멘트를 던지며 회중을 이끌어간다. 찬양팀에 대한 담임목사의 확고한 의지와 예배를 이끄는 담임목사의 카리스마가 확인되는 시간이다.
찬양이 끝남과 함께 대표기도자가 단 위에 올라서서 기도를 드린다. 감사의 기도를 시작으로, 경제의 어려움, 자녀들을 위하여, 질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의 회복, 연합교회와 교역자들을 위하여, 말씀을 위하여, 그리고 찬양을 위하여 기도를 마친 후에 정 목사의 환영의 인사 및 광고의 시간이 이어진다.
여기서도 사회자의 멘트에 따라하도록 하는 즉흥적인 요청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는 회중들로 하여금 어색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공동체의 역사적 인사가 아닌 한 개인의 주관적 요구가 나의 것으로 받아드려지기에는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되풀이되는 반복의 훈련이 요구되는데 매 주 바뀌는 멘트의 방법론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중요성이 약화됨을 본다. 그러나 다음 주 3,000명 전교인의 추수감사 식사준비를 위한 광고내용은 의미심장하게 들려온다.
모두 4번 같은 설교를 하는 오늘의 말씀은 아프리카 선교보고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못된 짓을 하던 강신무당에서 목회자로 변화한 어느 케냐인의 이야기, 그리고 끊임없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난 주 방문한 이디오피아 및 케냐선교지를 통하여 새로운 도전과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아픔만 보는 눈을 돌려 더 절실히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아프리카의 가난을 볼 수 있도록 설교자는 호소하고 있다.
설교를 비롯하여 예배시간 내내 그 자리에 앉아있거나 서 있을 수밖에 없는 회중의 모습에서 이들이 서로의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의 존재를 기뻐할 수 있는 참여의 방법들이 절심함을 깨닫는다. 대형 강의실(단지 학교와 달리 예배에서는 찬송과 헌금이 드려짐)과 같은 우리 예배실의 모습에서 오늘 설교의 주제인 피선교지인 아프리카 교회를 생각하여 보았다. 시설과 자료가 형편없이 부족하기만한 그곳에서의 예배는 온 회중이 몸으로 그리고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지 않는가? 그들의 열정이 우리가 더 배워야 할 참예배자의 절대적인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복음의 인생은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는 삶의 모습이라고 정 목사는 설교한다.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잊고 경제의 어려움속에 상대적인 빈곤감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설교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설교에서 서로 나누라는 하나님 말씀의 모습과 같이 예배의 모습도 서로 나눔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찬양 또한 연주자의 독무대가 아닌 회중과 함께하는 모습이 될 수는 없는가? 회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배려하고 격려하며 같이 만들어가는 모습은 무엇일까?
설교후 헌신과 결단의 기도로 초청하며 은혜의 찬송으로 이어지면서 예배가 끝나고 있다. 그러나 회중이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찬양이 없었음이 아쉽게 남아있다. 강한 리듬과 소리로 귀를 때리는 역동성은 있었지만 가슴을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찬양팀의 고백적인 모습이 아쉽다. 인도자들의 대화적인 리더십이 예배하는 모습을 통하여 반영되길 바랄 뿐이다.
전체적으로 선교의 비전을 세워주는 아름다운 예배의 모습이었다. 은혜가 넘치는 시간이었다. 아쉬운 것은 아프리카 선교지에 우리가 주는 것만 있지 않고 그들에게서 배워 온 그들의 찬양을 함께 불러보면서 하나 된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함께 하여봄이 어떠할까? 선교현장의 사진만이 아닌 그들의 찬양소리를 듣고 싶다.
연합교회에는 매 주 반복되는 찬송, 문구, 내용들이 있다. “주님 다시오실때까지” 마지막 찬송을 비롯한 예배인도자들이 예배 때마다 확인하고픈 연합교회만의 정서가 있을 것이다. 과연 회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그 초청에 적극적으로 응하고 있는지 여러 가지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론을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엔 2부예배 혹은 영어예배에 참석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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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갑의 예배탐방3]보스톤 코너스톤 영어회중
November 10, 2008 by admin.
Cornerstone: A Church in Boston
44 Linnaean St. Cambridge, MA
보스턴의 코너스톤 영어회중을 찾았다. 아들 단(Daniel Huh)이 입학한 하버드대학에서 주최하는 신입생 학부모 초청 주말프로그램에 참석하여 주일을 케임브리지에서 보내었기에 동행한 가족과 함께 주일예배 장소를 찾아보았다. 코너스톤은 하버드 스퀘어에서 가장 가까운 한인교회로서 기숙사에서 걸어 15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교회의 모체는 연합감리교회로서 인근에 위치한 고르든 콘웰 신학교의 영향력으로 독립하여 성장한 영어회중 교회라고 한다.
교단은 복음교회 Evangelical Covenant Church www.covchurch.org에 속하여 있으며 보스턴 Back Bay지역에서 4년 전에 시작한 한인2세 및 다민종 교회로서 현재 두 곳에서 주일예배를 안내하고 있다. 보스턴 예배장소는 오후 2시에 모이는데 80%가 대학생들이고 약 200-250명이 출석한다고 한다. 오전 10시 30분에 모이는 케임브리지 장소는 반대로 80%가 대학원생 및 직장인들이 모이고 결혼한 가정들이 어린이들과 함께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하버드가 위치한 케임브리지 예배는 초등학교를 빌려서 시작한지 약 2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벌써 100여명이 5인조 밴드의 인도로 30분간의 찬양에 이어서 광고, 인사, 그리고 설교의 순서로 진행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출석인원 거의 모두가 30세 미만으로 한인 2세들이 주를 이룬지라 어느 EM에서나 볼 수 있듯이 예전이 없는 편안한 차림의 모습, 강의식 설교, 그리고 찬양 팀의 악기 세팅이 주를 이루고 있다. 더군다나 초등학교를 빌려서 예배장소로 사용하기에 강당의 장식이 학교 장식 그대로이고 예배실의 모습에서 종교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적인 상황이고 또한 특징이기도 하다.
담임목사의 출타로 대신 설교한 어느 부교역자의 설교모습은 소매를 걷어붙인 흰 셔츠에 찬양 팀의 보면대를 강대상으로, 일회용 컵에 담은 음료수를 마셔가며 약 40분간을 설교하였다. 또한 눈을 뜨고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기도하는 모습 특이하였다. 어디서나 느끼는 침체된 경제를 주제로 눅6:20-21, 마6:19-21, 24; 레25:8-13을 스크린에 투영하여 본문으로 읽어가며 전달한 강해설교는 전체회중이 함께 읽는 공동성경봉독은 없었고 강단 오른쪽에 위치한 스크린을 통하여 가난한자와 함께하는 동영상을 사용한 메시지를 전하였다. 이는 동영상을 적절히 활용한 설교로서 복음의 내용과 열정에 호소하며 전체적으로 보이는 것보다 들을 수 있는 소리에 신경을 쓴 예배였다고 평가하여 본다.
그러나 강단의 산만함을 커튼으로 가리고 소리에 더 집중하도록 도와주지 못하고 있음이 아쉽다. 파워 포인트가 투영된 스크린 외에는 보이는 것에 별로 신경 쓰지 못하는 예배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예배의 핵심은 설교자의 말씀 전달로서 그 방법론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보제공으로 부자나라 미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한 강력한 호소로 진행하였다. 그러기에 회중에게 죄책감을 유발하는 메시지였지만 곧 그 안에서 나도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살 길임을 고백하게 하는 복음신학이 드러난 설교이다.
그렇다면 45분의 설교 외에 어떤 시간들이 회중의 참여를 꾀한다고 할 수 있을까? 절대적인 집중을 요하는 설교시간이 끝나며 설교자의 마침 기도가 진행 될 때에 다음순서를 위하여 기도 중에 찬양 팀이 움직이며 Set Up하는 부산한 소리를 들으면서 어찌 하나님은 기도 중에 우리를 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를 묻게 되었다. 예배 인도자들 자신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결핍되어 있는 모습이다.
회중의 응답과 참여가 제한된 설교와 찬양을 듣기만 하다가 90분이 지난 이 예배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인 교회라고 하기에 인색한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제는 아이들의 부모로 장성한 청장년의 한인 2세들이지만 왠지 주일학교, 아니 중고등부가 모인 Youth그룹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음을 보면서 이들만의 장점을 찾기에 노력하여 보았다.
교회장소가 하버드의 전신인 Radcliff 여자대학의 Quad에서 모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버드 학생들이 별로 없음을 발견함은 또 하나의 아쉬움 이었다. 코너스톤은 인근지역의 5개 캠퍼스 그룹과 8개의 공동체로 조직되어 있으며 매우 활발한 성공적인 교회로 입소문이 난 교회이다. 그러나 부모의 심정으로 아들이 이 회중과 친구 될 수 있는가를 물어본다. 주일 아침 늦잠자다가 기숙사 방에서 일어나 쉽게 갈 수 있는 대학교회, 그리고 www.memorialchurch.harvard.edu의 유명한 설교자요 교목인 Peter Gomes목사가 아들에게는 편한 선택이겠지만 그 곳에는 신앙공동체가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는가? 과연 어느 공동체에 속하여 개인의 영성과 공동체의 정체성이 같이 성장함을 꾀하는가를 아들과 함께 고민하며 찾아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부모의 심정이다.
그러나 나의 아들딸과 같은 한인2세들이 모여 자립하여 시작한 오늘 예배를 통하여 이 모임이 교회라고 부르기에 인색함은 무슨 이유인가? 사실 어제저녁 하버드 학생합창단의 연주가 기독교 예배는 아니었어도 더 종교적이었음을 기억한다. 모든 합창의 가사로 성경말씀이 더 많이 인용되었으며 경건성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오늘 예배보다 더욱 뛰어난 예술성과 아름다운 감동으로 전달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회중의 참여 또한 적극적이었고 학부모와 친구들로서 자녀들과 학우들이 열심히 연습하여 준비한 합창소리에 뜨거운 박수로서 환호의 갈채를 보내지 않았는가? 그 자리에는 많은 동양권의 학생들과 부모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하나님의 임재를 찾는 교회에서는 그러한 감동과 준비성은 찾아볼 수도 없으려니와 오히려 학교에서의 학문적 탐구는 신앙생활에 거추장스러운 옷으로 여겨지며 홀가분하게 벗어 던지고 오히려 가벼운 옷차림인 캐주얼적인 사고방식과 신앙의 모습을 추구하고 있지 않는가?
과연 이민교회 차세대의 영성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캐주얼의 옷차림과 오장육부를 뒤흔들며 진동하는 드럼세트와 스피커의 소리가 우리의 무엇을 만족시키고 채워주고 있는가? 더 이상 사람의 목소리로 가슴과 가슴을 진동하여 전달되며 정을 나누는 (정보, Communication)사회가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부풀려진 Amplified된 소리의 홍수에서 시끄럽기만 한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한인2세들의 EM(누구는 EM은 Easy Ministry이고 KM은 Killing Ministry라고 함)은 요사이 언급되는 이머징신학과 변화하는 다민종 예배의 모습을 얼마나 고민하며 받아드리고 있는가 묻고 싶다. 소리의 파워와 볼륨을 키우기보다는 그 내실적인 면인 블랜딩과 조화, 그리고 색깔의 독특성을 찾아보고자 함에 굶주려 있음을 말한다.
이 모든 이슈들이 비단 코너스톤 교회에 대한 비평이 아님을 밝히고 싶다. 이것은 내가 속하여 있는 미주 한인교회의 전체가 직면한 문제이다. 그러기에 어느 EM예배를 참석하여도 동질성의 편안함을 느끼지만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야만 하는 모순의 발견이기 때문이다. 가장 가깝기에 가장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여기서 오늘 나의 의견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그저 침묵을 지키며 첫 예배에 출석한 아들의 반응만 유심히 살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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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갑의 예배탐방2]성빌립 AME교회
November 3, 2008 by admin.
Saint Philip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1607 Richard Allen Dr. Decatur, GA 30032
오바마가 미국대통령 후보로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조오지아주 지역에 살고 있기에 흑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매일 느끼고 있는 바이다. 디케이터에 온지 1년이 채 못되었지만 애틀랜타 흑인들의 정치력은 그 역사와 함께 교회에서 부터 흘러나옴을 체험한다.
그러하기에 오늘은 133년 역사를 갖고있는 흑인교회인 성빌립 AME교회를 방문하여 교회탐방을 기록하였다. 성빌립교회가 속한 아프리카 감독교회는 그 체제가 감리교회와 거의 비슷하게 감독제도로 구성되어 있으나 철저한 흑인교단으로서 그 역사가 흑인교회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오늘이 벌써 이교회 3번째 예배참관이다.
가장 먼저 다가오는 느낌은 평균 5번 이상 등장하는 성가대의 뜨거운 찬양으로서 전자 오르간과 드럼세트 반주로 독창자와 성가대 그리고 회중이 참여하는 정열적인 에너지의 Call and Response 메기고 받는 예전이 풍부하게 진행됨이다. 구제와 교회선교로 나뉘어진 2번 헌금을 포함하여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이 순서순서 마다 있다.
성가대는 흑인작곡자인 Andre Crouch의 My Tribute/To God be the Glory를 포함하여 여러 형태의 흑인영가를 부르는데 회중의 참여를 위하여 반복하거나 추가곡을 되풀이 한다. 회중은 기립박수하여 응답하고 박수가 끝나도 또 반복찬양하며 회중을 흥분시키는 그 열정과 에너지는 예배를 감동케한다. 회중에서 방문자 한 사람이 자원해서 마이크를 잡고 짧은 인사와 감사를 전하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이 여러 목소리로 인도하는 적극적인 참여의 예배가 진지하게 진행된다.
인도자들은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인도하며 대표기도 또한 회개에서부터 예수를 영접하는 결단의 기도까지 아우르는 절실한 기도를 즉흥적으로 인도한다. 기도 후의 성가대 찬양인도 또한 간단한 송영이 아니라 찬송가 메들리로 예배자의 자발적인 박수가 나오기까지, 아니 박수가 나온 후에도 할렐루야 응답을 비롯한 여러 가지 예배언어로 전체회중의 참여를 이끌고 있다.
방문하는 찬양인도자가그 자리에서 작곡한 세줄 찬양곡을 Call and Response로 메기고 받으며, 새로운 인도자의 요청에 흥분하며 반응하는 회중, 이것은 찬양이 아니라 음악으로 하는 설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의 치유를 선포한것이다. 또한 세계 경제의 어려움이 이곳에서도 느껴지며 메시지에 자주 언급됨을 확인한다.
예배 정시에는 500명 미만인 회중이 오늘 섬머타임이 해제되면서 2시간 예배에서 1시간이 넘어가자 1500명석이 점차적으로 가득차짐을 보았다. 이교회는 오순절 교회가 아니다. 음악과 흑인문화의 열적으로 뭉쳐진 민족교회임을 확인한다. 오늘 예배에서 오바마의 이름은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마틴루터 목사의 활동지역인 조오지아를 상기 시키면서 미국역사에 흑인대통령 후보자가 처음있는 일이 아니었음을 이들은 자랑스럽게 고백하고 있다.
설교는 예배 시작한지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비로서 시작되었다. 창세기 21장을 봉독하며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에게만 있는것이 아니라 하갈에게도 있었음을 주장하며 미국은 하갈의 자녀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역설하였다. 노예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며 하나님 구원을 고백하고 물 한모금을 마시고 다시 시작된 하갈과 이스마엘의 여정을 이야기하며 다시 힘을 얻고 일어나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믿음의 길을 안내하는 설교이었다.
지난 번 출석에는 담임목사가 설교하였는데 점점 흥분이고조되며 나중에는 노래로 설교가 이어지고 회중이 사이사이에 응답하는 창으로하는 경축을 향한 설교였다. 여러사람이 예배에 입체적으로 참여하고 인도하고 있는데 믿음의 결단 초청을 비브라토가 심한 Tremolo의 전자알렌 오르간 소리를 배경으로 진행하였다. 교회 헌금시간에는 헌금봉투를 높이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사실 한 달에 한 번씩 갖는 성만찬 때문에 오늘 이 교회를 찾게된 것이 그 이유이다. 하얀색 양복, 그리고 흰색 가운을 걸친 인도자들은 8방으로 펼쳐진 본당 중심에 위치한 약 120여명이 동시에 무릎 꿇을 수 있는 레일로 회중을 안내한다. 레일위의 뚜껑을 열면 성만찬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도 120명이 동시에 그리고 팀으로 나누어서 전체 회중이 모두 참여한다.
이곳은 매우 예전적인 교회이며 성만찬 기도문이주보에 모두 인쇄되어있다. 이 시간은 가장 엄숙하고 조용히 치루어진다. 사도신경으로 시작하여 주기도문으로 끝나는 긴 장문의 기도문을 여러사람들이 여러목소리로 차분히 읽어내려간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 레일에 무릎꿇고 앉아서 먹고 마신후 교회전체를 한 바퀴돌며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성찬후 기도로 마무리한다. 걷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안내자들이 직접 가서 나누어준다.
한 달에 한 번 성만찬이 있는 예배는 축도가 없이 끝나는데 이는 다락방에서의 마지막 만찬 후 찬송하며 기도처로 가신 예수님과 제자들을 기억함이라 한다. 내가 지금까지 다녀본 어느 흑인교회보다 가장 잘 발달되어있고 살아있는 이교회, 그런데 다른 인종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다른 아프리카 혹인들의 문화도 찾아볼 수 없다. 더 더욱 100% 흑인만 있는예배를 경험하면서 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백인교회 방문 때 보다 더 심각히 느끼게 됨은 무슨 일일까? 수 많은 회중 가운데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빌립 교회 방문은 꼭 추천하고 싶다. 그것도 성만찬이 있는 매달 첫주를 기억하기 바란다. 2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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