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ogroll (10)
- Newsletter (13)
- Uncategorized (44)
- Website (1)
- 교회탐방기 (23)
- January 17, 2012: CTS에서 지역한인 바이올린 연주회 “대 성황”
- January 9, 2012: 장영일 장신대 총장, CTS 방문
- December 31, 2011: 양신 목사, 목회학 박사 논문 초고 발표
- December 12, 2011: CTS 역사 최초로 한인 바이올리니스트 초청 연주회,
- December 12, 2011: “목회의 길은 ‘소명’에 올인하는 삶”
- November 7, 2011: CTS, PAACCE회의 주최
- November 7, 2011: 희귀본 영문 성경 콜렉션 전시
- October 31, 2011: “실천 목회 교육 강화 해달라”
- October 6, 2011: 콜럼비아 신학대학원 ‘비전2020’ 구체화박차
- September 26, 2011: 한인 학생 CTS 역대 최다 11명 입학,
KAM Newsletter 5호, 2008년 3월

2월 20일 장로교신학대학원 중창단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방문
인사의 글
부활의 기쁨을 전합니다.
이번 5호서부터 애틀랜타 지역목회자들의 범위를 넘어서 South Atlantic 대회에 속한 KPC 한인교회 그리고 미자립교회(Fellowship) 전체에 뉴스레터를 프린트하여 우편물로 발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재 학생으로서 M.Div. 졸업예정인 김재홍 전도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됨입니다. 김전도사님(위사진 왼쪽끝)은 한국 이랜드에서 직장을 다닌 사회경험이 있는지라 한미목회실을 시작함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심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혹시 지난 호를 받고 싶으시면 저나 김전도사께 (jaehong.kim@students.ctsnet.edu) 연락주시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한미목회실에서는 콜롬비아 평생교육원의 평신도 교육 프로그램(Lay Leader Training Program)의 한국어 트랙으로 제직훈련을 진행하고자 설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KPC 산하 여러교회가 공동으로 제직교육을 제공하고자 애틀랜타 목회자들과 KPC임원들을 중심으로 의논중입니다. 여러분들의 고견과 제안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일이 진행됨과 함께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계속교육을 또한 구상중에 있으며 학교의 자원들을 익히느라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4월 18일에는 총회의 김선배목사, 정인수목사, KPC 임원대표로 이원걸목사, 최병호목사님들을 모시고 학교관계자들과 함께 한미목회실의 큰 그림을 그리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을 바랍니다.
저는 3월9일 주일에 조지아 장로교회(김삼영목사)에서 설교를 하였고 4월1일 콜롬비아 이사회를 여는 아침경건회에, 그리고 4월 6일 연합교회(정인수목사)에서 말씀을 전하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를 찾아뵙고 인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또한 바랍니다.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새 기숙사 기공식
4월 1일 화요일 오후 5시에 새기숙사 기공예배를 드립니다. 이날 로라 멘델홀 총장의 사회로 진행되는 예배는 한국전통 사물놀이의 상고춤을 선보이며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신학원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귀중한 시간에 한인교회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새 기숙사는 Florida Hall 건너편 운동장 코너에 자리잡게 되는데 장기적으로 Simons-Law 현재 기숙사를 교실 및 오피스 공간으로 개조하기위한 첫번째 플랜입니다. 학교를 확장하고 새롭게 만들고자 기획중에 있습니다.
성서정과 4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 을 참고하세요.
‘환대’
4월 6일: 부활절 3번째 주일
행2:14a, 36-41; 시116:1-4, 12-19; 벧전1:17-23; 눅24:13-35
본문은 바쁜 삶의 연속에서 ‘빨리빨리’가 아닌 좀 천천히 가며 환대를 베푸는 부활의 삶을 전하고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활절 당일 날의 이야기로 전하여진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가게 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당사자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을 물으시며 대화하시고, 함께 걸으시며, 동행하신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걷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주님은 같이 동행하심을 보이시며 부활을 몸소 증거하신다.
그렇다고 본문이 어느 특별한 날의 특별한 사건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되고 전하여진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엠마오의 이야기는 부활에 대한 증인과 그들의 고백에 의존하는 한정된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되어야 하고 체험하여야 하는 실천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의 진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헌으로 정리된 모습만은 아닌 것이다. 빈 무덤과 그리스도의 죽은 몸이 변화됨을 기록한 역사적 사건에만 집중함으론 부활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간단히 설명하여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전이나 지금이나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함을 경험함에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이러한 경험은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만남에 있었다. 바울과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직접 경험하였고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며 역사적 사실만이 아닌 현재진행중인 은혜의 체험을 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이곳에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함께 하신다.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언제나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부활이후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경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독교 역사의 흐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형의 형식을 통하여 그 경험이 전하여지고 있다. 신비의 경험과 특별한 비전들이 기도와 예배, 성만찬을 비롯한 성례전,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드라마, 미술, 음악 및 문학작품을 비롯한 예술을 통하여 전하여진다. 부활의 진리는 약200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여 경험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사건 자체에 흥분되어 목표만 의식하여 너무 빨리 걷느라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부활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겠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부활의 경험을 기대하여 본다.
상황설교
주객이 바뀌면 안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주객이 바뀌어야 교회가 삽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손님과 주인의 위치가 바뀐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손님으로 초대받은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 집에서 유대교 주인이 하는 식탁의 기도를 드리면서 제자들의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환대”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한 단어가 매우 깊은 진리의 뜻을 통합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랍어로서 ‘지노’(xenos)라는 말입니다. 이 뜻은 ‘낯선 자’라는 희랍어로서 ‘손님’의 뜻도 되고 ‘주인’의 뜻도 됩니다. 이 단어는 “환대”가 내포하는 기본적인 뜻인 상호관계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심적인 표현으로서 ‘낯선 자’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룩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손님과 주인의 의식차이는 어떻게 서로를 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관계를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영어단어가 있는데 지노포비아 (xenophobia)입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낯선 자들에 대한 공포심으로서 지극히 극단적인 민족주의 아니면 “나의 조직이 너희 조직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를 약간 변형하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환대”-필로지니아(philoxenia)가 됩니다. 이 단어는 손님 혹은 낯선 자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로지니아’는 아울러 환대의 주위상황, 즉 손님과 주인의 모든 활동상황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랑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필로지니아의 상호관계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다른 이들과 식사를 할 때에 되풀이하여 일어난 사건들이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결혼식 잔치에 참여하십니다. 그러나 술이 떨어졌을 때에 그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며 주인의 모습이 됩니다(요한복음 2:1-11). 마르다가 예수님을 그녀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한 후 대접에 지친 모습이 되자 예수는 오히려 그 날 만큼은 그녀에게 앉아서 대접을 받는 것이 대접하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치십니다(누가복음 10:38-42).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로마서 12:13)고 합니다. 이러한 원형의 상호관계적 ‘환대’는 그곳에 들어오는 자를 포용하고 변화시키게 합니다. 가정집에서 모이던 초대교회는 계속 성장하면서 주인 된 자들을 손님으로 그리고 손님된 자들을 주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가정교회 목회사역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여행 중 전도하던 사도 바울은 각 처소에서 그가 받을 사랑의 환대를 기대하며 나아갔고 또한 그를 기다리던 교회들도 그가 가져올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 또한 비슷한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손님들이 결국은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며 꼭 필요한 선물을 주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집 없는 노숙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은 거의 대부분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두 겉치레의 외면상인 주인들은 그들이 나눈 것 이상으로 가난한 손님들인 노숙자들을 통하여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받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국제화가 급속도로 전개되면서 외국인노동자에게 우리가 환대를 베풀어야함이 강조됨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한 개념, 즉 낯선 자로서의 손님이 의외의 선물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은 “환대”의 성경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손님이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은 전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세 명의 손님사이의 일은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 손님들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늙은 부인 사라가 곧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실로 엄청난 소식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항으로 그 낯선 나그네의 얼굴이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이란 것이 마태복음에 밝혀져 있습니다(25:38). “환대”가 제대로 행하여진다면 그 일은 단순히 낯선 자를 환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성을 경험하는 것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들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고 그들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환대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자신이 없습니다. 환대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위험한 상황, 아직 준비되지 않은 미숙한 공동체와 불투명한 약속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환대를 베푸는 장소에서 모든 손님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선물들을 꺼내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재능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손님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성숙도에 달려있기도 합니다.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쉼터(shelter)와 보호(care)의 필요성과 한편으로는 낯선 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하는 이 시대에 환대를 실천하는 노력과 함께 서로를 도와주며 성장하는 우리 사회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오늘,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의 사회들은 이처럼 현실적인 요구에서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86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중미 사람들의 연합회 성격인 카레센(CARECEN Central American Resource Center)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새 이민법에 의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중미 사람들의 법률 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입니다. 주로 자원 봉사자들로 이루어진 카레센은 다양한 성격의 봉사를 대행하는데 특별히 기본적인 아니면 전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라틴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히스패닉 문화와 정서에서의 건강과 치료방법을 추구하며 라틴계 사람들을 환영하였습니다. 많은 경우에 직원들과 자원봉사자 자신들이 카레센을 통하여 도움을 받았기에 상담을 원하는 이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곤란함을 잘 알고 있으며 이제는 주는 자의 입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손님으로 온 이들이 이제는 특권을 가진 자리의 주인의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낯선 자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은 무언가 새롭고 생소한 미지의 세계로 우리자신을 초청하는 일입니다. 낯선 자들은 우리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우리의 편협한 시각을 고쳐 줄 것이고 우리 상상력에 자극을 더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세상을 신비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초대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과 탈북자들을 비롯하여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더 이상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식탁으로 초대하여야 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주객의 관계가 바뀌며 진정한 ‘환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이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바쁜 삶의 모습에서 비록 낯선 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실지라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환대를 베푸는 우리의 여유 있는 삶이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4월 13일: 부활절 4번째 주일
행2:42-47; 시23; 벧전2:19-25; 요10:1-10
부활절 4번째 주일은 선한목자 주일이다. 주일예배는 구경꾼이 존재하는 운동경기가 아니다. 참여하지 않고 무슨 재미로 예배를 드리는가? 초대교회에서의 참여는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가져온 음식과 예물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예배가 마친 후에는 남은 음식들을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병든 자와 갇힌 자, 그리고 낯선 자와 나그네에게 나누어 주었다. 초대교회는 ‘환대’를 실천하며 선한목자의 삶을 산 것이다.
예물을 봉헌하기 위하여 송영과 함께 안내위원들이 앞으로 나아올 때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연계하여 일상생활의 모습을 하나님께 그대로 드리는 거룩한 시간인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영적’ 가치론에 가려져서 평범한 사물이 거룩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몸’이 다시 사신 부활의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먼 관계가 될 것이다.
기독교는 성육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몸의 신학’을 중요시 한다. 공동체를 통한 그리스도의 지체를 세우는 사역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나사렛 목수인 유대인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사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혼의 세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 수 있도록 죄의 사슬을 끊으시고 사망에서 부활로 우리를 안내하고 계신다. 우리는 봉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환대를 실천하며 기독교 신앙의 구체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일상적인 사물인 떡과 잔, 헌금예물, 그리고 이 땅의 소산물과 우리가 수고한 땀과 열매를 모두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이 거룩함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되고 하나님 창조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사물을 사용하시었다. 씨와 공중의 새, 꽃과 동전, 문둥병자들과 어린이들을 가까이 하시며 하나님나라의 일환으로 증거하시었다. 구원의 손길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를 제공하시며 굶주린 자들의 배를 채우시며 물질적인 사물이 영적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안내하시었다.
평범한 사물이 하나님나라의 비범한 도구가 되는 모습이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매주일 모여서 떡을 떼고 그들의 삶을 나누는 예배를 드리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요 예배의 참모습인 것이다. 공동의 삶을 위하여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 됨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잘 함에 그치지 않고 열심을 다하여 서로를 돌보는 ‘환대’의 참 모습을 생활화하였다. 주님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가장 잘 나눈 초대교회는 떡과 잔을 나누며 성만찬을 감사와 제사의 삶으로 이어간 것이다.
4월 20일: 부활절 5번째 주일
행7:55-60; 시31:1-5, 15-16; 벧전 2:2-10; 요14:1-14
예비하신 거처를 약속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손님접대의 비유로 환대를 보여주시는데 다행이도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많이 있음이다. 신학적 문제로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천국에서는 각방을 쓸 수 있다고 누군가 농담을 한다.
2절과 3절의 ‘거할 처소’는 매우 난해한 해석으로 영원한 안식처인지 아니면 잠시 머무르는 곳인지 확실치 않다. 희랍어 ‘모네(mone)’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르는 안식처임을 가리킨다. 이는 임시의 거처로서 거대한 궁전이 아닌 광야의 작은 초막과도 같이 안전하고도 평안한 피난처이다. 그러나 거처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그곳은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준비하신 우리 모두의 처소로서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으로 비록 하나 되지 못하여도 모두 머무를 수 있는 곳임은 확실하다.
미국장로교의 목사 사택을 맨스(manse)라고 하는데 결코 크지 않은 집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맨션(mansion)이라고 하는 대저택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맨스는 목사와 가족이 목회기간동안 머무르는 거처로서 매우 임시적인 의미를 안고 있다. 우리가 거할 처소는 광야에 있다. 결코 진주문과 상아탑으로 장식된 거창한곳이 아니라 반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6절) 예수님과 함께 사는 매우 평범한 처소이다. 목회는 바로 이처럼 예수와 함께 거하기 위한 광야로의 초대인 것이다.
우리는 불확실하고도 위험한 삶의 여정으로 초대받고 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음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부활후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이시며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1절). 여기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미리 가셔서 처소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은 우리를 영접하시며 환대하시길 준비하신다. 하나님 백성을 위한 목양의 길로 초대하신다.
오늘의 본문은 흔히 사용하는 장례식 설교본문이 아니라 목회의 소명을 안내하는 초대의 내용이다. 먼저 가신 예수님은 우리의 길을 예비하신다. 상을 베푸시고 앉으시사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준비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도움과 평화를 열망하는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거처를 준비하고 집에 오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우리는 나아간다. 환대의 손길에 우리의 안식을 누리고 힘을 얻어 주의 백성을 사랑으로 품고 나아가기를 기도한다.
4월 27일: 부활절 6번째 주일
행17:22-34; 시66:8-20; 벧전3:13-22; 요14:15-21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정을 종교와 역사가 풍부한 문화의 도시 아테네로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의 유적에는 관심이 없는 듯 아테네의 언덕에 위치한 아레오바고 최고 재판소에 서서 일장 설교를 진행한다. 교육받은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도시 곳곳에 시설된 예술품들을 하나의 우상으로 간주하고 쓰레기로 취급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회당에서 시작하여 거리로 나와 어디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야만인으로 취급하였을 것이다. 아테네는 희랍문화의 중심권으로서 희랍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야만인(barbarian)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희랍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하는 말이 ‘바바(ba, ba, barbarian)’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좀 더 진보적인 사람들은 바울이 신에 대하여 하는 말로 관심을 갖고 철학적인 반응을 보이며 어떤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지 궁금해 하였을 것이다. 이는 새로움에 가장 민감한 호기심의 반응을 보이는 희랍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바울의 수사학적인 기교를 엿볼 수 있는 본문은 22절에서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아테네 사람들을 칭찬하며 그의 말문을 열어간다. 동시에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아테네인들의 우상숭배를 유대교적인 입장에서 지적하며 설교를 진행한다. 또한 자연신학을 언급하기도 하고 현대시인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28절)”고 청중의 관심을 이끌어 간다.
그리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간과하시고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시며…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30-31절)고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은 이에 부활에 대하여 반응하기를 조롱도하고, 어떤 이들은 다시 듣기를 요청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죽기 마련이고 또한 죽은 상태 그대로 썩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는 어떻게 증거할 수 있는가?
우리 설교자들 또한 바울과 같이 부활의 메시지를 핵심으로 매주일 전하여야 하는데 부활절 주일이 지나고 나면 부활의 사건을 다 잊어버린 모습으로 강단에 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많은 사람들이 들었을 텐데 그 중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만 믿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다시 한 번 조명한다. 부활의 신앙을 귀중히 간직하여 의심을 버리고 열린 마음과 생각으로 진리를 받아드리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기도한다. 성령의 은혜로 낯선 자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영접하여 환대하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부활의 신비가 널리 전하여지는 예배와 설교가 되기를 다짐한다.
Leave a Reply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