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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October 29, 2008
KAM Newsletter 11호, 2008년 11월
October 29, 2008 by admin.

2009년 8월 3-6일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
www.worshipnmusic.org 준비모임(10월 13-14)에 참석한 전국각지에서 모인 실행위원들
인사의 글
그동안 불리었던 한미목회실을 ‘한미목회연구소‘로 이름을 개정하여 봅니다. 그리고 이름과 걸맞게 그동안 준비한 연구실적을 여러분께 소개드림이 매우 기쁩니다. 드디어 영문학술지 Journal of Korean American Ministries & Theology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창간호는 한국교회 예배를 주제로 하여 5개의 Article과 5개의 논문 Review를 모았습니다. 저널은 계간지로서 앞으로 설교, 미술, 음악, 목회상담, 신학, 성서 등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에 속한 한인교수들의 편집자문을 받아 진행하려고 합니다. 창간호를 인쇄출판으로 기대하였으나 아쉽게도 재정이 허락되지 않아 웹에 올려놓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웹 주소는 www.webkam.org/journal 입니다. 저널 전체를 다운로드하여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에 로라 멘델홀 총장님께서 사임을 발표하고 2009년 여름서부터 임무가 시작될 새 총장을 선출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학교의 미래를 위하여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한 총장의 사임은 학교전체를 술렁이게 하였습니다. 특별히 총장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시작된 한미목회 연구소의 미래가 새총장의 출현으로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지금 준비하여야 하겠기에 긴장이 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준비는 재정후원의 일입니다.
세계경제가 모두 어렵고 힘들기에 우리 모두 예외는 아닌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울 때에 가장 활발히 그리고 헌신하여 일하여야 할 곳이 주님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자기의 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모든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찾는 때이기 때문에 새로운 일군을 더 세워야 하고, 키워야 하며, 우리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여야 하는 절실한 때입니다.
그러기에 Living Waters와 South Atlantic대회에 속한 한인교회들을 돕고자 시작된 한미목회연구소의 사명은 더욱 막중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1년동안 연구소가 할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평신도 제직훈련 프로그램
목회자 계속교육
2세목회자 및 영어목회 후원
교회음악/교회교육 예배 컨퍼런스
신학생 훈련 및 장학금 모금
영문 저널 발행
한국교회와의 관계모색
할 일은 너무나도 많은데 연구소에 할당된 기금이 없습니다. 내년도 예산을 편성하기 위하여 모금운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목표는 $50,000입니다. 각 교회에 학교에서 편지를 보낼 계획입니다. 그리고 목사님들께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적극적으로 도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각 교회 1년 선교예산에서 $1,000만 작정하여도 60여개의 양 대회 교회(미자립교회 포함)가 힘을 모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 학교에 선교지원을 하고 계신다면 Korean American Ministries로 Designate하여 주십시오. 한인교회와 한인 신학생들이 받는 혜택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힘이 모아지면 연구소의 활성화가 이루어질것을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11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료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종말과 심판
11월 1일: 성도추모일
계7:9-17; 시34:1-10, 22; 요일3:1-3; 마5:1-12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에 결코 혼자가 아니다. 먼저 교회가 있고, 성령이 있으며, 우리를 안내하는 성경, 그리고 성도가 있다. 성도는 우리보다 먼저 신앙의 길을 걸어간 수많은 그리스도의 증언자들로서 우리의 길을 안내하고 이끌어 준다.
성도를 추모하는 이 날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신앙의 조상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결코 혼자 갈 수 없는 그 길을 믿음으로 먼저 간 그 분들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를 기도함이 마땅하며 성도추모일은 믿음의 조상과 그들의 신앙을 기억하는 축제의 시간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 계시록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증인의 수가 허다함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도 셀 수 없는 숫자이다. 이 땅의 삶에서 하나님을 노래한 그들이 이제는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영원히 노래한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하고 물어보니 요한은 하나님께 그 대답을 돌리니 주님은 말씀하시길 이들은 고난을 견딘 신실한 자들이라고 하신다. 이들은 환난 중에 믿고, 소망하며, 증언하고, 또한 사랑을 베푼 자들이다. 이제 이들은 큰 목자께서 닦아 주시는 눈물에서 그가 인도하시는 생명수 샘물로 다가간다.
성도들은 이제 흰옷을 입고 행진하며 하나님 보좌 앞을 입장한다. 매 주일마다 우리는 예배를 준비하며 입장의 행진을 2000여 년 동안 하여왔는데 성도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며 우리의 길을 안내한 자들이다. 흔히 우리는 새로 교회에 온 사람을 마땅히 부를 직책이 없기에 OOO성도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OOO신도 혹은 교우가 옳을 것이다.
성도는 우리에게 주일학교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어려울 때 기도하여 주신 어른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신 할아버지 목사님들이시다. 그 분들이 안 계셨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는 신앙의 선생님들을 말한다. 그 분들을 특별히 기억하며 그들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설 수 있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특별히 하나님나라의 오심으로 인한 종말의 심판을 준비하여야 하는 우리에게 믿음의 본이 되어 우리를 기다리는 허다한 성도의 무리가 있음은 크나큰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11월 2일: 31번째 평주일
수3:7-17; 시107:1-7, 33-37; 살전2:9-13; 마23:1-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2절) 심판의 경고가 스며있는 가르침이다. 가식과 외식으로 치장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2절) 있음을 지적하고 계신다.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가르침은 Leader가 되기 전에 Follower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 지도자일수록 그 심판의 기준이 더 무거운 것이다. 그러기에 말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그들의 행위를 드러내어 보이려고 하는 겉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모세의 법은 365개의 금지사항과 250개의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사람들 어깨에 지우는 무거운 짐으로 존재함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11:30).
높이 오를 줄만 아는 사람은 언젠가 떨어질 때가 있음이 당연한 이치이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에게도 본인을 심판하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지도자이기를 조심하고 그 권위를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함을 말한다(10절). 윗자리에 앉기를 탐하기보다 겸손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오히려 낮게 임할수록 더욱 높아짐을 약속하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셔서 가장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 생명은 영원히 하늘의 보좌에 계심으로 우리에게 가장 높은 왕으로 임하신다.
오는 주일을 성도추모 주일로 지킨다면 오늘의 본문 또한 먼저 가신 신앙의 성도들이 걸어간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가 성도로 칭하며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자기를 높이지 않고 낮추어 남을 섬기며 겸손히 우리를 이끌어준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기억에서 남아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의 자리에서 우리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며 행동으로 본을 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가르침 중 가장 쉽고도 어려운 사항이다.
11월 9일: 32번째 평주일
수24:1-3a, 14-25; 시78:1-7; 살전4:13-18; 마25:1-13
우리에겐 “내일하면 되지”라고 미루는 습관이 허다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지며 우리의 행동과 결정을 지금 당장 이 순간 요구하고 계신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멈추시고 다가오실 때 우리는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
하나님나라는 순식간에 우리에게 임하심을 고백하며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 처녀들의 비유를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그 중 5명은 준비되고 5명은 준비하지 못한 모습이다. 준비된 자들은 잔치에 참여하고 준비되지 못한 자들은 쫓겨남을 말한다. 준비된 자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허둥지둥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그 날을 기다리는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본문은 마태복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기다리기에 지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임하시기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만 하는 우리들에게도 마태복음의 비유는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그 때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이천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기다림에 무디어져가며 마지막 시간의 긴박함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삶에 익숙하여진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삶은 결코 영원하지 못하다. 끝은 있기 마련이다. 준비되어 있는가? 이제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이르며 교회력을 따르는 시간의 종점에 와 있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미련을 갖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로맨틱감정을 갖고 누구든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여유롭게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칼을 자르듯이 냉혹한 면을 강조한다. 준비된 다섯 처녀들은 자기들의 기름을 결코 나눠주지 않고 있다.
서로 나눠 쓰지 못하는 점이 본문의 핵심은 아니다. 그 핵심은 준비성에 있다. 그리고 가짜 신랑의 목소리에 현혹되어 기름을 낭비하지 않는 지혜에 있다. 24장 5절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경고하심과 같이 우리 주위에는 종말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상품화시킨 유혹의 손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서, 바라보고, 준비하여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예수님은 본문의 비유를 마치면서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말씀하신다. 천지개벽의 떠들썩함인지, 세미한 음성의 임하심인지, 도둑의 발자국 소리인지, 임산부 출산의 고통인지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준비함을 재촉하신다.
11월 16일: 33번째 평주일
삿4:1-7; 시123; 살전5:1-11; 마25:14-30
달란트 비유는 청지기의 주제보다는 종말에 대비한 예수님의 마지막 비유의 가르치심이다. 마치 한 아기의 생명이 부모에게 주는 엄청난 축복과 잠재력에 비교된다.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며 그 달란트가 커져나감을 확인하여 가는 삶의 모습과도 같다. 본문의 비유 또한 그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인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며 기쁨의 수확을 바라보고 종들에게 투자한다. 모든 종들은 같은 가능성을 안고 일을 시작하나 한 종은 두려움에 휩싸여 그의 가능성을 펼치지 못한다. 종말의 심판이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에 눌리어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처럼 주인에게 불손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내리시사 평생을 통하여 그 포장을 열어보도록 안내하신다. 우리 자신이 그 선물로서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깜짝 놀라는 엄청난 선물들을 말한다. 우리의 달란트는 여러 모습으로 사용되어진다. 어떤 달란트는 세상에 도움이 되고, 어떤 달란트는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어떤 달란트는 아무 도움이 되어보이질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믿음이다. 이 믿음이 바로 세상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서 이를 받은 자들은 받은 것을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다. 전하여야 한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유통시켜야 한다. 요사이 경제침체에 따른 경기가 안 좋으니 자기만 살겠다고 숨겨놓음을 지적하고 계신다. 믿음은 나누어야 성장한다. 그러므로 믿음과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필요 없는 자임을 경고하고 계심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운 법을 펼치시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잘 사용하여야 옳지 그렇지 못하면 있는 것까지 다 빼앗김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구원의 열매로서 또한 다른 사람의 열매를 위한 씨앗과 같이 사용된다. 세리와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받은 선물의 율법을 그저 지키기에 급급하여 사랑으로 나누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시며 예수님은 반대로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십자가에 투자하여 모든 사람과 그 사랑을 나누심을 보이신다. 그 씨앗의 열매가 바로 사랑으로서 우리도 또한 계속하여 나눔이 천국시민의 모습임을 확인시키신다.
벤 존슨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은퇴교수로서 현대사회의 죽어가는 교회의 다섯 가지 증상을 말하고 있다:
1. 신앙은 사적(private)임을 주장한다. 종교는 개인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2. 자기교회만이 전부임을 주장한다. 교회 사람들만 돌보면 된다고 한다.
3. 편협하고 방어적이다. 변화를 거부하며 항상 이래왔음을 주장한다.
4. 믿음은 지식인의 자산으로서 하나의 성취하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5. 감성은 금물로서 열정적인 신앙인을 경멸한다.
한 시대의 유실물로서 있다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신앙인들은 받은 달란트를 아낌없이 나눌 수 있어야 하겠다.
11월 23일: 그리스도 왕 주일
겔34:11-16, 20-24; 시100; 엡1:15-23; 마25:31-46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자 우리의 심판관이시다.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 세상의 기준 그 이상의 것을 바라봄에 있다.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모든 것이 끝났을 때에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인자는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분별하듯이 나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기준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얼마나 도왔는지를 중심으로 평가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결코 편안하지가 않다. 언젠가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됨이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 보좌 앞에 서서 우리의 삶을 모두 비추어 보며 옳고 그름을 가리신다. 심판을 조명함은 오늘 주일이 그리스도 왕으로서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미지 또한 목자가 하루의 일을 마감하며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우리에 넣는 그 시대 아주 보편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계신다. 털이 많은 양은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기에 바깥쪽에 자리 잡고 추위에 약한 염소는 안 쪽으로 위치하여 밤을 준비시킨다. 여기에서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냐의 질문보다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서 두 그룹으로 나눠진 무리의 중심에 있는 목자는 왕의 절대적 권한으로서 나눠진 백성들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함과 같다고 강조한다(22:37-40). 이웃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듯 함을 다시 확인시키며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종말과 심판’ 시리즈는 신실한 종(24:45-51), 열 처녀(25:1-13), 그리고 달란트 (25:14-30)비유를 통하여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모습을 가르치고 있다. 공동체는 그 시간을 정확히 모르지만 깨어 있어서 갑자기 닥치는 왕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하며 그 기쁨의 잔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왕 주일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조명하며 윤리적 변화를 추구하여 왕과 신하된 백성으로서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요, 왕 되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교회력의 한 해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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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 Newsletter 5호, 2008년 3월
October 29, 2008 by admin.

2월 20일 장로교신학대학원 중창단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방문
인사의 글
부활의 기쁨을 전합니다.
이번 5호서부터 애틀랜타 지역목회자들의 범위를 넘어서 South Atlantic 대회에 속한 KPC 한인교회 그리고 미자립교회(Fellowship) 전체에 뉴스레터를 프린트하여 우편물로 발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재 학생으로서 M.Div. 졸업예정인 김재홍 전도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됨입니다. 김전도사님(위사진 왼쪽끝)은 한국 이랜드에서 직장을 다닌 사회경험이 있는지라 한미목회실을 시작함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심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혹시 지난 호를 받고 싶으시면 저나 김전도사께 (jaehong.kim@students.ctsnet.edu) 연락주시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한미목회실에서는 콜롬비아 평생교육원의 평신도 교육 프로그램(Lay Leader Training Program)의 한국어 트랙으로 제직훈련을 진행하고자 설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KPC 산하 여러교회가 공동으로 제직교육을 제공하고자 애틀랜타 목회자들과 KPC임원들을 중심으로 의논중입니다. 여러분들의 고견과 제안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일이 진행됨과 함께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계속교육을 또한 구상중에 있으며 학교의 자원들을 익히느라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4월 18일에는 총회의 김선배목사, 정인수목사, KPC 임원대표로 이원걸목사, 최병호목사님들을 모시고 학교관계자들과 함께 한미목회실의 큰 그림을 그리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을 바랍니다.
저는 3월9일 주일에 조지아 장로교회(김삼영목사)에서 설교를 하였고 4월1일 콜롬비아 이사회를 여는 아침경건회에, 그리고 4월 6일 연합교회(정인수목사)에서 말씀을 전하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를 찾아뵙고 인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또한 바랍니다.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새 기숙사 기공식
4월 1일 화요일 오후 5시에 새기숙사 기공예배를 드립니다. 이날 로라 멘델홀 총장의 사회로 진행되는 예배는 한국전통 사물놀이의 상고춤을 선보이며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신학원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귀중한 시간에 한인교회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새 기숙사는 Florida Hall 건너편 운동장 코너에 자리잡게 되는데 장기적으로 Simons-Law 현재 기숙사를 교실 및 오피스 공간으로 개조하기위한 첫번째 플랜입니다. 학교를 확장하고 새롭게 만들고자 기획중에 있습니다.
성서정과 4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 을 참고하세요.
‘환대’
4월 6일: 부활절 3번째 주일
행2:14a, 36-41; 시116:1-4, 12-19; 벧전1:17-23; 눅24:13-35
본문은 바쁜 삶의 연속에서 ‘빨리빨리’가 아닌 좀 천천히 가며 환대를 베푸는 부활의 삶을 전하고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활절 당일 날의 이야기로 전하여진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가게 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당사자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을 물으시며 대화하시고, 함께 걸으시며, 동행하신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걷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주님은 같이 동행하심을 보이시며 부활을 몸소 증거하신다.
그렇다고 본문이 어느 특별한 날의 특별한 사건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되고 전하여진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엠마오의 이야기는 부활에 대한 증인과 그들의 고백에 의존하는 한정된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되어야 하고 체험하여야 하는 실천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의 진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헌으로 정리된 모습만은 아닌 것이다. 빈 무덤과 그리스도의 죽은 몸이 변화됨을 기록한 역사적 사건에만 집중함으론 부활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간단히 설명하여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전이나 지금이나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함을 경험함에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이러한 경험은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만남에 있었다. 바울과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직접 경험하였고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며 역사적 사실만이 아닌 현재진행중인 은혜의 체험을 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이곳에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함께 하신다.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언제나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부활이후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경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독교 역사의 흐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형의 형식을 통하여 그 경험이 전하여지고 있다. 신비의 경험과 특별한 비전들이 기도와 예배, 성만찬을 비롯한 성례전,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드라마, 미술, 음악 및 문학작품을 비롯한 예술을 통하여 전하여진다. 부활의 진리는 약200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여 경험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사건 자체에 흥분되어 목표만 의식하여 너무 빨리 걷느라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부활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겠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부활의 경험을 기대하여 본다.
상황설교
주객이 바뀌면 안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주객이 바뀌어야 교회가 삽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손님과 주인의 위치가 바뀐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손님으로 초대받은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 집에서 유대교 주인이 하는 식탁의 기도를 드리면서 제자들의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환대”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한 단어가 매우 깊은 진리의 뜻을 통합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랍어로서 ‘지노’(xenos)라는 말입니다. 이 뜻은 ‘낯선 자’라는 희랍어로서 ‘손님’의 뜻도 되고 ‘주인’의 뜻도 됩니다. 이 단어는 “환대”가 내포하는 기본적인 뜻인 상호관계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심적인 표현으로서 ‘낯선 자’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룩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손님과 주인의 의식차이는 어떻게 서로를 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관계를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영어단어가 있는데 지노포비아 (xenophobia)입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낯선 자들에 대한 공포심으로서 지극히 극단적인 민족주의 아니면 “나의 조직이 너희 조직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를 약간 변형하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환대”-필로지니아(philoxenia)가 됩니다. 이 단어는 손님 혹은 낯선 자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로지니아’는 아울러 환대의 주위상황, 즉 손님과 주인의 모든 활동상황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랑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필로지니아의 상호관계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다른 이들과 식사를 할 때에 되풀이하여 일어난 사건들이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결혼식 잔치에 참여하십니다. 그러나 술이 떨어졌을 때에 그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며 주인의 모습이 됩니다(요한복음 2:1-11). 마르다가 예수님을 그녀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한 후 대접에 지친 모습이 되자 예수는 오히려 그 날 만큼은 그녀에게 앉아서 대접을 받는 것이 대접하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치십니다(누가복음 10:38-42).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로마서 12:13)고 합니다. 이러한 원형의 상호관계적 ‘환대’는 그곳에 들어오는 자를 포용하고 변화시키게 합니다. 가정집에서 모이던 초대교회는 계속 성장하면서 주인 된 자들을 손님으로 그리고 손님된 자들을 주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가정교회 목회사역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여행 중 전도하던 사도 바울은 각 처소에서 그가 받을 사랑의 환대를 기대하며 나아갔고 또한 그를 기다리던 교회들도 그가 가져올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 또한 비슷한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손님들이 결국은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며 꼭 필요한 선물을 주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집 없는 노숙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은 거의 대부분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두 겉치레의 외면상인 주인들은 그들이 나눈 것 이상으로 가난한 손님들인 노숙자들을 통하여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받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국제화가 급속도로 전개되면서 외국인노동자에게 우리가 환대를 베풀어야함이 강조됨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한 개념, 즉 낯선 자로서의 손님이 의외의 선물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은 “환대”의 성경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손님이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은 전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세 명의 손님사이의 일은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 손님들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늙은 부인 사라가 곧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실로 엄청난 소식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항으로 그 낯선 나그네의 얼굴이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이란 것이 마태복음에 밝혀져 있습니다(25:38). “환대”가 제대로 행하여진다면 그 일은 단순히 낯선 자를 환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성을 경험하는 것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들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고 그들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환대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자신이 없습니다. 환대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위험한 상황, 아직 준비되지 않은 미숙한 공동체와 불투명한 약속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환대를 베푸는 장소에서 모든 손님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선물들을 꺼내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재능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손님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성숙도에 달려있기도 합니다.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쉼터(shelter)와 보호(care)의 필요성과 한편으로는 낯선 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하는 이 시대에 환대를 실천하는 노력과 함께 서로를 도와주며 성장하는 우리 사회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오늘,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의 사회들은 이처럼 현실적인 요구에서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86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중미 사람들의 연합회 성격인 카레센(CARECEN Central American Resource Center)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새 이민법에 의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중미 사람들의 법률 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입니다. 주로 자원 봉사자들로 이루어진 카레센은 다양한 성격의 봉사를 대행하는데 특별히 기본적인 아니면 전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라틴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히스패닉 문화와 정서에서의 건강과 치료방법을 추구하며 라틴계 사람들을 환영하였습니다. 많은 경우에 직원들과 자원봉사자 자신들이 카레센을 통하여 도움을 받았기에 상담을 원하는 이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곤란함을 잘 알고 있으며 이제는 주는 자의 입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손님으로 온 이들이 이제는 특권을 가진 자리의 주인의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낯선 자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은 무언가 새롭고 생소한 미지의 세계로 우리자신을 초청하는 일입니다. 낯선 자들은 우리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우리의 편협한 시각을 고쳐 줄 것이고 우리 상상력에 자극을 더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세상을 신비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초대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과 탈북자들을 비롯하여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더 이상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식탁으로 초대하여야 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주객의 관계가 바뀌며 진정한 ‘환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이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바쁜 삶의 모습에서 비록 낯선 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실지라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환대를 베푸는 우리의 여유 있는 삶이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4월 13일: 부활절 4번째 주일
행2:42-47; 시23; 벧전2:19-25; 요10:1-10
부활절 4번째 주일은 선한목자 주일이다. 주일예배는 구경꾼이 존재하는 운동경기가 아니다. 참여하지 않고 무슨 재미로 예배를 드리는가? 초대교회에서의 참여는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가져온 음식과 예물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예배가 마친 후에는 남은 음식들을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병든 자와 갇힌 자, 그리고 낯선 자와 나그네에게 나누어 주었다. 초대교회는 ‘환대’를 실천하며 선한목자의 삶을 산 것이다.
예물을 봉헌하기 위하여 송영과 함께 안내위원들이 앞으로 나아올 때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연계하여 일상생활의 모습을 하나님께 그대로 드리는 거룩한 시간인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영적’ 가치론에 가려져서 평범한 사물이 거룩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몸’이 다시 사신 부활의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먼 관계가 될 것이다.
기독교는 성육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몸의 신학’을 중요시 한다. 공동체를 통한 그리스도의 지체를 세우는 사역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나사렛 목수인 유대인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사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혼의 세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 수 있도록 죄의 사슬을 끊으시고 사망에서 부활로 우리를 안내하고 계신다. 우리는 봉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환대를 실천하며 기독교 신앙의 구체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일상적인 사물인 떡과 잔, 헌금예물, 그리고 이 땅의 소산물과 우리가 수고한 땀과 열매를 모두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이 거룩함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되고 하나님 창조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사물을 사용하시었다. 씨와 공중의 새, 꽃과 동전, 문둥병자들과 어린이들을 가까이 하시며 하나님나라의 일환으로 증거하시었다. 구원의 손길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를 제공하시며 굶주린 자들의 배를 채우시며 물질적인 사물이 영적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안내하시었다.
평범한 사물이 하나님나라의 비범한 도구가 되는 모습이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매주일 모여서 떡을 떼고 그들의 삶을 나누는 예배를 드리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요 예배의 참모습인 것이다. 공동의 삶을 위하여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 됨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잘 함에 그치지 않고 열심을 다하여 서로를 돌보는 ‘환대’의 참 모습을 생활화하였다. 주님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가장 잘 나눈 초대교회는 떡과 잔을 나누며 성만찬을 감사와 제사의 삶으로 이어간 것이다.
4월 20일: 부활절 5번째 주일
행7:55-60; 시31:1-5, 15-16; 벧전 2:2-10; 요14:1-14
예비하신 거처를 약속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손님접대의 비유로 환대를 보여주시는데 다행이도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많이 있음이다. 신학적 문제로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천국에서는 각방을 쓸 수 있다고 누군가 농담을 한다.
2절과 3절의 ‘거할 처소’는 매우 난해한 해석으로 영원한 안식처인지 아니면 잠시 머무르는 곳인지 확실치 않다. 희랍어 ‘모네(mone)’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르는 안식처임을 가리킨다. 이는 임시의 거처로서 거대한 궁전이 아닌 광야의 작은 초막과도 같이 안전하고도 평안한 피난처이다. 그러나 거처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그곳은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준비하신 우리 모두의 처소로서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으로 비록 하나 되지 못하여도 모두 머무를 수 있는 곳임은 확실하다.
미국장로교의 목사 사택을 맨스(manse)라고 하는데 결코 크지 않은 집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맨션(mansion)이라고 하는 대저택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맨스는 목사와 가족이 목회기간동안 머무르는 거처로서 매우 임시적인 의미를 안고 있다. 우리가 거할 처소는 광야에 있다. 결코 진주문과 상아탑으로 장식된 거창한곳이 아니라 반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6절) 예수님과 함께 사는 매우 평범한 처소이다. 목회는 바로 이처럼 예수와 함께 거하기 위한 광야로의 초대인 것이다.
우리는 불확실하고도 위험한 삶의 여정으로 초대받고 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음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부활후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이시며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1절). 여기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미리 가셔서 처소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은 우리를 영접하시며 환대하시길 준비하신다. 하나님 백성을 위한 목양의 길로 초대하신다.
오늘의 본문은 흔히 사용하는 장례식 설교본문이 아니라 목회의 소명을 안내하는 초대의 내용이다. 먼저 가신 예수님은 우리의 길을 예비하신다. 상을 베푸시고 앉으시사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준비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도움과 평화를 열망하는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거처를 준비하고 집에 오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우리는 나아간다. 환대의 손길에 우리의 안식을 누리고 힘을 얻어 주의 백성을 사랑으로 품고 나아가기를 기도한다.
4월 27일: 부활절 6번째 주일
행17:22-34; 시66:8-20; 벧전3:13-22; 요14:15-21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정을 종교와 역사가 풍부한 문화의 도시 아테네로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의 유적에는 관심이 없는 듯 아테네의 언덕에 위치한 아레오바고 최고 재판소에 서서 일장 설교를 진행한다. 교육받은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도시 곳곳에 시설된 예술품들을 하나의 우상으로 간주하고 쓰레기로 취급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회당에서 시작하여 거리로 나와 어디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야만인으로 취급하였을 것이다. 아테네는 희랍문화의 중심권으로서 희랍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야만인(barbarian)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희랍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하는 말이 ‘바바(ba, ba, barbarian)’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좀 더 진보적인 사람들은 바울이 신에 대하여 하는 말로 관심을 갖고 철학적인 반응을 보이며 어떤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지 궁금해 하였을 것이다. 이는 새로움에 가장 민감한 호기심의 반응을 보이는 희랍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바울의 수사학적인 기교를 엿볼 수 있는 본문은 22절에서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아테네 사람들을 칭찬하며 그의 말문을 열어간다. 동시에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아테네인들의 우상숭배를 유대교적인 입장에서 지적하며 설교를 진행한다. 또한 자연신학을 언급하기도 하고 현대시인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28절)”고 청중의 관심을 이끌어 간다.
그리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간과하시고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시며…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30-31절)고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은 이에 부활에 대하여 반응하기를 조롱도하고, 어떤 이들은 다시 듣기를 요청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죽기 마련이고 또한 죽은 상태 그대로 썩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는 어떻게 증거할 수 있는가?
우리 설교자들 또한 바울과 같이 부활의 메시지를 핵심으로 매주일 전하여야 하는데 부활절 주일이 지나고 나면 부활의 사건을 다 잊어버린 모습으로 강단에 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많은 사람들이 들었을 텐데 그 중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만 믿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다시 한 번 조명한다. 부활의 신앙을 귀중히 간직하여 의심을 버리고 열린 마음과 생각으로 진리를 받아드리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기도한다. 성령의 은혜로 낯선 자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영접하여 환대하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부활의 신비가 널리 전하여지는 예배와 설교가 되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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