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M Newsletter 9호, 2008년 9월


인사의 글

곧 2008-2009 새 학기가 시작합니다.

새 오피스가 한미목회실로 배정되었습니다. Harrington Center 229호실로 2층 채플실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2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는 Suite입니다. 그동안 Richardson Center 3층에 위치한 저의 교수 개인연구실은 한미목회실로 사용하기에 여러모로 불편하였는데 총장님과 Lifelong Learning Director인 Dent Davis교수님의 도움으로 좋은 사무실로 이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여러분들의 방문을 기대하여 봅니다.

이번 학기에 새로 입학한 M.Div. 학생들은 합50명입니다. 그 중 한인 학생들은 5명인데 모두 영어권의 남학생들입니다. 학교 입학처에서는 내년 새 기숙사가 완공됨과 함께 입학정원을 75명선까지 올릴려고 합니다. 더 많은 한인학생들이 지원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재학생 7명과 Th.M.에 새로 입학한 5명을 합하면 17명의 한인학생들이 학위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D.Min.과정과 정규학위과정이 아닌 특별학생들을 포함하지 않은 숫자입니다. 이 중에서 아직 교회봉사가 정하여지지 않은 학생들을 위하여 교회안내를 시도할 계획입니다.

오는 9월 22일서부터 지역교회 안수집사*장로 평신도 제직교육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월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10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교수진과 애틀랜타 지역교회 목사님들을 강사로 짜여지고 12월초에 신학교에서 주는 수료증을 졸업식과 함께 수여할 계획입니다. 문의 사항은 김재홍목사(678-665-9927)에게 연락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겨자씨의 믿음이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9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료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초청

하나님 나라에서는

서로 용서하라고 초청하시고 (마18:15-20)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또 부탁하시며 (마18:21-35)

포도원의 일군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일군으로 초청하신다. (마20:1-16)

우리 또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기쁨으로 참여하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마21:23-32)를 감사하며

9월의 말씀을 준비한다.

9월 7일: 23번째 평주일

출12:1-14, 22-23; 시149; 롬13:8-14; 마18:15-20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시마고 말씀하심은 정말 획기적인 주님의 약속이다. 두 사람이 모이면 세 가지 네 가지 다른 견해로 갈라지고 나뉘어져 하나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님도 알고 계신 것 같다.

우리는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효과로 시청과 중앙청에 수 십 만의 인파가 모여들어 하나된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이 다(多)중이 되고 구경꾼으로 전락한 군중의 모습에서 서로의 이익만 추구할 뿐이지 진정으로 하나 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기만 하다.

서로의 갈라진 관계가 회복되고 합심하여 하나 됨은 용서와 화해와 같은 실천이 있기 전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 시간, 물질이 동반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본문의 내용은 회중속의 동등한 두 사람의 화해를 말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지도자와 청중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두 사람이 합심하지 못함은 공동체의 한 지도자가 목자의 책임감을 벗어 던지고 잃어버린 양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무엇이 두려워서 그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에 처한 양을 구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처럼 하나 된 모습으로 믿고 따르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다.

지도자나 청중의 실수와 과오를 그냥 덮어두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합심하여 같이 그 잘못을 나누고 화해하는 모습,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책임을 서로에게 묻는 것 보다는 잘못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사건을 분석하여 서로 더 좋은 지도자와 청중이 되도록 배려하여 주는 공동체의 모습을 말한다.

아울러 ‘두 사람’을 개인으로만 보지 않고 확대하여 본다면 두 문화, 두 언어, 두 이념 등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이질 공동체를 조명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이념이 달라도 서로 합심하면 이 땅에서 풀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현대교회에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제목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용서하고 기억하는’ 교회공동체 모습으로의 부름이다. 서로를 용서하라는 부르심을 기억하여 겸손함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회복의 사역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선한목자로 그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구하여주심을 기억하여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됨을 추구하는 온전한 공동체 사역이 되기를 기도한다.

9월 14일: 24번째 평주일 (추석)

출14:19-31; 시114; 롬14:1-12; 마18:21-35

용서의 공식이 수학문제 풀듯이 존재하겠는가? 예수님의 비유로 진행되는 본문은 임금이 그의 종들과 잔금을 치르고자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폭력과 용서가 진행된다. 공평을 강조하는 듯 시작된 비유의 전개는 용서의 반전을 이룬다. 그런데 용서받은 종이 그의 동료의 숨통을 조인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은 그의 자비를 번복하여 화를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폭력과 죄에 대한 벌의 모습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생각되지만 이것이 바로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인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폭력과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얼룩져 있음이 사실인 것이다. 어떠한 모양이든 이 세상은 죄에 대한 값을 치루거나 보상을 받아야만 하는 원칙으로 살아야하는데 진정하고도 무조건적인 용서가 있을 수 있는가?

본문의 비유가 과연 용서를 가르치고 있는가? 이야기의 첫머리에 임금이 갚을 길이 없는 종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잠시 일어난 용서이다. 그 종이 그의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빛 진 자의 목을 잡고 빚 갚기를 위하여 옥에 가두는 것을 듣고 임금은 그의 용서를 다시 번복하여 옥에 가두고 빛을 다 지불할 때까지 고문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면 폭력으로 치닫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유의 줄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조건부적인 용서가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은 무조건적이며 관대한 용서만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함을 가르치고 있다. 7번이란 숫자를 세지 말고 무한정의 용서를 되풀이 할 것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기심과 물질만능주의로 손해 안 보려는 욕심과 폭력으로 만연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어려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방문하여 친지를 만나게 된다.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용서의 새로운 관계가 필요한 때이다. 가족끼리 아직도 풀리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용서하는 사람이 되도록 초청함을 잊지 않는다.

9월 21일: 25번째 평주일

출16:2-15; 시105:1-6, 37-45; 빌1:21-30; 마20:1-16

포도원 일군을 비유로 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초점이 일군의 먼저 됨과 나중 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에 있다.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쉬지 않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님의 수고하심에 있지 우리의 노력이나 재능에 있지 않음을 확인하여주는 본문이다. 본문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이냐의 질문,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공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 즉 소명을 제공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만약 포도원 주인이 그 다음날 일군을 찾으러 아침 6시에 나갔다고 하면 아무도 일하러 오질 않았을 것이다. 오후 늦은 시간에 일을 시작해도 같은 일당을 받는데 왜 이른 아침부터 수고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포도원 주인과 일군의 심정 및 태도의 차이이다. 탕자의 비유(눅15)와 같이 순서가 뒤 바뀌는 반전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를 찾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할 일없이 빈둥대는 백수와 백조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역에 참여하도록 초청받는 신나는 일이다. 포도원 비유는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에 그 핵심이 있다.

윌리암 윌리몬(William Willimon) 미국연합감리교 감독의 설교를 소개한다. 그는 미국 10대 설교자 명단 안에 열거되는 영어권 강단의 영향력 있는 학자요, 교회행정가, 설교자이다. 본문의 비유가 진행하는 반전의 이야기 전개와 같이 윌리몬은 설교의 내용까지도 이야기의 반전을 꾀하며 긴장을 갖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끝까지 들어야 하는 귀납적 내러티브 설교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교회력 설교자료를 제공해온 윌리몬은 세례를 통하여 보는 설교란 주제를 화두로 던지며 다음과 같은 상황설교를 마태복음 20장 본문을 중심으로 펼치고 있다.

상황설교 [윌리암 윌리몬의 설교 편역 - Peculiar Speech (Eerdmans, 1992)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때가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우리가 참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윤리도덕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가리켜 마치 추수를 앞둔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서 일할 고용인을 찾습니다. 일군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씩 약속을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면 오늘날 적게 잡아서 5만원, 아니면 많이 생각해도 10만원이 아닐까 합니다. 일군들은 오늘만큼은 놀지 않고 일하게 됨이 감사하여 아침 6시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오전9시쯤 되어서 농장을 바라보니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일할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시장으로 나가 일할사람들을 찾습니다. 아직도 일거리를 찾지 못해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제일 귀중한 아침시간이 다 지나가는데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본문엔 “상당한 보수”라 하지만 원문과 대조할 때 “정당한 보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주인은 계속하여 12시 오정시간에도 시내에 나가봅니다. 주인은 역 근처에서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자들을 불러 일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날의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오후3시에도 다시 시내에 나가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청년 두엇을 발견합니다. 벌써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긴 그림자를 밟는 시간입니다. 할 수 없지! 하면서 그들도 고용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쉴 수 없습니다. 곧 큰비가 올 것인지 아니면 포도가 너무 익어서 지금 안거두면 상하게 되는지 이유야 어쨌든 할일이 아직도 얼마나 남았기에 마지막으로 오후 5시경에 다시 한 번 시내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시간입니다. 하루의 일할 때는 이미 지나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두 사람이 일을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인 오후 6시까지는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도 주인은 마찬가지로 정당한 보수를 약속하며 고용합니다.

이미 아시는 바대로 포도원에서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의 노동 시간의 차이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12시간, 9시간, 6시간, 3시간, 혹은 1시간만 일한 이 들도 있습니다. 자! 이제는 일한 삯을 지불할 때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기억하신다면 일군들과 약속한 정확한 액수는 한 데나리온. 오직 제일 처음에 온 일군들에게만 약속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이 고용인은 평범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게 제일 마지막에 온 일군에게 먼저 지불합니다.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게도 한 시간만 일 하였는데 한 데나리온을 건네줍니다. 다른 일군들은 잠시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12시간동안이나 땡볕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한 우리들은 혹시 12데나리온을 주시지 않을까?

아닙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미 약속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곧 불평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공평하지가 못하다고. 그러나 공평은 표면상의 모습이지 그들이 이미 주인과 약속한 한 데나리온은 이미 정당하게 지불된 상태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20장의 비유가 시작되기 전 19장 마지막 절에 다음과 같은 암시를 하여 줍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장 31절에 또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십니다.

“아하! 알겠습니다.” 제자들은 말합니다.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조롱하는 그 바리새인들이 바로 하나님나라에 먼저 된 자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교만성과 자신들만 의롭다고 하는 눈가림이 결국에는 나중으로 밀려나고 조롱받고 핍박받는 우리들이 그들을 앞서 천국에서 먼저 될 것이라는 것이군요.”

“아하! 알겠습니다.” 초대교회는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약속된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나라에서 나중 되고 우리 소외된 이방인들이 처음 될 것이라는 말이군요!” “우리는 비록 하나님나라에 나중에 왔지만 처음 온 자들과 꼭 같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군요!”

글쎄요! 오늘도, 지금 이 시간도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불평과 시기, 질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처음 온 사람들이야 할 수 없지! 하고 나는 마지막에라도 참석했으니 다행이야”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여기까지만 여러분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셨다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복음의 핵심을 받아들인 바는 못 됩니다. 다음의 비유가 도움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강의 첫 시간에 교수는 학생들과 대면하면서 이렇게 과목을 설명합니다. 학생여러분, 자 여기에 대단히 어렵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수학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문제 하나를 여러분이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이번학기 성적이 달려있습니다. 이 문제를 학기 첫 시간서부터 여러분께 드리는 이유는 지금부터 당장 작업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목을 패스하려면 지금 이시간서부터 시작하세요. 여러분 모두가 이 문제의 해답을 풀음으로 모두 A의 성적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A를 받고자 하는 저는 그 문제를 안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학기 첫 주간서부터 열심히 책을 읽습니다. 도서실에서 모든 자료들을 뒤적여 봅니다.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공식을 만들어 보려고 밤낮으로 갖은 애를 다 써봅니다.

그런데 학기의 중간이 지나가도 같은 클래스에 있는 학우들이 나처럼 열심을 내는 모습이 통 보이지가 않습니다. 게을러서 공부 안하는 거야 할 수 없지, 나만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아마 학기말이 오면 모두들 후회할거야 하고 학기 첫 주간서부터 공부를 시작함에 사뭇 자랑스럽게 생각하여봅니다.

학기말고사 1주일 전에 저는 수학문제의 마지막 정리를 여유 있게 다듬어 나갑니다. 클래스의 다른 몇 친구들은 이번 주에 집중하여 열심히 풀어나가면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들은 아직 시작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정하여진 시간 안에 완성하여 제출한다는 것은 그들에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자! 드디어 학기말을 끝내는 마지막 시험 날이 왔습니다. 저는 자랑스럽게 준비된 문제해답을 잘 묶어서 교수에게 제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클래스에 있는 모든 학우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그 어려운 문제를 다 풀어서 교수님께 제출하는게 아니겠어요? 도대체 어떻게 해내었을까?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제해답지를 제출하면서 제각기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습니다. “교수님, 지난주에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이 안도와 주셨으면 저는 아마 아직도 못 끝냈을 겁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모두 마쳤습니다. 어제 저를 도와주셔서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이야기합니다. “교수님! 어제 저녁에 밤늦게 저희 기숙사에 와주셔서 도와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여기 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미칠 지경입니다. 어쩐지 수상하더라! 내가 열심히 문제를 풀기 위해서 혼자서 끙끙 거리며 도서실과 공부방에 한 학기 내내 처박혀 있는 동안 이 교수님은 쓸데없이 학교 캠퍼스를 온통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그 해답공식을 가르쳐 주고 있었단 말인가? 나만 빼놓고 모두에게 특혜를 준 셈인데 너무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합니다.

참다못하여 교수에게 따져봅니다. 그랬더니 대답은 “왜 나에게 불평입니까? 내가 선하게 한일이 잘못됐습니까? 클래스의 이번학기 목표는 그 수학문제를 푸는 것에 있었습니다. 원우께서는 그 어려운 문제를 혼자서 풀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학생과 같지 않아서 나의 도움이 조금씩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번학기 당신의 점수 A입니다. 다른 학우들도 모두 A점수를 받았어요. 그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내가 약속을 어기는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래도 왠지 속이 시원치가 못합니다. 그냥 배가 아파옵니다. 내가 받은 A성적을 보니 처음부터 원하던 바이기는 하나 다른 친구들 모두 A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A성적이 진짜 A같지가 않아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교수의 모든 학생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어진은혜가 나에게는 감사히 받아들여지지를 않는다 이 말입니다. (아무도 아멘하시는 분이 없으시군요)

아마도 이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아직도 학생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의 비유 또한 이야기의 핵심은 일군과 정당한 품삯에 있지 않고 바로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에 있습니다. 또한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 데나리온씩을 받음과 수학문제의 어려움에 상관없이 모두가 A를 받았음에 우리는 흔히 이번 본문의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결코 큰돈이 못됩니다. 아무도 한 데나리온이 얼마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노동자와 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하루 생활비로 겨우 쓸 수 있는 돈입니다. 하루의 한 데나리온은 관대한 지불이 못됩니다. 다시 말하여 고용인인 포도원 주인이 관대함으로 돈을 뿌린다고는 결코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바로 우리의 기독교 윤리적인 표본으로 직장인의 품삯을 정하시려고 이 이야기를 하심은 더욱 아닙니다. 바로 오늘의 이야기는 포도원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포도원과 장터를 오고가는 모습에 그 핵심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계속하여 일꾼을 구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돌아다닙니다. 도대체 왜 주인은 보는 사람마다 포도원으로 부르기로 결심하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포도원의 열매가 너무 익어서 오늘 중으로 다 따야하는지? 내일은 엄청난 비가 오겠기에 오늘 중으로 수확을 끝내야 하는지? 아니면 일을 못 찾아서 노는 이들과 그 가족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는지?

우리는 자세히 모릅니다. 본문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자세히 묘사된 부분은 어느 주인이 그의 포도원과 장터사이를 수차례 오고가면서 자동차기름을 엄청 없애면서도 길 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쉬지 않고 실어 날랐다는 점입니다. 모든 이들은 아니군요. 주인이 제시한 정당한 보수에 동의하여 일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네! 그러면 무엇이 정당하다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통하는 정당성이란 개인의 기준과 위치에 적당한 보수를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한 직분이나 분야에 오랜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으면 그것에 상당하는 보수를 요구합니다. 학교의 전문지식을 습득한 석사, 박사학위 소지자는 그만치 시간과 학비를 투자하여 공부하였다 하여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합니다. 머리가 똑똑하다 하여 IQ가 높다 하여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합니다. 나이가 많다하여 사회의 경험이 풍부하다 하여 권력과 거기에 상당하는 존경을 받고자 함이 우리에게 통하는 정당성입니다. 교회라고 이러한 지극히 인간적인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다고 보시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당성과는 좀 다른 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당성을 따지자면 포도원 주인도 그의 약속에 어긋남이 없는 보수를 지불했습니다. 단지 모두에게 똑같이 지불했다는 점이 틀릴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가르치는 공명정대함은 바로 주인이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한 데나리온이 결코 정당성의 본보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쉬지 못하는 주인이 포도원으로 일꾼을 계속하여 부름에 그 공명정대함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공명정대함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느냐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모두를 일꾼으로 부르시는 그 초청장에 있는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쉬지도 않으십니다. 계속하여 우리를 천국잔치에 초청하시려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타난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평등 속에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비즈니스의 관념에서 하늘나라와 교회를 이끌어 간다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비즈니스는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끈기 있게, 인내심으로 계속하여 초청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초청장이 하늘나라의 비밀인 것입니다. 바로 이비밀이 이 땅의 천국으로 세워주신 우리교회의 신념이어야 될 줄 믿습니다. 혹시나 우리의 노력과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서, 밤새워 철야기도한 응답으로서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한 우리의 모습으로서 지금의 우리교회가 세워진 것이라 생각하신다면 큰 오해입니다. 아직도 오늘의 본문말씀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현재 예수그리스도의 한공동체인 교회로서 이 땅에 설 수 있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초청장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의 은혜의 말씀은 주인의 장터를 향한 번거로운 발걸음에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에 있지를 않습니다. 주인은 모든 이들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까지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의로운 교수는 클래스의 모든 학생들이 A를 받을 때까지 밤에 잠을 못자며 학생들을 도와줍니다. 하늘나라의 잔치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며 만족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평하심만을 바라신다면 그것만이 여러분께는 전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 할당된 한데나리온만 집어 들고 떠나십시오. 그것이 성경의 주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데나리온에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의 참뜻을 헤아릴 수 있는 자들은 기다립니다. 모든 이들이 초청되어 주인과 함께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그 날을 기다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우리 회중 속에는 여러 종류의 모습으로 초청을 받으신 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이른 아침부터 오셨습니다. 수고하며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오신지 얼마지 않습니다. 아직 초청을 받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아직 이곳에 오시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도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초청장은 우리 모두에게 어느 누구에게나 일할 기회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바로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일찍 온 사람, 늦게 온 사람 상관없이, 우리의 행위나 업적에 관계없이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사망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9월 28일: 26번째 평주일

출17:1-7; 시78:1-4, 12-16; 빌2:1-13; 마21:23-32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신다. 그러자 어떠한 자격으로 그리고 누가 이런 권위를 허락하였느냐고 시비를 건다. 그러자 하나님의 권세를 가르치시며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교지도자들의 “무슨 권세로?”라는 질문은 하나님으로부터인가, 사탄으로부터인가, 아니면 스스로 만든 것인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권위와 그 가르침(마7:29)은 공생애 시작서부터 계속하여 대두되어온 질문으로서 성전의 권위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법정에 세우기 위한 약점을 잡기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러하기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 특별하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의 윤리도덕 선생으로 예수님을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로 보느냐의 갈림길에 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레위인, 에세네파, 헤롯당, 그리고 열형당원 등과 같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칼과 권력으로 무장하여 각 분파로 나누어진 유대인들의 정치 현실에서 누구의 권세로 사람들을 모으느냐의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여 누가 뒤를 봐주느냐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질문하시며 누구의 권세인지 되물으신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 하자 마태만이 전하는 두 아들의 상반된 이야기를 비유로 전하신다. 누가 아비의 뜻대로 포도원에서 일하였는가? 포도원에 일하기를 초청받은 두 아들은 서로 다른 대답과 실천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사역은 포도원 주인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일임을 내비치며 누구의 권위이냐가 아닌 누가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는가를 되돌려 묻는 이야기이다.

물론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한 비유이지만 오늘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교회를 하나의 기관으로서 여기며 하나님 사역을 위한 전도와 갱신을 기쁨으로 행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포도원에 일하러 간다고 하면서 길에 있는 돌이나 치우고 있지 정작 포도를 추수하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두 아들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악한 농부들의 비유(21:33-46)와 임금의 혼인잔치 비유(22:1-14)는 권위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으로 연속하여 전해지는 3개의 종합세트 비유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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