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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 Newsletter 7호, 2007년 5월

Posted By admin On October 25, 2008 @ 19:50 In Newsletter | No Comments

인사의 글

저는 현재 한국에 있습니다. 서울 외국인학교를 졸업하는 아들 졸업식에 참여하고 대천에 있는 외국인 수양관에서 지내며 지난 1년동안 진행되었던 치아교정 치료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17일 졸업식 후 급히 오느라 이번 호에 실고자 하였던 한인 졸업자 사진을 실지 못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첫번째 졸업식인 이 날 2명의 목회상담 Th.D., 2명의 D.Min, 1명의 Th.M., 그리고 4명의 M.Div. 한인 졸업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확한 명단과 사진을 다음 호에 실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저의 가족은 7월 12일 서울을 떠나서 L.A.에 들려 21일 애틀랜타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7월 28일서부터 Panama City, Florida에서 시작하는 KPC 연례 가족 수련회에 온가족이 참여하기로 등록하였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고 가족수련회에서 반가운 얼굴 뵙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한미목회실 뉴스레터 다음 호(7월)는 쉬게 되는지라 이번 호에는 6월자료와 함께 7월 설교자료를 미리 보내드립니다.

성서정과 6월(A)과 7월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1]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순종의 제사

사무엘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사울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자기 욕심만 채움을 꾸짖는 말이다. 겉모양만 번듯한 제사의 행위보다는 그 마음에 진실을 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심을 말한다. 여름의 문턱에 서서 만물의 성장함을 바라보는 6월을 맞이하여 ‘순종의 제사’를 주제로 다루었다. ‘찬미의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기를 설교한다(신11:13). 첫째 주일은 산상복음의 결론에 해당되는 반석 위에 세운집의 비유로 말씀에 순종함을 다루었고, 둘째 주일은 지시한 땅으로 떠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람의 이야기, 셋째 주일은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열두제자들의 모습, 넷째 주일은 죄와 사망을 죽음으로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주일은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다루고 있다. 순종과 제사를 견주어서 어느 한 쪽이 더 중요하다고 단정 지음 보다는 말씀의 순종과 준비된 제사가 둘 다 포함된 ‘순종의 제사’를 행동으로 보여준 이야기들을 이번 달 설교의 주제로 묶어 보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희생의 의미를 가진 제사(sacrifice)가 순종과 함께 한다면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6월 1일: 9번째 평주일

창6:9-22, 7:24, 8:14-19; 시46; 롬1:16-17:3, 22b-31; 마7:21-29

반석위에 세운 집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만세반석 되심을 본문은 전하고 있다. 매 주일마다 설교를 듣고 전하며 성경말씀에 반영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삶의 기초를 쌓아나간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인내와 믿음의 기초를 안내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신앙에 근거한 반석위의 집을 짓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본문은 마태가 전하는 산상복음의 종결부분으로서 예수님이 항상 가르치시는 옳은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이는 ‘주여 주여’ 부르짖는 종교성의 언어도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의 은사도 아니며, 선지자의 행위도 아니라고 단호히 결론을 내리시며 설교의 마무리를 장식하신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의 모습으로서 구약의 가르침과 같이 토라(Torah)에 기초한 순종의 삶을 반석위에 세운 집으로 비유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지혜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얻어진 경험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모습이지만 마태가 전하는 지혜의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순종하는 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이번 주일의 강조점은 진실을 선포함에 머무르지 않고 그 진실을 행동으로 실천함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에 있다. 전하시는 말씀을 위한 이미지 전달은 든든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와 대조하여 비추어진 그림이다. 비가 오고 물이 넘치며 바람이 불 때에 집의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짐이 그 차이를 드러냄을 가르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이 아는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판이하게 다름을 보고 사람들은 놀란다. 이 비유는 하나의 경고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에 옮기지 않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로서 그들은 기초가 든든하지 않은 집과 같이 멸망할 것임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의 희망의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있다. 본회퍼의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는 말과 같이 순종하여 그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드림이 인생의 지혜임을 알게 된다.

6월 8일: 10번째 평주일

창12:1-9; 시33:1-12; 롬4:13-25; 마9:9-13, 18-26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첫 번째 말씀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함께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전하신다. 그 땅은 아브람이 알고 있는 경계선의 범위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임을 말한다. 위험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공간이다.

이념의 유목민으로 방랑하는 현대인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삶의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만 의지하여 앞을 향하여 나아감을 전함이란 어떤 모습일까?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포 이민자들의 삶을 조명한 이민신학이 본문을 근거로 되풀이되어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경계선을 넘어 약속의 땅을 찾아감에 있다.

현대사회의 현주소인 글로벌 국제화시대에서 시간의 차이는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그리고 공간의 차이는 국경선이 무색할 정도로 비자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표준시간대이고 무엇이 우리의 표준경계선인가?

아브람은 그의 표준시간대를 하나님의 시간으로 맞추어 말씀에 순종하고 인간이 정한 경계선을 허물어간다. 아직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을 갖고 나아간다. 이것이 그의 일생에 어떠한 변화와 도전을 가져오는지 모르면서 집을 떠난 위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한 번으로 끝난 여행이 아닌 두 번씩이나 계속하여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삶의 방식과 리듬을 받아드려 만나는 사람들과 전쟁과 협상을 거듭하며 하나님만 의지하여 한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철저히 지킴으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삶이 평탄하지만은 아닌 것이 가나안에서의 가뭄, 애급에서 바로에게 받은 위협, 그리고 조카 롯과의 분쟁 및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비롯하여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하여 얻은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처럼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아가며 언제나 경계선을 건너는 모험의 삶을 이어나간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현대적 유목민의 모습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장소, 새로운 기회, 새로운 가능성에 이끌리어 믿음만을 갖고 순종하여 나아감을 말한다. 앞을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뛰어넘어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길을 여는 믿음을 이어간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선으로 이루어져있다. 분단된 조국의 남과 북을 가로막는 삼팔선을 비롯하여 국가적 경계선 및 언어적 한계를 비롯한 여러 모양의 장벽과 장해물이 널려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를 허물어주시고, 나누어지고 깨진 관계를 회복하시며, 사랑과 일치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신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또한 장벽을 허물며 경계선을 넘어서 이 세상에 사랑과 일치를 위하여 일하라고 이르시며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6월 15일: 11번째 평주일

창18:1-15 (21:1-7); 시116:1-2, 12-19; 롬5:1-8; 마9:35-10:8(9-23)

예수님은 더 이상 혼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신다. 그를 주인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제자들을 부르사 권능을 주시고 추수할 일군으로 세우신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심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며(마19:28)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시는 (6절) 그 명령과 일치한다. 이는 이방사람들을 복음에서 제외함이 아니요, 이스라엘에게 우선적 대우를 하심도 아니요, 오로지 전도의 유효한 순서를 가르치고 있다.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할 기회를 제공하심을 보며 사울에게 전하여진 ‘순종의 제사’를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본다. 마태에게 먼저 유대인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사도바울을 통하여 다시 강조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주님은 첫째 복음의 전파와 또한 치유의 사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명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이 두 가지, 즉 말씀과 치유의 실현을 선교적 사명으로 두고 있는데 교회도 복음의 말씀과 사회적 치유의 두 축을 중심으로 목회가 진행되고 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린하는 백성들을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보시고 민망히 여기심을 본문은 기록한다(9:36).

그러나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으로 받아드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문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고 있다. 이는 열 두 제자들에게만 한정된 사명이 아님을 시사한다. 특이한 점은 7절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받은 사명이 정하여진 장소가 아닌 하나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데 분명하게 ‘가면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하라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가르치시며(8절) 목적지가 중요함이 아니라 길을 가는 여정에서 외치며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며 치유함을 명하신다.

제자들에게 명하신 순종의 의미는 길을 ‘가면서’ 말씀을 전함에 있다. 목적의식을 갖고 도착하는 지정된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길을 떠난 여정에서 언제나 항상 순종의 모습을 보임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항목이다.

6월 22일: 12번째 평주일

창21:8-21; 시86:1-10, 16-17; 롬6:1b-11; 마10:24-39

죄와 사망을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김을 전하는 로마서 본문은 세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세례를 통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 세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책임이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자(5절), 즉 접붙인다는 뜻의 희랍어 σύμφυτοι는 질이 다른 두 나무가 접합하여 같은 질의 한 나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순종하여 그의 죽음을 본받고,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된다.

죄와 사망을 죽음과 부활로 이기신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에게도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신다. 이삭의 순종과 대칭되어 십자가를 몸소 지시고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순종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주님의 지체가 되는 교회의 순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죄에서 해방된 우리는 의의 종이 되어야 함을 본문에 이어 롬6:12-23절은 설명한다. 신앙 고백의 행위인 세례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새로운 출발을 시사한다. 결코 세례가 신앙의 수업을 졸업하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여정의 출발점이기에 그 목적을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순종과 헌신의 약속을 다짐함이 옳은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는다(8절). 기독교 성례전인 세례가 이러한 고백을 안내함에 있어서 과연 얼마나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가 돌아본다. 적은 양의 물을 머리에 적시는 예식의 세례에서는 죽음을 맛보기 힘들지만 흐르는 강물에 세 번 담그는 침례예식에서는 잘못하면 세례를 받다가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세례를 받음으로 죽을 수 도 있음을 고백함이 우리의 신앙인데 세례를 너무 쉬운 과정으로 그리고 축복으로만 포장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여본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함과 같이(9절)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지 하나님을 대하여서는 산자로 여김을 받을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11절). 그러므로 죽을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고 바울은 계속하여 전하고 있다.

6월 29일: 13번째 평주일

창22:1-14; 시13; 롬6:12-23; 마10:40-42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주저하며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리의 결심과 행동을 요구하고 계신다. 제자도의 길을 따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기독교인의 옷을 벗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의 삶을 사는 미지근한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위협적일 수도 있다.

아브라함에게도 두려움과 떨림의 위협적인 시험무대가 주어졌는데 이는 늦은 나이에 얻게 된 독자 이삭을 산에 올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인 것이었다. 그는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으로 삶을 살아온 신앙인이다. 그런데 순종의 마지막 시험은 제사를 올리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죽여서 바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심하게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성경에 또 있을까? 그러나 창세기 22장은 첫 장면인 1절에서부터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함이란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아브라함만 모르고 있지 우리는 이것이 오로지 시험의 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동을 학대하시는 잔혹하신 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고자 하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팔레스타인과 온 세계에 위협을 주는 테러범들이 폭탄을 등에 업고 자살행위를 함을 인정하여주는 본문이 아닌 것이다. 우리 몸과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들을 하나님은 결코 인정하시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아들과 그의 중심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침을 확인하고자 하신 것이다. 모든 상황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을 보면서 이삭이 제사를 위하여 지고 간 나무가 바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임을 알게 된다.

랍비전통에 의하면 모리아 산의 제단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장소의 초석으로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제단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제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역사의 현장이다. 아브라함이 치룬 시험의 핵심은 아버지나 남편의 역할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의 자세이다. 그는 이 시험을 훌륭히 통과한 것이다. 여기에서의 시험은 유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어떻게 사탄의 유혹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항상 핑계를 대며 주저하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신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자신의 모습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며 칭찬으로 제자도를 안내하신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고 풍성한 삶을 바라보지 못하는 제한된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의 비유

프랑스 떼제공동체는 그들의 수도원 내규를 정하여놓은 규례서를 “공동체의 비유(Parable of Community)”라고 이름한다. 이곳은 여러 인종과 교단의 차이를 뛰어넘어 연합하여 함께하는 아름다움을 비유의 모습으로 직접 실천하는 곳이다. 이 세상의 번민과 고통에 참여함이란 대화가 아니라 같이 기도하는 공동체가 됨을 선언한 떼제는 성육신된 생명의 교제를 위미하는 하나의 비유로서 새로운 영성공동체 모델을 세계교회에 안내하고 있다.

7월 평주일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비유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 우리는 은유에 가까운 멍에의 비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그리고 밭에 감춰진 보화의 비유 및 진주, 그물, 그리고 풀무를 사용한 천국의 모습을 설교하게 된다.

예수님의 비유는 분명한 목적의식과 의미전달을 전제로 한 가지의 구체적인 해석이 전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먼저 비유를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그 해석을 하여주심을 볼 때에 이야기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윤리적 가르침이 드러나는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비유의 해석은 여러 가지 모습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한 가지만의 해석이 아니라 비유는 다양한 풍유 즉 알레고리적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의 상반된 해석이 동시에 발생하는 흥미진진한 전달방식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비유설교는 설교자의 풍성하고도 상상력있는 해석을 요구하는 매체이다.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이 장마의 빗물과 함께 만물을 성장시키듯 비유를 설교하는 7월 한 달이 크고도 넘치는 은혜 안에서 놀라운 믿음 성장의 강단이 되기를 기도한다.

7월 6일: 14번째 평주일

창24:34-38, 42-29, 58-67; 시45:10-17; 롬7:15-25a; 마11:16-19, 25-3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29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30절). 쉽다는 말은 ‘친절하다’는 뜻으로 이 특수 제작되어 만들어진 멍에는 지어야 하는 어깨에 부담이 없기에 짐이 가벼워짐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명하신 우리의 짐을 감해주신다는 의미보다는 그 짐을 쉽고 가볍게 지을 수 있도록 그가 직접 만든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여기서 ‘배우라’ 말씀하심은 나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라는 그저 학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보고 배우며 따라하는 제자도를 말한다. ‘멍에’의 메타포는 새로운 면을 밝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직접 지고계심을 말한다. 보통 멍에는 2마리의 소가 끄는 목재로 만든 기계인데 혼자서 짐을 지지 않고 옆에서 함께 끌어주심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 혼자의 짐이 아닌 예수님께서 같이 끌어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벼울 수밖에 없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그의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김은 예수님과 같이 겸손함과 인자함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의 주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우리는 보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더 나은 멍에를 제공하신다. 그분은 그의 행동, 가르침, 그리고 그의 인자함으로 천국의 모습을 보이고 계신다. 마음이 무거운 자들에게 엄청나고도 놀라운 초청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 가족으로 부르시며 교회라는 지체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용기를 갖고 위험을 무릅쓰며 상상력의 날개를 펴서 주의 백성들을 품으라고 하신다. 멍에가 고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사명을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하는 일군에게 멍에는 짐이 아니다. 오히려 일을 잘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설교자는 현대사회에서 ‘멍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고 본문을 전하여야 한다. 나의 고집과 힘이 들어가지 않고 효과적으로 천국의 비밀을 증거할 수 있는 주님의 멍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는 멍에에는 학위, 직장, 가족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명히 주님의 멍에이어야 하고 또한 주님을 통하여 배우는 학습자가 되어야 함이 본문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이 엄청난 초청의 말씀은 그냥 듣기만 하는 청취자가 아니라 일을 행동에 옮기는 실천자의 모습으로서 이 특별한 멍에를 이미 메고 계신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도의 응답이다.

7월 13일: 15번째 평주일

창25:19-34; 시119:105-112; 롬8:1-11; 마13:1-9, 18-23

씨 뿌리는 자인 농부는 밭을 갈기도 전에 씨를 넓게 그리고 자유로이 흩어서 뿌린다. 그 중에는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말라서 죽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추수 때가 되면 풍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널리 뿌린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 농부라면 그렇게 귀중한 종자를 낭비하며 아무데나 뿌릴 수 있을까? 비유의 핵심은 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 뿌리는 농부의 모습에 있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모습을 비유한 천국의 비밀인 것이기 때문이다.

씨는 복음이다. 어느 한 곳에 모아서 모종하듯 조심스럽게 심는 모습이 아니라 아무데나 낭비하듯 멀리 던지고 뿌리는 복음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모습이다. 1세기 갈릴리 농부에게 좋은 추수라 함은 뿌린 씨의 10배를 거둠을 말한다. 보통의 추수는 약 7배를 거둔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의 모습은 평상시의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어 널리 그리고 멀리 선포되어 백배, 육십배, 혹 삼십배로 거두어지는 신비의 모습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특별하게도 비유의 해석을 첨부하고 있다. 그 해석이 씨가 떨어진 땅의 4가지 종류에 집중하고 있기에 흔히 복음을 청취하는 자들의 마음 밭을 조명하는데 오늘은 그 초점을 오히려 씨를 뿌린 농부에게 맞추어보길 원한다. 이는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의 모습이다.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은 씨앗 하나하나를 아끼시지 않으시고 무작위로 여러 곳에 던지신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위, 그리고 좋은 땅 모두에 뿌리심을 예수님은 선포하시며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엄청난 열매의 힘, 즉 천국의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만이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만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열매 맺는 모습을 그린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는 정하여진 사람들에게만 전하는 말씀이 아닌 길, 돌, 가시와 같이 마음이 닫힌 사람들도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임하신다. 교회는 선택된 엘리트 집단만 훈련하는 곳이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열려있는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그 엄청난 비밀을 씨 뿌리는 농부의 손길을 통하여 보여주신다.

7월 20일: 16번째 평주일

창28:10-19a; 시139:1-12, 23-24; 롬8:12-25; 마13:24-30, 36-43

가라지의 비유는 알곡과 비교되어 소개되지만 여기서의 초점도 역시 농부의 인내심에 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30절) 어쩌면 예수님은 생각하시길 우리 인간들에게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여 떼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계신지 모르겠다. 가라지 같은 알곡도 있고 알곡 같은 가라지도 있기에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서로 참으며 인내를 키워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번 설교는 은혜의 비유설교가 될 수 있다. 또한 비유가 허락하는 이야기의 반전으로 인내를 갖고 보는 시각에서 가라지가 알곡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구별된 삶이란 무엇일까? 성도의 삶이란 거룩한 삶을 사는 구별된 사람이기 이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거룩함이란 세상과 분리됨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안고 열매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을 말한다. 바로 세리인 마태가 이 반열에 속하고, 창녀인 라합, 그리고 키 작은 삭개오가 이 목록에 올라 성서를 통하여 그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아주 평범한 날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또한 평주일의 단조로움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통하여 귀중하고도 구별된 날로 변화될 수 있음을 말한다. ‘성도’의 의미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내용과 같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다. 교회에 처음 방문한 ‘000성도님’의 개념이 아니라 철저히 헌신하기를 다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 “나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러므로 어느 한 개인 개인이 아닌 교회 전체가 성도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자들일 뿐이다.

그 안에는 준비되지 못하고 자격이 없는 부족한 자들도 그 반열에 같이 설 수 있음을 본문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에는 철저히 나뉘어져 풀무에 던져 불로 소멸됨을 경고하신다. 이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해석이다.

7월 27일: 17번째 평주일

창29:15-28; 시105:1-11, 45b; 롬8:26-39; 마13:31-33, 44-52

예수님의 비유시리즈는 본문에서 회중을 대상으로 하는 2개의 비유와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로 나눠진다. 첫 번째 묶음은 하나님의 사역이고 두 번째 묶음은 인간의 응답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세상과 함께하는 교회성장의 모델이 아니고 겨자씨와 같이 작아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누룩과 같이 반죽에 섞여 숨겨져 있다가 하나님의 시간에 커지는 이미지를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미래지향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부풀어지며 우리에게 소리 없이 다가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1절의 내용과 같이 모든 비유들이 천국의 ‘비밀’을 엿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진주 목걸이의 진주와 같이 겨자씨, 누룩, 보물, 진주 등 연속으로 진행되는 ‘천국비밀’ 비유시리즈를 다음과 같이 마치신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52절) 잘생기고 부유하게 보이는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들고 있는 가방에서 귀중한 물건들을 꺼내어 놓는 그림을 상상하여 본다. 물건 중에는 오래된 진품 명품도 있고 신세대 IT상품도 있다. 예수님이 말하시는 ‘제자됨’은 천국의 보물들, 옛것과 새것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보물을 소개함을 말한다. 주일마다 전하는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은 어떤 보물을 보게 되는가? 가장 많은 반응은 설교를 통하여 미처 알지 못하던 시각을 보게 될 때에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오래되고 익숙한 기독교 정신이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설교의 매력을 느낀다.

설교자는 그 기쁨을 알고 있다. 탕자의 비유를 설교할 때에 익숙한 내용이기에 기대감은 떨어지지만 설교자의 안내로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게 되면 미처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면서 그 기쁨은 더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옛것의 기쁨도 엄청나다. 익숙함에 젖어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닌 몸과 가슴으로 확인하는 옛것의 새로운 발견은 보물과 같이 귀중한 체험인 것이다.

새 시대에 새로움만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은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옛것을 기억하며 오늘의 시공간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이 발견하고자 몸부림치며 안내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쁨의 몸짓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실 때 그들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며 잃은 양을 찾고, 비밀히 성장하는 씨앗, 혹은 밭에 숨기어진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들의 비유를 접하며 그들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아내시는 주님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옛것과 새것이 어우러지며 익숙함과 낯설음이 혼합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시공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것과 옛것을 동시에 사용하시며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 명하신다. 지금의 이 세상을 말하신다. 또한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옛것에서 새것을 찾으신 다거나, 새것에서 옛것을 찾으심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를 함께 소개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우리는 역사속의 지혜를 구하고 성서의 해석을 추구하며 찬송가 그리고 경배와 찬양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고백을 귀담아 듣는다. 그리고 오늘 일어난 뉴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듣고자 노력한다. 지금 역사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이야기를 옛것과 새것의 모습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중에는 옛것에 익숙하거나 새것에 익숙한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하며 분열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귀중한 보배임을 고백한다. 옛것의 전통과 익숙함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줌과 동시에 새것의 갱신과 신선함이 섬기는 목적과 내일의 방향성을 힘 있게 안내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두 가지 보물의 은혜를 찬양을 통하여 누리고 또한 주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믿음의 옛 선조들을 통하여 과거의 은사와 구원을 감사할 수 있고, 새것을 통하여 신선한 시각과 비전을 허락하신다. 이러한 은혜가 오늘의 삶을 인도하여 주신다.

상황설교 “씨급 인생” 마태복음 13:31-35

“C급 인생”은 A급인생과 비교되게 모자라고 떨어짐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지라 항상 학생들에게 주어야하는 성적과 씨름을 합니다. 신학교의 대학원과정에서는 학부과정과 달리 C를 받으면 낙제점수와 같습니다. 적어도 B는 주어야하는데 C는 주는 사람도 불편하고 받는 사람도 불쾌합니다. 경쟁사회인 요즘 C는 F와 같이 낙제점수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C급은 삼류인생과 같이 취급당합니다.

누가 삼류인생을 좋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못나고 가진 것 없고 부족하기만 한 삼류가 하나님의 은혜로 쑥쑥 성장하여 일류가 되는 것이 복음의 진리이고 하나님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윗왕도 그가 왕이 되기 전에 형제 중 가장 작은 자로서 삼류, 즉 C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하나의 작은 겨자씨로 사용하시사 한 나라의 왕이 되는 A급 재목으로 삼으시고 훈련시키시며 크게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갈릴리 어부들과 같이 삼류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되어 A급 인물로 거듭나고 성장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생역전 혹은 반전의 로또와 같은 성공사례가 아니라 아무리 작은 자라도 크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함에 있습니다. 그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C급 인생이 변화되고 성장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류가 되는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시되고, 드러나며, 또한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이 그 비밀의 소유를 위하여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고 소유를 다 팔아 하나님 마음의 그 밭을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오히려 A급이라고 교만하기보다 C급임을 자처하여 겸손히 섬길 때에 겨자씨로 사용하시고 크게 하시며 많은 사람을 돌보는 안식처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께 ‘씨급 인생’을 소개합니다. 이는 ABC의 ‘C’급이 아닙니다. 씨앗 할 때 쓰는 우리말 ‘씨’를 말합니다. 씨앗은 영어로 말해도 씨드(Seed)라고 우리말과 영어발음이 거의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C급 인생이 아닌 씨급 인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무도 본인이 ABC의 ‘C급 인생’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씨를 소개하며 ‘씨급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겨자씨 한 알입니다. 이는 모든 씨 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13:32)고 하십니다.

만물이 성장하는 한 여름에 본문은 하나의 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로 유명한 겨자씨입니다. 겨자씨는 나물과에 속합니다. 결코 나무의 종류가 아닙니다. 매년 자라서 그 해에 죽는 일년생 식물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씨가 자라서 밭에 심은 모든 식물보다 더 크게 성장하여 나무처럼 그늘을 만들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안식을 취한다고 천국의 모습을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여름 옥수수 키가 쑥쑥 커지고 모든 식물이 한창 커지는 때에 가장 적합한 실물 교육인 것 같습니다.

‘씨급 인생’은 이와 같이 작은 자가 몰라보게 커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 씨급 인생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씨가 귀중한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린 자에 있습니다. 바로 씨를 뿌리는 농부의 손에 그 씨의 행방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농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자기 밭에 씨를 뿌릴 때에 풍성히 뿌린다는 것입니다. 이 농부는 아주 특별한 농부입니다. 세상에 어느 농부가 이처럼 한답니까? 얼마 전만 해도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유가상승에 농사를 짓는 분들이 트랙터 경운기 사용도 부담이 되고 비료 및 사료값 상승에 신경 쓰여 농사도 제대로 맘 놓고 못하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 농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한 농부는 씨를 뿌립니다. 이곳저곳에 뿌립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함에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농약도 치지 않습니다. 논두렁을 손질하거나 돌보지도 않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와 같이 그냥 자라게 놓아둡니다. 무엇이 잡초이고 무엇이 곡식인지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봅니다. 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분명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가려내겠다고 합니다. 오로지 뿌린 씨가 뿌리 내리고 크게 성장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아름다운 농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가르치시면서 계속하여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도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특이한 사항은 ‘가루 서 말’이라고 구체적인 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밀가루가 서 말이면 약 22kg으로 100여명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그냥 집에서 손님을 초대하여 먹는 식사개념이 아닙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양을 기록함은 잔치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식사가 아니지요. 한 여인의 부엌에서 만들어내는 식사치고는 엄청난 양 아닙니까? 바로 천국잔치의 모습입니다. 메시아를 모신 향연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개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갑자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인생이라고 생각하시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귀하게 쓰임 받는 모습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 갑자기 일어나는 일입니다. 감추어진 누룩이 부풀려지듯 그리고 미세한 겨자씨가 한 여름에 나무가 되듯 갑자기 바뀌는 상황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씨급 인생’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일등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겨자씨와 누룩입니다. 그런데 씨는 땅과 하나 되고 누룩은 밀가루와 하나 되어 크게 성장합니다. 옛것과 새것이 만납니다. 화학작용이 일어나듯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더 이상 삼류가 아닌 일등시민으로 바뀌는 ‘씨’급 인생이 여러분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오직 하나님 손안에 쥐어지는 은혜가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Article printed from Korean American Ministries: http://webka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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