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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 Newsletter 4호 2008년 2월
Posted By admin On October 25, 2008 @ 19:43 In Newsletter | No Comments
콜롬비아 한인 신학생들: 이조앤나, 이송희, David Park, Myung Kim, Daniel Seo (왼쪽부터)
Not Pictured: Jae Cho, 임승철, Sharon Junn, 김재홍, Andrew Kim, Teddy Son, Enoch Chang (이상 M.Div. only)


애틀랜타 지역 미국장로교 한인목회자들 - 한석원, 조현성, 허정갑, 김삼영, 장봉, 장인식, 권영갑, 최병호, 전영철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인사의 글
이번 달은 콜롬비아 한인신학생들과 지역교회 한인목회자들의 사진을 올립니다.
목회를 위하여 학업으로 준비하는 학생들과 목회현장에서 수고하시는 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나누며 사귈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학생들과는 2월12일 신학교채플을 함께 인도하였고 목회자들과는 2월 18일 콜롬부스와 알라바마지역을 방문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수 많은 분들을 새롭게 만나고 오래 끊어졌던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미목회실을 통하여 펼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기대하며 감사하는 벅찬 시간들입니다.
특별히 2월 10일 주일은 중앙장로교회(장봉목사)를 방문하여 주일예배 설교와 제직수련회를 인도하며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새시대 목회자 모임에서 2월4-6일 ‘창조과학탐사여행’을 주관하여 초청하였으나 수업이 시작되는지라 아내인 정경희사모가 저를 대신하여 참석하여 여러 한인교회 목사님/사모님들과 함께 교제와 소식을 나눌 수 있어서 또한 감사드립니다. ‘그랜드캐년’을 기대하고 갔는데 ‘데쓰벨리’만 보게되었다고 소개하여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하나님 창조의 모습을 보며 기대이상의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저 또한 예배학을 가르치는 교수의 직무만 생각하였는데 한미목회실의 책임이 주어지며 생각지 못하였던 여러분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기대이상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벅찬 가슴으로 맞이합니다.
허정갑목사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예배학교수 및 한미목회실 소장
장로교 신학대학원 중창단 방문
2월 20일 오전 10시 수요일 Forum시간에 주승중교수의 인도로 장로교 신학대학원 중창단 16명이 콜롬비아를 방문합니다. 30분 동안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 한미목회실을 신학교 컴뮤니티에 처음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면 참석하셔서 같이 축하하여 주시고 한인 재학생들과 점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부활철야
고난주간의 마지막 날인 토요일 3월 22일 저녁시간에 학교교정에서 부활철야를 인도할 계획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부활절 새벽예배를 드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작년 부활절에도 시청앞에서 한기총과 KNCC 교회연합으로 부활절예배를 극적으로 드렸는데 예전은 주승중교수(장로교신학대학원)의 안내로 교회가 전통으로 드리던 부활철야예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1. 불의 예전 2.말씀의 예전 3. 물의 예전 4. 성만찬감사의 예전으로 진행되는데 금년은 고난주간이 방학이 아니라 Reading Week인지라 학생들이 교정에 남아있음을 참작하여 본인이 속한 예배위원회에서 철야예배의 가능성을 모색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학교와 인근교회 및 지역주민이 함께하는 예배를 준비 의논중이오니 가족들과 함께 참석하시기를 초대합니다.
성서정과 3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어둠에서 빛으로/사망에서 부활로
3월 2일: 사순절 4번째 주일
삼상16:1-13; 시23; 엡5:8-14; 요9:1-41
그리스도인은 주님안의 빛이다. 빛의 자녀로서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도,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빛의 존재를 드러내는 역할을 감당한다. 오늘의 본문은 초대교회의 세례교육과 세례식에 사용된 설교 및 가르침의 내용이다. 우리를 기독교 입문으로 안내하는 세례예식은 마치 어둠에서 빛으로 움직이는 동적인 행동의 변화를 서신서는 전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빛으로서 제자도의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더 이상 숨길 수도 또한 숨을 수도 없는 모습이다. 이는 예수님이 비추시는 빛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함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빛을 비추어야하는 사명을 말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요 빛이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에게 빛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빛이 전달됨이란 스스로 빛이 발광됨보다는 빛이 여과 없이 통과되는 모습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빛이 있음을 보고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빛을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초대교회가 누군가에게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인으로 맞이할 때에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라”(마5:16)를 말하며 초를 선물로 줌과 같이 세례는 빛에 거하는 삶으로의 시작인 것이다.
오늘의 복음서 본문 또한 예수님이 시각 장애인에게 눈을 뜨게 하신 사건을 다룬다. 그는 암흑의 세계에서 눈을 뜨고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된다. 서신서와 복음서를 함께 보면 세례를 통하여 다가오신 그리스도의 세계는 엄청난 변화와 새로운 가치관으로 전개됨을 볼 수 있다. 목회자로서 보는 새로운 세계의 가치관이 있다. 교회생활이 매주 단순히 되풀이 되는 일상의 모습처럼 보이면서도 매주 우리를 새롭게 하시며 새로운 다짐과 은혜로 새로운 시작을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사모한다.
3월 9일: 사순절 5번째 주일
스37:1-14; 시130; 롬8:6-11; 요11:1-45
고난주간 전주일은 나사로주일로서 나사로의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한다. 나사로는 부활하였어도 다시 죽게 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로서 나사로의 부활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클라이맥스인 나사로의 부활을 보면 나사로는 그의 몸을 싼 수건을 스스로 벗지 못하고 나오지만 예수님은 요20:7에 기록된바 머리를 싼 수건이 한곳에 잘 개여 놓여짐을 비교하고 있다.
사건의 전개와 함께 두드러진 인물은 베다니의 3남매, 즉 죽은 나사로, 마리아, 그리고 마르다이다. 먼저 마르다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신학적 논쟁을 묘사한 내용을 접하게 된다. 확신에 찬 믿음을 표현하는 마르다는 다른 유대인들이 믿는것처럼 마지막 날의 부활을 고백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지금의 부활을 강조하시고 마르다는 11장 초반에 등장하는 우스광스러운 제자들보다 한수 위의 신앙고백을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줄 내가 믿나이다.” 그동안 본인의 정체를 숨기신 예수님이 비밀을 밝히시자 마르다는 오빠의 죽음이 가져온 생사의 현장에서 즉각적인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그녀의 대답은 분명하고도 완전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마르다와 진행된 지적인 대화의 절정은 마리아와의 감성적인 교류를 통하여 또 다른 차원을 이룬다. 이는 마리아의 간단하고도 솔직한 감정표현이 울음으로 이어지고, 함께 온 유대인들이 같이 울자 예수님도 통분하시며 불쌍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심으로 대응하신다. 마르다의 신실함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결과가 있었다면 마리아의 솔직한 절망이 예수님의 인간성을 부각시키며 나사로의 부활로 이어진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마르다와 예수님의 대화가 다시 한 번 이어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죽은 자를 불러 나오게 하신다.
본문에서 두 자매가 죽음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르지만 예수님은 함께 하시며 위로하시고 살아서 믿는 약속으로 영생을 안내하시며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신다.
3월 16일: 고난/종려 주일
종려: 마21:1-11; 시118:1-2, 19-29
고난: 사50:4-9a; 시31:9-16; 빌2:5-11; 마26:14-27:66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매우 길다. 고난/종려 주일은 예배를 둘로 나누어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예배를 드리거나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성전 문 앞에서 종려에 관한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본문을 읽고 찬양하며 본당에 같이 들어갈 수 있다. 고난의 긴 본문 또한 혼자서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도자가 나누어서 읽거나 혹은 파트를 나누어 해설자 함께 본문을 드라마틱하게 봉독함이 마땅하다.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마쳐야 한다면 설교가 생략될 수 있는 주일예배이기도 하다. 회중이 함께 본문을 잘 읽고 잘 듣는다면 설교가 전하는 것보다 더 큰 은혜의 경험을 할 수 있음을 확신한다.
종려의 환호를 시작으로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 부활의 ‘알렐루야’ 환송으로 이어지는 고난/종려주일의 한 주간은 감정의 높낮이를 모두 경험하는 매우 특별한 교회력이다. 이 한주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모두 표현하고 또한 창조와 구원을 지키는 교회력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기간이다.
이처럼 교회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고난주일을 여는 본문에서 시몬 베드로는 우리와 같이 연약하고 쉽게 변하는 모습이 매우 인간적임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수제자임을 자처하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여지없이 그는 시험을 낙제한다. 그를 알아보는 여자아이의 지적에 놀라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씩이나 부인한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영웅이 아닌 아주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냄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을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의 현실을 실감한다. 오히려 이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원동력인것 같다.
지난 사순절 기간동안 되풀이하여 우리의 죄인됨을 고백하였다. 오늘도 베드로와 함께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한다. 용감하게 말 하여야 할 때 침묵함을 고백하며, 그리고 일어서서 빛을 발하여야 할 때 몸을 숙이고 어둠에 의지함을 고백하며 주님께 용서를 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사 용서하시고 이 특별하고도 거룩한 주간에 풍성한 은혜로 이끄시기를 기도드린다.
3월 23일: 부활 주일
행10:34-43; 시118:1-2, 14-24; 골3:1-4; 마28:1-10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태는 부활의 사건을 온 땅이 흔들리는 지진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누가는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한 두 제자의 저녁식사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가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땅이 흔들리고, 지키던 자들이 죽은 자와 같아지며, 돌문이 열려 천사가 그 위에 앉아있음을 이야기한다.
마태는 부활의 아침은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은 지진의 사건이었음을 강조한다. 여러분은 부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부활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부활이 우리를 설명할 뿐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하였고 또한 기다리지도 못한 부활이다. 그러나 본대로 들은 대로 증언을 할 따름이다. 모든 사물은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법칙의 원리대로 움직이지만 부활의 자녀들은 놀라움을 경험한다. 부활절은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그 본질의 모습을 회복하심이다. 철학자가 이야기하는 영혼의 불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이요, 누가 주권자임을 밝히시는 승리의 선포이다.
분명하진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한 천사가 마태복음 1장 8-25절에 등장한 천사와 같은 천사라면 처녀를 잉태하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권능과 대칭되어 볼 수 있다. 생명을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은 지진의 충격과 같이 우리에게 갑자기 그리고 엄청난 사건으로 다가온다.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먼저 오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를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군인들과 유대법정의 계획적인 형벌을 받으신 예수님을 어둠에서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이끄시며 천지를 뒤흔드는 지각의 변동을 일으키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처형한 유대인들과 배반한 제자들을 복수하고자 함이 아니라 용서하시며 불쌍히 여기신다. 또 하나의 지각변동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떡과 잔을 나누시고 또한 손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며 죽음이 아닌 생명의 세상을 펼치신다. 또 하나의 지각변동이다. 우리의 삶을 흔들어 주심은 계속하여 이어진다. 두려움을 주려고 지진을 일으키심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퍼하는 여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흔들어 주신다. 지진이 있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나가라고 우리의 본질을 흔들어 주신다. 이것이 부활이다!
3월 30일: 부활절 2번째 주일
행2:14a, 22-32; 시16; 베전1:3-9; 요20:19-31
부활절이 한 주일 지난 부활절 2번째 주일은 교인출석 및 참여도가 저조한 주일이다. 긴 사순절을 통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간절히 기다렸던 부활절이 지난지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 우리는 벌써 부활의 기쁨을 잊고 모든 일이 현실이 아닌 한밤의 꿈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부활이 진정으로 죽음을 이긴 것인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이 절망의 구렁텅이보다 더 깊은 것인가?
이러한 부활의 질문을 통하여 무엇이 믿음인가를 조명하여 본다. 의심 많은 도마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죽음을 이기신 능력에 놀라움을 느낀다. 그러나 2000년 전의 예수님이 아닌 오늘 우리에게 그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죽음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영생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지각의 변화를 가져오는 부활은 무엇인가? 오랜 습관과 예측된 사고방식의 인습적 모습이 아닌 죄에서 해방된 새로운 삶의 시작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셨다면 우리도 또한 새로운 생명을 맛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새로운 회심은 개인적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지성적, 윤리적, 그리고 공동체적 변화를 가져온다. 부활의 비밀은 이처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시며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죽음과 절망에서 생명과 기쁨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님만의 사건이 아니라 제자들, 그리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임하고 있다. 의심많은 도마가 부활한 예수님을 직접 만짐으로 변화됨과 같이 부활의 신비는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새로운 시작을 허락하신다. 풍성한 생명을 부활의 주님과 함께 하도록 초청하신다.
(상황설교)
오래된 이야기 가운데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이 사항이 본문의 도마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실상으로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 먹지 않고 믿는 믿음을 더욱 귀중히 여겨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함을 생각하여 그저 맹목적인 믿음으로 어쩌면 꼭 있어야할 의심한번 안 해보고 믿어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특히 지도자와 부모의 입장에 있는 우리들은 체험도 직접 안 해보고 그저 믿으라고 외치는 자리에 있지는 않았는가 반성해 봅니다. 차라리 도마처럼 내 눈으로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는 행동이 더 복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도마의 의심을 생각하면서 과연 확실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합니다.
하와이에서 직접 살아보신 분은 언젠가 방문을 하기위하여 지도를 펴놓고 하와이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하고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여행자는 하와이의 좋은 음식점과 좋은 여행지를 기억하며 다음의 여행을 위하여 준비하겠지만 오랜 기간 직접 살아온 사람에게는 하와이의 모든 사건이 관심의 대상입니다. 큰 폭풍이 섬을 급습한 소식을 듣게 되면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습니다. 마음을 함께 합니다. 몸은 떨어져 있으나 마음을 함께하는 확실한 믿음으로 고통에 참여합니다.
열두제자중의 하나인 도마는 솔직히 말합니다. “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 .” 우리 예수님과 가까우려면 솔직하고 정직하여야 함을 보게 됩니다. 바로 도마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개인의 간증을 전한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죄 중에서 구원하신 진정한 구세주이십니까?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예수님은 역사 속에서 고백하는 정말로 있었던 사실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만나실 원하고 우리의 삶속에서 체험하길 원하는 일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아프리카 케냐 마사이부족에 선교사로 들어간 빈센트 도나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마사이 부족언어로 “믿음”이란 단어를 번역하고자 노력하다가 고민 끝에 부족의 원로 추장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대화의 내용 중 믿음과 의심의 갈등을 이야기 하던 중 도나반 선교사가 사용하는 스와힐리어의 믿음이란 단어는 그들에게는 그리 좋은 말이 아니라고 추장은 지적하여 줍니다. 그들에게 사용된 “믿음”의 의미는 그저 “계약에 사용되는 동의하다”라는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도나반 선교사 또한 인정하며 마사이 부족이 표현하는 믿음은 무엇인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믿는다는 것은 마치 당신네들 백인 사냥꾼이 먼 거리에 서서 총을 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총을 겨냥하는 눈과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에 의지하여 위험을 눈앞에 두고 당당히 서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 아닐까요?” 마사이 원로 추장은 계속하여 이야기 합니다. 믿음이란 오히려 사자가 먹이를 노리며 달려드는 것과도 같습니다. 사자의 코와 귀가 먹이를 냄새 맡고 움직이는 동작을 듣는 즉시 먹이가 있는 곳으로 움직여 잡아냅니다. 발을 날쌔게 움직여 재빠르게 행동에 옮깁니다. 얼마나 빠른지 움직이는 모습을 거의 볼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그 모습이 어떤 것인지 보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양이의 모습에서 고양이가 어두운 곳에서 쥐를 잡는 모습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발을 뻗어서 자기의 발 앞으로 먹이를 끌어당겨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마사이 원로 추장은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보는 즉시 빠르게 행동으로 움직여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 믿음입니다. 도나반 선교사는 압도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추장의 지혜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런데 추장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이야기 합니다. 선교사님이 이곳에 오신 후에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우리를 찾아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당신이 이곳에 계시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선교사님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저희는 이일을 그동안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찾아오시고 우리를 그의 소유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자신이 사자인줄알고 있었지만 진짜 사자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사자와 같습니다. 우리를 그의 것으로 하기 위하여서 붙잡아 주십니다.
예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합니다, “나의 주여 나의 하나님!” 확실한 믿음 안에 거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Article printed from Korean American Ministries: http://webka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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