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M Newsletter 3호 2008년 1월


집에서 내려다본 뒤뜰에 소복이 내린 설경입니다.

새해인사

주위사람들에게 애틀랜타로 이사 간다고 말하니 한결같이 눈이 안 오는 따뜻한 곳으로 가게 되어 축하한다고 하더군요. 눈을 안보고 지낸다고 생각하니 좀 서운하였는데 웬걸 추위도 매섭지만 눈까지 내리니 애틀랜타도 분명한 4계절이 있음을 실감하였습니다. 애틀랜타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반나에서의 북미예전학회, 마리에타 베다니교회에서의 예배와 설교세미나, 그리고 이삿짐 및 자동차와 가구장만에 분주한 1달을 보내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학교 교수사택을 배정받아 700 Kirk Rd. Decatur에 정착하였습니다. 학교에서 모든 분들이 친절히 잘 안내하여 주셔서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는 작업을 무리없이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2월 4일부터 봄학기 수업을 시작합니다. M.Div.과정 필수과목인 예배와 설교 클라스를 4명의 교수와 함께 팀티칭을 하게 됩니다. 예배학교수 2명과 설교학교수 2명이 만들어가는 수업입니다.

조만간 여러분의 교회를 방문하고 싶습니다. 설교를 안하여도 좋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콜롬비아 한미목회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의 핸드폰 번호가 404-693-1375입니다. 678-705-2336 집 번호로 연락을 주셔도 좋습니다.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에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

허정갑목사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예배학교수 및 한미목회실 소장

장로교 신학대학원 중창단 방문

2월 20일 오전 10시 수요일 Forum시간에 주승중교수의 인도로 장로교 신학대학원 중창단 16명이 콜롬비아를 방문합니다. 30분 동안 음악회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시간에 한미목회실을 학교 컴뮤니티에 처음으로 소개하려 합니다. 시간이 허락하시면 참석하셔서 같이 축하하여 주시고 한인 재학생들과 점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서정과 2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사순절: 십자가의 길

2월 3일: 주님의 산상변모일

출24:12-18; 시2 혹은 시99; 벧후1:16-21; 마17:1-9

마태복음 16장 20절 이하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예고하셨고, 베드로는 이 말씀에 당황하여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로막으려고 하다가 주님께 큰 책망을 당한다. 이 일이 있은 지 엿새 후에 주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1절). 그리고 그들 앞에서 영광된 모습으로 변모되셨다. 그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고 그의 옷도 흰 빛을 내었다(2절). 뿐만 아니라 세 제자는 모세와 엘리야가 주님과 함께 말씀하는 것을 보았다(3절). 엿새 전에 주님께 큰 책망을 받은 베드로는 주님의 천상의 영광된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면서, 그곳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그곳에 장막을 세우겠다고 주님께 제안한다(4절). 이때에 밝은 구름이 이들을 덮었고 구름 속에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음성이 들렸다(5절). 이 음성을 들은 제자들은 두려워 땅에 엎드렸고(6절), 평상의 모습으로 돌아오신 주님께서 엎드린 이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들을 안심시키셨다(7절).

십자가의 길에 들어가기 전에 주님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아들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주님은 이미 하늘영광에 참여한 모세와 엘리야 사이에서 율법과 예언을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변모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을 예고하시고 그 길에 동의하지 않았던 제자들에게, 특별히 베드로에게, 주님은 십자가 후의 영광을 체험하게 하셨다.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황홀경 속에서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탄성을 지르며 거기에 집을 짓고 살자고 말하지만, 주님은 두려워 엎드린 그들을 안심시키시며 세 제자를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신다. 영광을 받기 전에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도 주님은 부활과 승리의 영광을 보장해 주신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주님의 영광은 참 위로와 소망이 된다. 우리도 우리의 소명을 충성스럽게 다하는 날, 하나님자녀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광을 사모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위하여 산 아래로 내려 가야한다.

2월 6일: 재의 수요일 (설날)

욜2:1-2, 12-17 혹은 사58:1-12; 시51:1-17; 고후5:20b-6:10; 마6:1-6, 16-21

십자가의 길은 속죄의 눈물로 시작한다. 울면 안 되는 현대사회적 요구에 익숙한 우리들 에게 본문은 속죄의 눈물을 흘리고, 금식하며, 애통하며,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하신다.

요엘서는 3장만 있는 짧은 책이지만 선지자는 심판과 구원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예언적 상상력으로 요엘 선지자는 야훼의 심판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심을 동시에 선포하고 있다. 이 상반된 메시지는 ‘여호와의 날’을 선포함에 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오길 호소하는 말씀의 초대는 재의 수요일 예배에서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선포’와 함께 재를 십자가 모양으로 이마에 바르는 예식으로 그 절정을 이루게 된다.

오늘 설 명절의 기쁨으로 모인 친지들과 수요예배 회중에게 전하기는 매우 무거운 말씀이지만 사순절의 시작을 나팔의 소리와 함께 세상과 차별이 다른 하나님의 세계를 알리는 경종이 될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서의 나팔의 경종은 전쟁의 준비를 알리는 신호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 열리는 ‘여호와의 날’이 시작됨을 알림이다. 이 날은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2절). 그러나 검은 재를 이마에 바르고 눈물로 회개함이 주님의 백성들을 겁주려고 하심이 아니라 소망을 주기 위하심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13절) 심판의 하나님께서는 또한 용서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심을 전하고 있다.

2월 10일: 사순절 1번째 주일

창2:15-17, 3:1-7; 시32; 롬5:12-19; 마4:1-11

십자가의 길은 광야의 길이다. 광야에는 유혹의 손길이 있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하는 여정 속에서 본문은 항상 사순절 첫째 주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을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회개의 시간을 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는 주님의 이야기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내용이 우리의 일상생활의 경험과는 거리가 있는데 이는 평상시 마귀와 직접 대화하지 않으며,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우리는 순식간에 옮겨 다니지 않는다. 더하여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주님에게만 특별히 적용된 특수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히브리서 4장 15절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는 내용을 생각하며 예수님께서 과연 먹을 것이 없어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가난한 자의 심정, 술과 마약에 중독된 사람, 사람이 그리운 이혼녀의 외로움, 그리고 집을 뛰쳐나가 탈선하는 십대의 모습을 얼마나 이해하고 계시는가 물어보게 된다.

본문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내용이 있다면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함이다. 우리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는 돈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남을 헤치는 무기를 구입하고 우리의 편리함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약소화 시키는 일을 한다. 아마도 절벽에서 떨어짐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안 풀리고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함을 포기하고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그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또한 우상숭배라고 드러내 놓고 우리를 시험하는 일은 흔치않은 일이다. 그러나 ‘문화’라는 모습으로 그리고 ‘경건’이라는 가면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며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로서 꼭 광야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의 삭막함을 비교하여 볼 때 우리는 1분 1초 한 호흡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함이 시험의 유혹을 이기는 강력한 처방전이라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광야에서의 시험은 마태복음 13장 1-23절의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와 연계하여 진행됨이다. 두 이야기에서 세 가지 시험이 공통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사탄의 3가지 유혹을 이기신 예수님의 모습은 성장의 열매를 보여준 좋은 땅의 모델로 비추어 시험을 모두 마친 자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2월 17일: 사순절 2번째 주일

창12:1-4a; 시121; 롬4:1-5, 13-17; 요3:1-17

십자가의 길은 상징으로 다가온다. 놋뱀과 십자가의 연결이 바리새인인 니고데모를 통하여 전개되는 본문의 내용이다. 이는 경건을 표현하는 성례전과 정반대의 모습인 우상의 관계성을 표현하는데 상징(symbol)이 동전양면의 뜻을 갖고 있듯이 놋뱀과 십자가는 가까우면서도 먼 관계의 신학적 해석을 내포한다.

기독교에서의 경건과 영성은 흔히 십자가로 표현되는데 오히려 기독교 십자가가 우상으로 간주되어 기피하는 모습도 또한 보게 된다. 우상과 성물은 먼 것 같으면서도 아주 가까운 것이다. 출애굽시 모세는 놋뱀을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출21:8)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대에 매달은 놋뱀을 두고두고 봄으로써 그들의 죄를 기억했다. 이는 구원의 상징이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한 이스라엘인들은 구원의 감격 속에 하나님을 모시는 경건한 마음으로 놋뱀을 잘 보관하였으며 시간이 감에 따라 우상숭배의 성격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를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되어갔다. 그것이 히스기야왕 시대에 가서 개혁이 일어나 놋뱀을 부수어 놋뱀제단 앞에서 향을 피우던 모습은 사라지었다(2왕18:4).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개혁당의 본체인 바리새인파에 속한 니고데모에게 그 놋뱀을 다시 들추시사 모세의 놋뱀이 들린 것과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함을 말씀하신다(14절). 예수님은 하나님 구원의 모습을 놋뱀으로 재현해 보이신다. 이것이 성례전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표출이요 재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성례와 우상의 그 멀고도 가까운 관계성을 보게 된다. 똑같은 것을 놓고 누구에게는 성례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우상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성례는 거룩하게 구별된 것으로 살아 계신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지정된 성례전이 잘못 사용되어져 그 자체가 본질이 될 때에 우리는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한다.

사순절과 같은 교회력이 누구에게는 신앙의 도움이 되고 누구에게는 오히려 형식의 빈 틀로만 전해짐은 바로 십자가의 상징적 요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우리 앞에 평범하게 놓여있다. 그러나 그 길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에게 놋뱀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의 발을 물어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또한 그를 바라보는 우리를 치유하신다. 이것이 상징으로 표현되는 십자가의 길이다.

2월 24일: 사순절 3번째 주일

출17:1-7; 시95; 롬5:1-11; 요4:5-42

십자가의 길은 우리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넘는 여정이다. 우리 사회의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의 표본으로 본문은 수가라 하는 동네의 사마리아 여인이 겪는 종교적 차별, 인종의 차별, 성의 차별, 그리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이른 시간에 물을 길지 못하는 말 못할 사정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경계선을 뛰어넘어 백주대낮에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로막힌 경계선을 넘어 영생의 물, 그리고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가르치신다. 이 보잘것없는 여인을 제자로 대하시며 마주앉아 친히 대화하신다.

예수님은 23절과 24절에서 여인에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을 전하시는데 불과 화로와 같이 예배에서 경험되는 전통과 변화의 조화는 가능한가? 교회의 예배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 것인가? 예배의 중요성은 하나님 백성의 적극적인 참여에 달려있다. 예배는 한 개인이 은혜를 받는데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에 속하여서 행동적인 표현으로 받은 은혜를 나누고 감사함에 있다. 그러기에 익숙하고도 편안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생소하지만 새로운 노래와 새로운 몸짓을 배우며 하나님 백성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서로를 받아드리며 화해의 표시를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예배는 긴장의 연속을 경험할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예배에 있어서 형식과 자유 사이에서 어떤 긴장을 경험한다. 한국교회 예배의 새로운 모델은 화해(Reconciliation)에 있다고 본다. 이것은 입체적 예배가 지향하는 방향성이다. 미국에서 이민교회 목회를 경험한 필자로서는 한인교포들이 1세와 2세의 나누어진 두 언어와 두 문화 속에서 한 지붕 밑에 두 교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처럼 전통과 변화의 두 갈림길에 있는 상황에서 먼저 해결하여야 할 숙제는 1세와 2세간의 수평적 화해이다. 또한 이루어야할 화해의 대상은 얼마든지 있다. 남과 북의 민족갈등, 성의 차별, 한흑관계, 다민족간의 편견과 갈등, 지역감정, 교단분리,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및 자연생태계와의 화해 등으로 그 목록은 계속된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구하여야 하는데 지금 현재 하나님께 각자 따로 부르짖고 있는 것이 오늘 현대교회의 현실이다.

서로 다른 예배신학이기에 교파와 교단은 지금껏 나뉘어져서 서로 화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신학이 비록 같지 않더라도 성만찬과 세례를 비롯한 예전을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21세기를 향한 예배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과 그리고 먼저간 신앙선배들과 함께 ‘성도가 교통함’을 믿는 것이 바로 코이노니아/컴뮤니언 즉 성만찬예전으로서 이는 전통과 변화를 수용하는 모든 예배의 시작이요 십자가의 길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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