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orean American Ministries - http://webkam.org -

KAM Newsletter 10호, 2008년 10월

Posted By admin On October 25, 2008 @ 19:53 In Newsletter | No Comments


인사의 글

한미목회실에서 콜롬비아 평생교육원의 한 프로그램으로 9월 22일서부터 지역교회 안수집사*장로 제직 리더십 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월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10주간 베다니장로교회, 조지아 한인교회, 한빛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교수진과 애틀랜타 지역교회 목사님들을 강사로 짜여지고 12월초에 신학교에서 주는 수료증을 졸업식과 함께 수여할 계획입니다.

현재 총 43명의 인원이 등록되어있으며 2009년 봄학기에도 계속교육이 진행되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많은 교회와 제직들이 계속참여하는 알찬 교육이 되어지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아울러 한미목회실의 첫 공식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게 애써주시고 도와주신 애틀랜타 지역 장로교회와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저녁은 노량진교회 강신원목사님(전 시카고 한미교회 담임)께서 오셔서 한인학생들이 인도하는 예배의 설교를 하십니다. 이미 지난 학기에 졸업한 Christopher Hobson이라는 미국학생이 한국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며 주말에는 노량진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지라 콜롬비아 신학생들의 관심과 기대속에 오십니다. 앞으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이러한 교류와 기회가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학교에서는 이번 학기 가르치는 예배와 음악수업과목과 함께 평생교육원 소위원회 위원장의 역할을 맞게되었고 8월에 있을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모일 예정입니다. 또한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사물놀이 팀과 현악4중주가 생겨졌으며 매일 새벽기도회 및 수요 저녁예배등 활발한 기도모임들이 학교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총회 출판위원회와 예배신학위원회가 추진하는 2012년 발행예정인 미국 장로교 찬송가 위원회에 위촉되어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혼자서 할 수 없음을 옆에서 보던 아내가 자원하여 한미목회실의 일을 도와주게 나서게 됨이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을 통하여 하루 하루 한미목회실의 사명과 하여야 할 일들이 드러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음 달에는 그동안 준비하였던 영문학술지 출판의 소식을 전하여 드리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10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료와 참고문헌은 [1]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주님의 계명

10월 한 달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설교함을 계획한다.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산상복음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예수님의 계명을 조명하며 출애굽기의 십계명 중 제1, 제2, 그리고 제4계명에 집중한다. 또한 율법사들과의 논쟁에서 사랑의 새 계명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의 계명을 강조하는 연속 주제설교(lectio continua)를 실천한다.

10월 5일: 27번째 평주일

출20:1-4, 7-9, 12-20; 시19; 빌3:4b-14; 마21:33-46

십계명 중에서 제4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루어본다.

하나님의 계명이 전해졌을 때, 안식일의 계명은 가장 길고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사항이었다.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와 있는 두 곳의 십계명 본문(출애굽기20:8-11과 신명기5장12-15)에서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서로 다른 형태로써 나타난다. 두 곳 모두 같은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즉,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명을 지켜야 하는 서로 다른 이유를 말하고 있다. 두 가지 이유 모두 인간을 향한 하나님 관계의 근본적인 진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출애굽기(20:8-11)에서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창조이야기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들이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모형은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간다. 하나님께서 쉬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도 하루를 쉬어야 한다. 일과 쉼 사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 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들은 이 계명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배한다.

반면 신명기(5:12-15)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노예의 신분에서 막 풀려난 사람들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예들은 하루도 쉴 수가 없다. 쉼은 자유인들만 가능한 것이다. 일곱 번째 날이 되어 일을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이 노예의 신분에서 그들을 구하였음을 기억하고, 그들의 땅에서는 아무도, 심지어 기르는 가축까지도 휴식 없이는 일을 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고된 노예 생활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되풀이하여 증거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견해로 나타나는 안식일의 계명은 히브리 성경의 창조와 출애굽, 하나님 형상 속의 인간, 그리고 사로잡힘에서 해방된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와 신앙을 요약하고 있다. 이 두 본문 속에서 하나는 거룩함을 이야기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체를 유대교 율법인 토라의 유형을 통하여 보여 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개념과 함께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세 번째로 더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는 이전과 달리 변화되어 이제부터 거룩한 날은 제7일이 아니라 제8일이며, 창조, 해방, 그리고 부활의 세 가지 안식일의 의미가 주의 만찬을 중심으로 천국잔치의 종말론적 신학으로 이어진다.

27번째 평주일 설교실제 도로시 배스, “좋은 안식일은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일상을 통한 믿음혁명』허정갑 옮김 (예영출판사, 2004)을 편역하여 상황설교로 정리함.

우리는 유한한 인간으로서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복잡한 소용돌이와 같은 현대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루를 떼어 쉬면서 예배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이에게 평화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개념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안식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안식일이 오면 상업은 멈추고, 잔치가 벌어지며,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같이 놀 수 있는데 세상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동시에 한 주에 일하는 신성한 노동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식일의 훈련은 유대교의 중심적 사상에서 시작되며, 조금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만끽하기 위해서, 먼저 부정적인 선입견들을 버려야 합니다. 안식일은 규칙이나 제한된 모습이 아닙니다. 흔히 가톨릭에서는 지켜야할 의무로, 개신교에서는 어린이들이 놀지 못하는 날쯤으로 다루고 있지만 안식일은 성경의 창조와 출애굽, 부활에 맞추어 그 의미가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형식은 엿새는 일하고 하루는 쉰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과 기독인들의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는 제 칠일을 등장으로 최고조에 이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휴식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이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선포하시는 모습입니다. 쉰다는 것은 만들어 놓은 것들을 즐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더 낳은 세상이나 인간보다 더 훌륭한 피조물을 계속 만드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유대교의 심장입니다. 신앙에서 멀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자 할 때 랍비들이 한 목소리로 안식일(샤밧)을 지키자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운 역경 속에서도 그들의 주체성을 유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이 가져다주는 유대인으로서 삶과 리듬을 강조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전하여지는데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지켰노라”고 합니다.

샤밧은 금요일 저녁 해 질 때에 여주인이 안식일 초에 불을 붙임으로써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옷을 잘 차려입고 가장 좋은 식탁 장식과 음식을 준비하며 손님들을 환대합니다. 안식일의 예배에서는 전통적인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슬픔을 생략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달콤한 향을 먹여 평화의 안식일이 혀끝에 오래 머무르도록 합니다.

유대교 예배와 율법은 샤밧에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은 바로 노동입니다. 한 주간 내내 인간은 자연과 씨름하며 경작했지만 안식일에는 자연 그 자체를 경축하고 평화와 감사 속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 역시 감사함으로 세상의 선물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이 날 무엇을 하여야만 하는가요? 유대인들은 특별한 종교 의식으로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율법서를 읽습니다. 그러나 샤밧의 거룩함은 율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날 사람들이 체험하는 기쁨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결혼한 부부가 이날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 모두 선한 행위로 인정됩니다. 걷는 것, 쉬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하는 것, 읽는 것 등은 모두 좋은 것으로 인정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유대인의 샤밧이 따분한 제도나 구속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주 안식일로 짜인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는 안식일이야말로 자신과 자연, 일, 하나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힘 있게 묶어주고 고쳐줄 수는 훌륭한 방법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과는 조금 다른 안식일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기초하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합니다. 물론 모세의 계명과 유대인들의 전통을 함께 공유하면서, 유대인들처럼 매 안식일마다 창조주와의 관계를 감사하고 이집트를 탈출한 해방의 기쁨을 나눕니다. 그러나 여기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승리는 안식일을 매주의 휴식과 예배인 날인 동시에 부활의 잔치의 날로 만드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한 주간의 첫째 날은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특별한 날입니다. 이 날 이스터(Easter)에 그들은 같이 모이고, 먹고,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날은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는 과도기로서, 유대인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에 큰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게 파괴된 뒤 새로운 유대교의 모습을 만들어야 했던 랍비들은 하나님과 언약의 마지막 상징으로 샤밧을 강조하였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면서 점차로 회당 출석과 유대법 준수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일요일에 하루를 쉬고 예배드리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도 유대교의 안식일을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랍비와 달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선포하며,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습니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다른 9가지 시내산 계명과 함께 안식일의 계명도 귀하게 지켜왔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거룩한 날은 제7일이 아니라 제8일이며, 매 주일을 성찬 등의 의식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을 돌아보고 큰 잔치로 맺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리듬을 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돈을 써야하는 상황뿐만 아니라 다른 방해물들이 안식일 지키기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일요일이 특별한 날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각종 국가 자격 시험들이 일요일에 치러지고, 결혼식 등의 행사들이 일요일에 열립니다. 두 번째 방해물은 오히려 지나치게 안식일의 행동들을 통제했던 기독교의 과거 역사입니다. 일요일마다 종일 교회에 있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일요일날 여가를 즐기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은 재미없는 날로 인식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날의 경제 상황입니다. 현대사회는 일요일의 쇼핑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상업 활동에 내몰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오늘날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쁜 우리 2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도 다양성을 존중하며, 기쁨을 열망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영원히 지속되는 창조와 해방, 부활에 뿌리를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하면서 서로를 도울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풍부한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공회 신부인 틸든 에드워즈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유연성을 갖도록 권면하면서 안식일주의가 아닌 ‘안식일 시간’을 맞이하라고 호소합니다. 장로교 목사인 유진 피터슨 매주 월요일 마다 아내와 함께 시골로 여행하며 안식을 즐깁니다. 물론 안식일을 자기가 편한 아무 때나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서로 도와야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일요일이 제일 좋은 안식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찬의 잔치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모이고, 하루를 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 승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함께 예배하는 친구들과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 가는 일 말고 기독교에서 지키는 안식일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각 상황에 따라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무엇이 옳지 않은 것인가요? 이것은 3,000년이 넘는 유대교의 사상을 차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옳지 않은 것은 일과, 상업, 근심입니다. 7일중 하루만큼은 일을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없다면 이것은 관대한 조물주의 풍성함을 거부하는 자만의 모습으로 비쳐질 뿐입니다. 7일 중 하루 일에서 떠나서 쉬는 것은 하나님과 기쁘고 감사한 관계를 재정립하고 자연을 평화롭게 감상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 시간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다른 이들에게 무리한 일을 강요하지 않도록 일깨워줍니다. 상업 역시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만들어 가며, 사실 그 자체가 일입니다. 그리고 ‘근심’이란 걱정을 우리의 마음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근심을 안겨다 줄 활동을 멀리 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돈을 지불하고, 세금 내고, 다음 주에 할 일에 대한 계획표를 미리 만들기 등을 멀리 함을 말합니다.

기독교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의 예배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하나 됨을 회복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든 일요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말씀을 듣고 떡을 떼며 그리스도를 알아봅니다. 이날은 축제요, 마음에서 솟아나는 생수요, 일 뿐만이 아닌 모든 비난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일예배가 그저 ‘교회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모습에 깊이 참여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배 후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필요합니다. 다음 주의 스케줄을 빈틈없이 짜는 ‘유용한’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같이 놀고, 웃고, 그냥 시간을 같이 보내며 즐길 수 있는 ‘버리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혼자만의 시간, 낮잠, 독서, 명상, 걷기,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거동이 불편한 자들을 찾아 방문하거나 외로운 자들을 기독교 안식일에 초청하여 식탁을 나누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얻는 기쁨은 다른 약속에서 느끼는 압박감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안식일의 자유를 빼앗아서 종교적인 의무 사항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좋은 안식일은 좋은 기독인을 만든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정기적이고 절제된 영적 생활은 신실함의 기초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서로 도와주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하나님의 창조, 해방, 구원이 말뿐이 아닌 실제적으로 적용되고 실천되며, 온 세상에 그 복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좋은 안식일은 좋은 사회를 만듭니다.”

안식일 지키기 운동은 현대 기술 문명에서 인간이 자립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일에서의 자유를 정기적으로 누리는 것은 사회와 지구 공동체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동을 반성할 수 있고 돌아볼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안식일은 좋은 사회를 만들고, 일의 권리와 열매의 균형을 가져다주며, 모든 일하는 사람과 축하하는 사람들의 균형을 이룹니다.

한 주일의 하루, 휴식과 예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코 많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좋은 시작일 수 있습니다. 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다른 이들과 서로 축하하며 우리가 진실로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 주 거듭되는 이 하루에 우리는 매일 매일을 새롭게 하도록 삶의 여정을 지탱할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안식일은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편의주의로 지키는 율법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를 지켜줄 안식일을 우리는 제대로 지킬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계명의 근본적이요 기본적인 모습인줄 믿습니다.

10월 12일: 28번째 평주일

출32:1-14; 시106:1-6, 19-23; 빌4:1-9; 마22:1-14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본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본문은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의 위험한 찬양을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모세를 기다리지 않고 애굽에서 가져온 귀금속 장식품들을 꺼내어 우상을 만드니 아론이 그 이튿날이 여호와의 절기임을 공포하였다. 다음날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면서 축제의 절정을 이룬다.

우리는 홍해를 건너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이처럼 파렴치하게 어긋난 모습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만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을 혼돈하기에는 마찬가지로 높은 위험순위에 있음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송아지의 모습을 선호하여 우리 옆에 두고 조정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주위에 신들이 있고 또한 이보다 큰 권능의 하나님이 계심을 기록하고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질투하는 하나님은 이를 어기는 자들에게 삼 사대까지 벌을 내리시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신다.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찬송이 더 좋으냐? 혹은 설교내용이 내 마음에 드느냐? 혹은 예배가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느냐? 에 있지 않고 예배의 대상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느냐? 에 대한 답을 찾고 계심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찬양의 대상이 분명치 않으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본다. 구도자 예배를 주장하며 쉽게 그리고 정서적으로 민감한 비신자 초청의 목적으로 예배를 준비함이 또한 예배자를 스스로 가두는 결과를 보게 된다. 반면에 기독교가 불상을 훼손한 사례들을 보면서 오히려 다른 집의 잘못됨을 지적함 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 없애지 못하는 우상의 모습들을 없애는 것이 첫 순서이지 않은가 싶다. 특별히 권력을 지향하는 기독교와 이에 반응하는 한국시민들의 예민한 감정대립 속에서 우리 자신의 우상은 무엇인지를 돌아본다.

이집트의 농경문화에서 시내광야의 유목민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의 상징이 표현하듯 유목민이 아닌 다시 농경문화로 돌아가기를 지향하는 바와 같이 우리를 안정되게 할 수 있는 편안한 세상적 성공 가치관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현실의 이익을 계산하여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노는 잔치를 더 좋아한다.

이에 화가 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명을 어긴 백성들을 진멸하려 하심을 보고 모세는 간청을 한다. 그 논리의 주장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기를 아뢰인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과 맹세한 영영한 기업을 여호와께서 잊지 않으시기를 기도하는 모세로 인하여 그 화를 삼키시고 뜻을 돌이키사 백성들을 품으시는 장면으로 본문은 마무리된다(14절).

10월 19일: 29번째 평주일

출33:12-23; 시99; 살전1:1-10; 마22:15-22

십계명중 2번째 계명은 우상을 새기지 말라(출20:4)고 하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성전에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를 놓고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시며 시험을 당하신다. 교회는 정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신앙인은 더욱 더 정치세상에서 빛을 발하여야 한다는 주장의 대립선상에서 그 해결책을 구하고자 본문이 자주 인용되지만 그 내용의 범위를 넘어서 본문의 내용이 아닌 것을 확대하여 이야기함은 자제하여야 할 것이다.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시험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헤롯당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로마를 지향하며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통치하는 권력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었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로마통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드리는 종교인들이다. 서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두 집단이 예수님의 약점을 잡는다는 공동의 목적으로 모처럼 손을 잡고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이방제사장인 로마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우상을 놓고 일어난 사건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신 것일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동전으로서 그 분의 형상을 나타내길 바라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가이사가 우리의 재물을 원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돌려줌으로서 재물에 매여 있지 말라는 가르침과 함께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따라야 함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다.

사실 세금에 대한 권력의 모습은 빙산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더 큰 엄청난 요구를 하는 세상과 온전한 헌신의 계약을 계명으로 요구하시는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신앙인은 갈등한다. 그러나 본문의 가르침은 양 쪽의 요구를 다 충족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세상의 의무와 책임감을 100% 시민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의무와 책임감도 100% 천국시민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며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이중국적의 신앙인을 말한다. 두 나라를 동시에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이다.

사실 동전에 새겨진 대상을 위하여서는 동전에 해당되는 이익을 돌리면 되지만 그 이미지가 쉽게 새겨질 수 없는 조물주께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피조물의 모든 것을 드려야 함이 마땅하니 더욱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언젠가는 가이사의 것도 하나님께 돌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10월 26일: 30번째 평주일

신34:1-12; 시90:1-6, 13-17; 살전2:1-8; 마22:34-46

사두개인들이 물러서자 바리새인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시험하여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큰지 물어본다. 물론 율법학자라는 전문인의 방법론으로 그를 곤경에 처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총 정리하여 새 계명 2개를 소개하시는데 이는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신명기 6:5)과, 둘째로 이웃을 사랑할 것(민수기 19:18)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십계명을 포함한 수많은 구약의 율법들을 총 정리하여 요약한 계명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도 사랑이요 둘째도 사랑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황금률 계명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결정체로서 예수님 공생애의 첫 가르침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마태5:17)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기를 바라신다. 산상복음의 요약이기도 한 이 계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일관된 목회관과 교육관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계명이 더 큰가에 대한 질문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율법이 제일 중요한 것을 밝힘 보다는 율법의 전체성을 보여주며 어떠한 작은 율법이라도 그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태5:19)라고 하신 예수님의 첫 가르침 내용인 산상복음을 기억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계명의 근본임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다.

게임을 즐기는 과정 속에 본래 의도하였던 규칙이 희미해지고 분명치 않을 때에 의견이 달라지며 혼란이 일어난다. 이 때 누군가 처음의 규칙을 정확하게 다시 규정지으며 밝힐 때에 그 게임은 더욱 흥미로워지고 임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집중하게 된다. 계명은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이웃 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여주고 그 안에서 마음껏 사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을 주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가르침이며 우리를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안내하시는 계명인 것이다.

첫 사랑의 회복, 이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 계명의 핵심이다.


Article printed from Korean American Ministries: http://webkam.org

URL to article: http://webkam.org/2008/10/25/kam-newsletter-10%ed%98%b8-2008%eb%85%84-10%ec%9b%94/

URLs in this post:
[1] www.textweek.com: http://www.textweek.com

Click here to pri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