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are currently browsing the Korean American Ministries weblog archives for October, 2008.
- Blogroll (10)
- 교회탐방기 (23)
- Newsletter (12)
- Uncategorized (1)
- Website (1)
- October 22, 2009: Journal of Korean American Ministries & Theology, Volume 2, PREACHING
- October 22, 2009: Journal of Korean American Ministries & Theology No. 1 on WORSHIP
- October 22, 2009: The Power of Singing in Korean Culture
- May 11, 2009: [허정갑의 예배탐방23] 성요한 루터란 교회
- May 6, 2009: 초교파적 예배 역할 모델 제시
- May 2, 2009: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에 초대합니다 8월 3-6, 2009
- May 2, 2009: [허정갑의 예배탐방22] All Souls Fellowship
- April 29, 2009: [Photo] 평신도제직리더십훈련학교 2기 수료식
- April 21, 2009: [허정갑의 예배탐방21] 희랍정교회 파스카 부활절예배 Holy Trinity Greek Orthodox Church
- April 12, 2009: [허정갑의 예배탐방20] 스톤마운틴 부활절새벽예배
Archive for October 2008
KAM Newsletter 11호, 2008년 11월
October 29, 2008 by admin.

2009년 8월 3-6일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
www.worshipnmusic.org 준비모임(10월 13-14)에 참석한 전국각지에서 모인 실행위원들
인사의 글
그동안 불리었던 한미목회실을 ‘한미목회연구소‘로 이름을 개정하여 봅니다. 그리고 이름과 걸맞게 그동안 준비한 연구실적을 여러분께 소개드림이 매우 기쁩니다. 드디어 영문학술지 Journal of Korean American Ministries & Theology를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창간호는 한국교회 예배를 주제로 하여 5개의 Article과 5개의 논문 Review를 모았습니다. 저널은 계간지로서 앞으로 설교, 미술, 음악, 목회상담, 신학, 성서 등 Association of Theological Schools에 속한 한인교수들의 편집자문을 받아 진행하려고 합니다. 창간호를 인쇄출판으로 기대하였으나 아쉽게도 재정이 허락되지 않아 웹에 올려놓는 것으로 만족하여야 합니다. 웹 주소는 www.webkam.org/journal 입니다. 저널 전체를 다운로드하여 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에 로라 멘델홀 총장님께서 사임을 발표하고 2009년 여름서부터 임무가 시작될 새 총장을 선출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학교의 미래를 위하여 지금이 가장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한 총장의 사임은 학교전체를 술렁이게 하였습니다. 특별히 총장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시작된 한미목회 연구소의 미래가 새총장의 출현으로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지금 준비하여야 하겠기에 긴장이 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준비는 재정후원의 일입니다.
세계경제가 모두 어렵고 힘들기에 우리 모두 예외는 아닌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울 때에 가장 활발히 그리고 헌신하여 일하여야 할 곳이 주님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이 자기의 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모든것을 내려놓고 하나님만을 찾는 때이기 때문에 새로운 일군을 더 세워야 하고, 키워야 하며, 우리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여야 하는 절실한 때입니다.
그러기에 Living Waters와 South Atlantic대회에 속한 한인교회들을 돕고자 시작된 한미목회연구소의 사명은 더욱 막중하다고 봅니다. 앞으로 1년동안 연구소가 할 일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평신도 제직훈련 프로그램
목회자 계속교육
2세목회자 및 영어목회 후원
교회음악/교회교육 예배 컨퍼런스
신학생 훈련 및 장학금 모금
영문 저널 발행
한국교회와의 관계모색
할 일은 너무나도 많은데 연구소에 할당된 기금이 없습니다. 내년도 예산을 편성하기 위하여 모금운동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목표는 $50,000입니다. 각 교회에 학교에서 편지를 보낼 계획입니다. 그리고 목사님들께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적극적으로 도와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각 교회 1년 선교예산에서 $1,000만 작정하여도 60여개의 양 대회 교회(미자립교회 포함)가 힘을 모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미 학교에 선교지원을 하고 계신다면 Korean American Ministries로 Designate하여 주십시오. 한인교회와 한인 신학생들이 받는 혜택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힘이 모아지면 연구소의 활성화가 이루어질것을 바라봅니다.
감사합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11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료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종말과 심판
11월 1일: 성도추모일
계7:9-17; 시34:1-10, 22; 요일3:1-3; 마5:1-12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때에 결코 혼자가 아니다. 먼저 교회가 있고, 성령이 있으며, 우리를 안내하는 성경, 그리고 성도가 있다. 성도는 우리보다 먼저 신앙의 길을 걸어간 수많은 그리스도의 증언자들로서 우리의 길을 안내하고 이끌어 준다.
성도를 추모하는 이 날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지나간 신앙의 조상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리는 결코 혼자 갈 수 없는 그 길을 믿음으로 먼저 간 그 분들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신앙을 본받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기를 기도함이 마땅하며 성도추모일은 믿음의 조상과 그들의 신앙을 기억하는 축제의 시간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 계시록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 증인의 수가 허다함을 기록하고 있다. 아무도 셀 수 없는 숫자이다. 이 땅의 삶에서 하나님을 노래한 그들이 이제는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영원히 노래한다. 장로 중에 하나가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하고 물어보니 요한은 하나님께 그 대답을 돌리니 주님은 말씀하시길 이들은 고난을 견딘 신실한 자들이라고 하신다. 이들은 환난 중에 믿고, 소망하며, 증언하고, 또한 사랑을 베푼 자들이다. 이제 이들은 큰 목자께서 닦아 주시는 눈물에서 그가 인도하시는 생명수 샘물로 다가간다.
성도들은 이제 흰옷을 입고 행진하며 하나님 보좌 앞을 입장한다. 매 주일마다 우리는 예배를 준비하며 입장의 행진을 2000여 년 동안 하여왔는데 성도란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며 우리의 길을 안내한 자들이다. 흔히 우리는 새로 교회에 온 사람을 마땅히 부를 직책이 없기에 OOO성도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OOO신도 혹은 교우가 옳을 것이다.
성도는 우리에게 주일학교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 어려울 때 기도하여 주신 어른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주신 할아버지 목사님들이시다. 그 분들이 안 계셨더라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는 신앙의 선생님들을 말한다. 그 분들을 특별히 기억하며 그들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설 수 있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특별히 하나님나라의 오심으로 인한 종말의 심판을 준비하여야 하는 우리에게 믿음의 본이 되어 우리를 기다리는 허다한 성도의 무리가 있음은 크나큰 위로가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11월 2일: 31번째 평주일
수3:7-17; 시107:1-7, 33-37; 살전2:9-13; 마23:1-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2절) 심판의 경고가 스며있는 가르침이다. 가식과 외식으로 치장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모세의 자리에 앉아(2절) 있음을 지적하고 계신다. 지도자가 되기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가르침은 Leader가 되기 전에 Follower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 지도자일수록 그 심판의 기준이 더 무거운 것이다. 그러기에 말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 그들의 행위를 드러내어 보이려고 하는 겉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모세의 법은 365개의 금지사항과 250개의 율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사람들 어깨에 지우는 무거운 짐으로 존재함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11:30).
높이 오를 줄만 아는 사람은 언젠가 떨어질 때가 있음이 당연한 이치이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에게도 본인을 심판하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지도자이기를 조심하고 그 권위를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함을 말한다(10절). 윗자리에 앉기를 탐하기보다 겸손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오히려 낮게 임할수록 더욱 높아짐을 약속하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셔서 가장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 생명은 영원히 하늘의 보좌에 계심으로 우리에게 가장 높은 왕으로 임하신다.
오는 주일을 성도추모 주일로 지킨다면 오늘의 본문 또한 먼저 가신 신앙의 성도들이 걸어간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가 성도로 칭하며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들은 하나같이 자기를 높이지 않고 낮추어 남을 섬기며 겸손히 우리를 이끌어준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리의 기억에서 남아있는 것은 그들이 율법의 자리에서 우리를 판단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며 행동으로 본을 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의 가르침 중 가장 쉽고도 어려운 사항이다.
11월 9일: 32번째 평주일
수24:1-3a, 14-25; 시78:1-7; 살전4:13-18; 마25:1-13
우리에겐 “내일하면 되지”라고 미루는 습관이 허다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 순간 이루어지며 우리의 행동과 결정을 지금 당장 이 순간 요구하고 계신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멈추시고 다가오실 때 우리는 과연 준비되어 있는가?
하나님나라는 순식간에 우리에게 임하심을 고백하며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 처녀들의 비유를 예수님은 가르치신다. 그 중 5명은 준비되고 5명은 준비하지 못한 모습이다. 준비된 자들은 잔치에 참여하고 준비되지 못한 자들은 쫓겨남을 말한다. 준비된 자들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허둥지둥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그 날을 기다리는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본문은 마태복음의 공동체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기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기다리기에 지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에 임하시기를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만 하는 우리들에게도 마태복음의 비유는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그 때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기다린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이천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기다림에 무디어져가며 마지막 시간의 긴박함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삶에 익숙하여진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삶은 결코 영원하지 못하다. 끝은 있기 마련이다. 준비되어 있는가? 이제 마태복음의 마지막에 이르며 교회력을 따르는 시간의 종점에 와 있다. 시간이 다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미련을 갖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로맨틱감정을 갖고 누구든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여유롭게 생각한다. 그러나 본문은 칼을 자르듯이 냉혹한 면을 강조한다. 준비된 다섯 처녀들은 자기들의 기름을 결코 나눠주지 않고 있다.
서로 나눠 쓰지 못하는 점이 본문의 핵심은 아니다. 그 핵심은 준비성에 있다. 그리고 가짜 신랑의 목소리에 현혹되어 기름을 낭비하지 않는 지혜에 있다. 24장 5절에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경고하심과 같이 우리 주위에는 종말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상품화시킨 유혹의 손길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더욱 깨어서, 바라보고, 준비하여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겠다. 예수님은 본문의 비유를 마치면서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말씀하신다. 천지개벽의 떠들썩함인지, 세미한 음성의 임하심인지, 도둑의 발자국 소리인지, 임산부 출산의 고통인지 아무도 모르게 갑자기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준비함을 재촉하신다.
11월 16일: 33번째 평주일
삿4:1-7; 시123; 살전5:1-11; 마25:14-30
달란트 비유는 청지기의 주제보다는 종말에 대비한 예수님의 마지막 비유의 가르치심이다. 마치 한 아기의 생명이 부모에게 주는 엄청난 축복과 잠재력에 비교된다.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며 그 달란트가 커져나감을 확인하여 가는 삶의 모습과도 같다. 본문의 비유 또한 그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주인은 그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며 기쁨의 수확을 바라보고 종들에게 투자한다. 모든 종들은 같은 가능성을 안고 일을 시작하나 한 종은 두려움에 휩싸여 그의 가능성을 펼치지 못한다. 종말의 심판이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에 눌리어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처럼 주인에게 불손한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내리시사 평생을 통하여 그 포장을 열어보도록 안내하신다. 우리 자신이 그 선물로서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깜짝 놀라는 엄청난 선물들을 말한다. 우리의 달란트는 여러 모습으로 사용되어진다. 어떤 달란트는 세상에 도움이 되고, 어떤 달란트는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어떤 달란트는 아무 도움이 되어보이질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은 믿음이다. 이 믿음이 바로 세상에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서 이를 받은 자들은 받은 것을 나누어야 할 책임이 있다. 전하여야 한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유통시켜야 한다. 요사이 경제침체에 따른 경기가 안 좋으니 자기만 살겠다고 숨겨놓음을 지적하고 계신다. 믿음은 나누어야 성장한다. 그러므로 믿음과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필요 없는 자임을 경고하고 계심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새로운 법을 펼치시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잘 사용하여야 옳지 그렇지 못하면 있는 것까지 다 빼앗김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사랑은 구원의 열매로서 또한 다른 사람의 열매를 위한 씨앗과 같이 사용된다. 세리와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받은 선물의 율법을 그저 지키기에 급급하여 사랑으로 나누지 못하였음을 지적하시며 예수님은 반대로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십자가에 투자하여 모든 사람과 그 사랑을 나누심을 보이신다. 그 씨앗의 열매가 바로 사랑으로서 우리도 또한 계속하여 나눔이 천국시민의 모습임을 확인시키신다.
벤 존슨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은퇴교수로서 현대사회의 죽어가는 교회의 다섯 가지 증상을 말하고 있다:
1. 신앙은 사적(private)임을 주장한다. 종교는 개인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2. 자기교회만이 전부임을 주장한다. 교회 사람들만 돌보면 된다고 한다.
3. 편협하고 방어적이다. 변화를 거부하며 항상 이래왔음을 주장한다.
4. 믿음은 지식인의 자산으로서 하나의 성취하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5. 감성은 금물로서 열정적인 신앙인을 경멸한다.
한 시대의 유실물로서 있다가 없어지는 존재가 아닌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신앙인들은 받은 달란트를 아낌없이 나눌 수 있어야 하겠다.
11월 23일: 그리스도 왕 주일
겔34:11-16, 20-24; 시100; 엡1:15-23; 마25:31-46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자 우리의 심판관이시다. 최후의 심판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 세상의 기준 그 이상의 것을 바라봄에 있다.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모든 것이 끝났을 때에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인자는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분별하듯이 나누리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기준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얼마나 도왔는지를 중심으로 평가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는 결코 편안하지가 않다. 언젠가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됨이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 보좌 앞에 서서 우리의 삶을 모두 비추어 보며 옳고 그름을 가리신다. 심판을 조명함은 오늘 주일이 그리스도 왕으로서 한 해를 마감하는 주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미지 또한 목자가 하루의 일을 마감하며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우리에 넣는 그 시대 아주 보편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계신다. 털이 많은 양은 밤의 추위를 견딜 수 있기에 바깥쪽에 자리 잡고 추위에 약한 염소는 안 쪽으로 위치하여 밤을 준비시킨다. 여기에서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냐의 질문보다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서 두 그룹으로 나눠진 무리의 중심에 있는 목자는 왕의 절대적 권한으로서 나눠진 백성들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이웃을 사랑함과 같다고 강조한다(22:37-40). 이웃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듯 함을 다시 확인시키며 하나님나라를 준비하는 삶을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종말과 심판’ 시리즈는 신실한 종(24:45-51), 열 처녀(25:1-13), 그리고 달란트 (25:14-30)비유를 통하여 마지막 날을 준비하는 모습을 가르치고 있다. 공동체는 그 시간을 정확히 모르지만 깨어 있어서 갑자기 닥치는 왕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하며 그 기쁨의 잔치를 준비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왕 주일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조명하며 윤리적 변화를 추구하여 왕과 신하된 백성으로서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요, 왕 되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교회력의 한 해를 마감한다.

Posted in Newsletter | Print | No Comments »
KAM Newsletter 5호, 2008년 3월
October 29, 2008 by admin.

2월 20일 장로교신학대학원 중창단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방문
인사의 글
부활의 기쁨을 전합니다.
이번 5호서부터 애틀랜타 지역목회자들의 범위를 넘어서 South Atlantic 대회에 속한 KPC 한인교회 그리고 미자립교회(Fellowship) 전체에 뉴스레터를 프린트하여 우편물로 발송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현재 학생으로서 M.Div. 졸업예정인 김재홍 전도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됨입니다. 김전도사님(위사진 왼쪽끝)은 한국 이랜드에서 직장을 다닌 사회경험이 있는지라 한미목회실을 시작함에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심을 보는 것 같습니다. 혹시 지난 호를 받고 싶으시면 저나 김전도사께 (jaehong.kim@students.ctsnet.edu) 연락주시면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한미목회실에서는 콜롬비아 평생교육원의 평신도 교육 프로그램(Lay Leader Training Program)의 한국어 트랙으로 제직훈련을 진행하고자 설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KPC 산하 여러교회가 공동으로 제직교육을 제공하고자 애틀랜타 목회자들과 KPC임원들을 중심으로 의논중입니다. 여러분들의 고견과 제안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일이 진행됨과 함께 목회자를 대상으로 하는 계속교육을 또한 구상중에 있으며 학교의 자원들을 익히느라 분주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4월 18일에는 총회의 김선배목사, 정인수목사, KPC 임원대표로 이원걸목사, 최병호목사님들을 모시고 학교관계자들과 함께 한미목회실의 큰 그림을 그리고자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을 바랍니다.
저는 3월9일 주일에 조지아 장로교회(김삼영목사)에서 설교를 하였고 4월1일 콜롬비아 이사회를 여는 아침경건회에, 그리고 4월 6일 연합교회(정인수목사)에서 말씀을 전하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교회를 찾아뵙고 인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또한 바랍니다.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새 기숙사 기공식
4월 1일 화요일 오후 5시에 새기숙사 기공예배를 드립니다. 이날 로라 멘델홀 총장의 사회로 진행되는 예배는 한국전통 사물놀이의 상고춤을 선보이며 잔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콜롬비아 신학원의 새로운 역사를 쓰는 귀중한 시간에 한인교회의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새 기숙사는 Florida Hall 건너편 운동장 코너에 자리잡게 되는데 장기적으로 Simons-Law 현재 기숙사를 교실 및 오피스 공간으로 개조하기위한 첫번째 플랜입니다. 학교를 확장하고 새롭게 만들고자 기획중에 있습니다.
성서정과 4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 을 참고하세요.
‘환대’
4월 6일: 부활절 3번째 주일
행2:14a, 36-41; 시116:1-4, 12-19; 벧전1:17-23; 눅24:13-35
본문은 바쁜 삶의 연속에서 ‘빨리빨리’가 아닌 좀 천천히 가며 환대를 베푸는 부활의 삶을 전하고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활절 당일 날의 이야기로 전하여진다.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그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길을 가게 되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당사자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의 내용을 물으시며 대화하시고, 함께 걸으시며, 동행하신다. 그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걷고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주님은 같이 동행하심을 보이시며 부활을 몸소 증거하신다.
그렇다고 본문이 어느 특별한 날의 특별한 사건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되고 전하여진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제자들에게 계속하여 찾아오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한다. 엠마오의 이야기는 부활에 대한 증인과 그들의 고백에 의존하는 한정된 모습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되어야 하고 체험하여야 하는 실천적인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의 진리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헌으로 정리된 모습만은 아닌 것이다. 빈 무덤과 그리스도의 죽은 몸이 변화됨을 기록한 역사적 사건에만 집중함으론 부활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은 간단히 설명하여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전이나 지금이나 살아계신 그분과 함께 함을 경험함에 있다. 초대교회 공동체에게 이러한 경험은 예수님의 모습을 실제로 보고 만남에 있었다. 바울과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직접 경험하였고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며 역사적 사실만이 아닌 현재진행중인 은혜의 체험을 누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예수는 우리와 함께 이곳에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파격적인 모습으로 함께 하신다.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언제나 영원토록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부활이후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은 경험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독교 역사의 흐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의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유형의 형식을 통하여 그 경험이 전하여지고 있다. 신비의 경험과 특별한 비전들이 기도와 예배, 성만찬을 비롯한 성례전,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드라마, 미술, 음악 및 문학작품을 비롯한 예술을 통하여 전하여진다. 부활의 진리는 약200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하여 경험되어지고 있다. 우리는 사건 자체에 흥분되어 목표만 의식하여 너무 빨리 걷느라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 부활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겠다.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부활의 경험을 기대하여 본다.
상황설교
주객이 바뀌면 안 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주객이 바뀌어야 교회가 삽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손님과 주인의 위치가 바뀐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손님으로 초대받은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 집에서 유대교 주인이 하는 식탁의 기도를 드리면서 제자들의 눈이 밝아지고 가슴이 뜨거워지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환대”는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신약의 한 단어가 매우 깊은 진리의 뜻을 통합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랍어로서 ‘지노’(xenos)라는 말입니다. 이 뜻은 ‘낯선 자’라는 희랍어로서 ‘손님’의 뜻도 되고 ‘주인’의 뜻도 됩니다. 이 단어는 “환대”가 내포하는 기본적인 뜻인 상호관계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심적인 표현으로서 ‘낯선 자’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룩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손님과 주인의 의식차이는 어떻게 서로를 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 관계를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영어단어가 있는데 지노포비아 (xenophobia)입니다. 이 말의 뜻은 바로 낯선 자들에 대한 공포심으로서 지극히 극단적인 민족주의 아니면 “나의 조직이 너희 조직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이 단어를 약간 변형하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환대”-필로지니아(philoxenia)가 됩니다. 이 단어는 손님 혹은 낯선 자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필로지니아’는 아울러 환대의 주위상황, 즉 손님과 주인의 모든 활동상황을 포함한 모든 것을 사랑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필로지니아의 상호관계에서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다른 이들과 식사를 할 때에 되풀이하여 일어난 사건들이 증명합니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결혼식 잔치에 참여하십니다. 그러나 술이 떨어졌을 때에 그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며 주인의 모습이 됩니다(요한복음 2:1-11). 마르다가 예수님을 그녀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한 후 대접에 지친 모습이 되자 예수는 오히려 그 날 만큼은 그녀에게 앉아서 대접을 받는 것이 대접하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치십니다(누가복음 10:38-42).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로마서 12:13)고 합니다. 이러한 원형의 상호관계적 ‘환대’는 그곳에 들어오는 자를 포용하고 변화시키게 합니다. 가정집에서 모이던 초대교회는 계속 성장하면서 주인 된 자들을 손님으로 그리고 손님된 자들을 주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가정교회 목회사역으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여행 중 전도하던 사도 바울은 각 처소에서 그가 받을 사랑의 환대를 기대하며 나아갔고 또한 그를 기다리던 교회들도 그가 가져올 선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차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삶 또한 비슷한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온 손님들이 결국은 우리의 주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하며 꼭 필요한 선물을 주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로 집 없는 노숙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은 거의 대부분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거의 모두 겉치레의 외면상인 주인들은 그들이 나눈 것 이상으로 가난한 손님들인 노숙자들을 통하여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받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국제화가 급속도로 전개되면서 외국인노동자에게 우리가 환대를 베풀어야함이 강조됨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한 개념, 즉 낯선 자로서의 손님이 의외의 선물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은 “환대”의 성경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손님이 ‘거룩한 자’ 곧 하나님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장 2절은 전합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세 명의 손님사이의 일은 이런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 손님들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늙은 부인 사라가 곧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실로 엄청난 소식을 가져온 것입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항으로 그 낯선 나그네의 얼굴이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이란 것이 마태복음에 밝혀져 있습니다(25:38). “환대”가 제대로 행하여진다면 그 일은 단순히 낯선 자를 환영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성을 경험하는 것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낯선 사람들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되고 그들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환대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런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자신이 없습니다. 환대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위험한 상황, 아직 준비되지 않은 미숙한 공동체와 불투명한 약속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환대를 베푸는 장소에서 모든 손님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선물들을 꺼내어 놓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재능을 털어놓기 위해서는 손님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성숙도에 달려있기도 합니다. 압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쉼터(shelter)와 보호(care)의 필요성과 한편으로는 낯선 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교차하는 이 시대에 환대를 실천하는 노력과 함께 서로를 도와주며 성장하는 우리 사회가 되길 기대해 봅니다.
오늘, 다양한 문화권 속에서의 사회들은 이처럼 현실적인 요구에서 이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86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중미 사람들의 연합회 성격인 카레센(CARECEN Central American Resource Center)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새 이민법에 의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중미 사람들의 법률 자문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입니다. 주로 자원 봉사자들로 이루어진 카레센은 다양한 성격의 봉사를 대행하는데 특별히 기본적인 아니면 전혀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라틴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히스패닉 문화와 정서에서의 건강과 치료방법을 추구하며 라틴계 사람들을 환영하였습니다. 많은 경우에 직원들과 자원봉사자 자신들이 카레센을 통하여 도움을 받았기에 상담을 원하는 이들이 겪는 스트레스와 곤란함을 잘 알고 있으며 이제는 주는 자의 입장에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손님으로 온 이들이 이제는 특권을 가진 자리의 주인의 모습으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낯선 자에게 환대를 베푸는 것은 무언가 새롭고 생소한 미지의 세계로 우리자신을 초청하는 일입니다. 낯선 자들은 우리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을 갖고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우리의 편협한 시각을 고쳐 줄 것이고 우리 상상력에 자극을 더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세상을 신비로운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초대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과 탈북자들을 비롯하여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더 이상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우리의 식탁으로 초대하여야 합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주객의 관계가 바뀌며 진정한 ‘환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는 이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 되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바쁜 삶의 모습에서 비록 낯선 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실지라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환대를 베푸는 우리의 여유 있는 삶이되어지기를 기도합니다.
4월 13일: 부활절 4번째 주일
행2:42-47; 시23; 벧전2:19-25; 요10:1-10
부활절 4번째 주일은 선한목자 주일이다. 주일예배는 구경꾼이 존재하는 운동경기가 아니다. 참여하지 않고 무슨 재미로 예배를 드리는가? 초대교회에서의 참여는 성만찬에 참여하기 위하여 가져온 음식과 예물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예배가 마친 후에는 남은 음식들을 고아와 과부들, 그리고 병든 자와 갇힌 자, 그리고 낯선 자와 나그네에게 나누어 주었다. 초대교회는 ‘환대’를 실천하며 선한목자의 삶을 산 것이다.
예물을 봉헌하기 위하여 송영과 함께 안내위원들이 앞으로 나아올 때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과 연계하여 일상생활의 모습을 하나님께 그대로 드리는 거룩한 시간인 것이다. 우리의 예배가 ‘영적’ 가치론에 가려져서 평범한 사물이 거룩하게 그리고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몸’이 다시 사신 부활의 그리스도와는 거리가 먼 관계가 될 것이다.
기독교는 성육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몸의 신학’을 중요시 한다. 공동체를 통한 그리스도의 지체를 세우는 사역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나사렛 목수인 유대인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사 육신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영혼의 세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 수 있도록 죄의 사슬을 끊으시고 사망에서 부활로 우리를 안내하고 계신다. 우리는 봉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환대를 실천하며 기독교 신앙의 구체화를 드러내는 것이다. 일상적인 사물인 떡과 잔, 헌금예물, 그리고 이 땅의 소산물과 우리가 수고한 땀과 열매를 모두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이 거룩함을 통하여 새롭게 변화되고 하나님 창조의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를 통하여 사물을 사용하시었다. 씨와 공중의 새, 꽃과 동전, 문둥병자들과 어린이들을 가까이 하시며 하나님나라의 일환으로 증거하시었다. 구원의 손길을 통하여 새로운 변화를 제공하시며 굶주린 자들의 배를 채우시며 물질적인 사물이 영적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안내하시었다.
평범한 사물이 하나님나라의 비범한 도구가 되는 모습이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은 매주일 모여서 떡을 떼고 그들의 삶을 나누는 예배를 드리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요 예배의 참모습인 것이다. 공동의 삶을 위하여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 됨을 보여준다. 그들은 기도와 찬송을 잘 함에 그치지 않고 열심을 다하여 서로를 돌보는 ‘환대’의 참 모습을 생활화하였다. 주님부활의 기쁨과 감격을 가장 잘 나눈 초대교회는 떡과 잔을 나누며 성만찬을 감사와 제사의 삶으로 이어간 것이다.
4월 20일: 부활절 5번째 주일
행7:55-60; 시31:1-5, 15-16; 벧전 2:2-10; 요14:1-14
예비하신 거처를 약속하시는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음을 강조하고 계신다.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손님접대의 비유로 환대를 보여주시는데 다행이도 아버지의 집에는 방이 많이 있음이다. 신학적 문제로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천국에서는 각방을 쓸 수 있다고 누군가 농담을 한다.
2절과 3절의 ‘거할 처소’는 매우 난해한 해석으로 영원한 안식처인지 아니면 잠시 머무르는 곳인지 확실치 않다. 희랍어 ‘모네(mone)’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르는 안식처임을 가리킨다. 이는 임시의 거처로서 거대한 궁전이 아닌 광야의 작은 초막과도 같이 안전하고도 평안한 피난처이다. 그러나 거처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그곳은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준비하신 우리 모두의 처소로서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으로 비록 하나 되지 못하여도 모두 머무를 수 있는 곳임은 확실하다.
미국장로교의 목사 사택을 맨스(manse)라고 하는데 결코 크지 않은 집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맨션(mansion)이라고 하는 대저택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맨스는 목사와 가족이 목회기간동안 머무르는 거처로서 매우 임시적인 의미를 안고 있다. 우리가 거할 처소는 광야에 있다. 결코 진주문과 상아탑으로 장식된 거창한곳이 아니라 반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6절) 예수님과 함께 사는 매우 평범한 처소이다. 목회는 바로 이처럼 예수와 함께 거하기 위한 광야로의 초대인 것이다.
우리는 불확실하고도 위험한 삶의 여정으로 초대받고 있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음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약속하신다. 부활후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이시며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1절). 여기에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다. 미리 가셔서 처소를 준비하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은 우리를 영접하시며 환대하시길 준비하신다. 하나님 백성을 위한 목양의 길로 초대하신다.
오늘의 본문은 흔히 사용하는 장례식 설교본문이 아니라 목회의 소명을 안내하는 초대의 내용이다. 먼저 가신 예수님은 우리의 길을 예비하신다. 상을 베푸시고 앉으시사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기를 준비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삶과 죽음 모두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부활의 신앙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도움과 평화를 열망하는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거처를 준비하고 집에 오기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우리는 나아간다. 환대의 손길에 우리의 안식을 누리고 힘을 얻어 주의 백성을 사랑으로 품고 나아가기를 기도한다.
4월 27일: 부활절 6번째 주일
행17:22-34; 시66:8-20; 벧전3:13-22; 요14:15-21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의 선교여정을 종교와 역사가 풍부한 문화의 도시 아테네로 안내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아테네의 유적에는 관심이 없는 듯 아테네의 언덕에 위치한 아레오바고 최고 재판소에 서서 일장 설교를 진행한다. 교육받은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도시 곳곳에 시설된 예술품들을 하나의 우상으로 간주하고 쓰레기로 취급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회당에서 시작하여 거리로 나와 어디든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야만인으로 취급하였을 것이다. 아테네는 희랍문화의 중심권으로서 희랍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야만인(barbarian)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희랍어가 아닌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하는 말이 ‘바바(ba, ba, barbarian)’로만 들렸기 때문이다. 좀 더 진보적인 사람들은 바울이 신에 대하여 하는 말로 관심을 갖고 철학적인 반응을 보이며 어떤 새로운 학문을 가르치는지 궁금해 하였을 것이다. 이는 새로움에 가장 민감한 호기심의 반응을 보이는 희랍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바울의 수사학적인 기교를 엿볼 수 있는 본문은 22절에서 ‘범사에 종교심이 많다고’ 아테네 사람들을 칭찬하며 그의 말문을 열어간다. 동시에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을 섬기는’ 아테네인들의 우상숭배를 유대교적인 입장에서 지적하며 설교를 진행한다. 또한 자연신학을 언급하기도 하고 현대시인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28절)”고 청중의 관심을 이끌어 간다.
그리고 말하기를 “하나님이 간과하시고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시며…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라”(30-31절)고 결론을 내린다. 사람들은 이에 부활에 대하여 반응하기를 조롱도하고, 어떤 이들은 다시 듣기를 요청하였다. 여기서 바울이 전한 메시지의 핵심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죽기 마련이고 또한 죽은 상태 그대로 썩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을 이기신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는 어떻게 증거할 수 있는가?
우리 설교자들 또한 바울과 같이 부활의 메시지를 핵심으로 매주일 전하여야 하는데 부활절 주일이 지나고 나면 부활의 사건을 다 잊어버린 모습으로 강단에 서는 모습을 보게 된다. 바울의 아테네 설교를 많은 사람들이 들었을 텐데 그 중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만 믿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임을 다시 한 번 조명한다. 부활의 신앙을 귀중히 간직하여 의심을 버리고 열린 마음과 생각으로 진리를 받아드리는 우리의 삶이되기를 기도한다. 성령의 은혜로 낯선 자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영접하여 환대하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부활의 신비가 널리 전하여지는 예배와 설교가 되기를 다짐한다.
Posted in Newsletter | Print | No Comments »
[허정갑의 예배탐방1] 콜롬비아 장로교회
October 26, 2008 by admin.
콜롬비아 장로교회
www.cpcdecatur.org
2008년 10월 26일, Reformation Sunday
예배학 교수로서 다른 교회를 방문하여 리포트를 쓰라고 학생들에게 숙제를 내어 주지만 나 자신이 리포트를 쓰기는 아주 오랜만이다. 2007년 크리스마스에 미국에 도착하여 매주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여 보았지만 방문교회의 예배에 대한 글을 써 정리하여 보지는 못하였기에 기회가 되는대로 미국교회의 예배모습을 일요일 교회탐방의 모습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부터 시작하는 마음에서 같은 블록에 위치한 걸어서 3분 거리의 콜롬비아 장로교회를 선택하였다. 사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미국장로교 산하의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www.ctsnet.edu 의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는 이 교회에 학교와 관계된 여러 사람들이 다니고 있지만 주일예배 참석은 이번이 처음이다.
교회는 1946년에 설립되었는데 근방에 위치한 2교회가 노회와 협력하여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캠퍼스 옆에 개척교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학교의 여러 행사 중 개강예배를 비롯하여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모임에는 교회 예배실을 사용하고 또한 교인들에게 학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혜택을 주고 있다.
그러나 많은 미국교회들이 그렇듯이 이 교회도 교회성장이 멈춘 가운데 현상유지의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을 감추지 못한다. 아름다운 건물과 파이프 오르간, 그리고 인근에 위치한 학교의 인적자원들이 풍부한 교회의 주일예배 모습을 관찰하여 보았다. 마침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하는지라 예배시간 15분전에 입구에서 백파이프를 불며 스코틀랜드의 전통을 기억하는 잔치로 시작하였다. 참 교회주소와 우리 집 주소가 모두 Kirk Road이며 스코틀랜드 말로 ‘교회’라는 고어임을 기억할 때에 이 지역의 주민분포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약 500석의 예배실에 70-80명의 교인들이 분산되어 예배함은 회중 찬송소리가 파이프오르간에 덮여서 잘 안 들리는 결과였다. 백파이프의 연주와 함께 Kirkin’o'the Tartans 예식이 시작되었는데 십자가 깃발, 성경을 높이 든 Beadle, 교회깃발, 성직자, 그리고 성가대원들이 각 가문의 문양을 상징하는 깃발인 Tartan을 들고 차례로 입장하였다.
타르탄이라고 불리는 문양은 깃발에도 사용하고 남자들도 입는 치마의 문양에도 사용한다. 그 문양에 따라 각 가문을 상징한다고 한다. www.clansofscotland.org 이것을 미국에서 교회 예배예식으로 처음 1943년도에 사용한 사람을 Peter Marshall 목사라고 하는데 이는 스코틀랜드 이민자로서 콜롬비아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미국의회의 Chaplain으로 유명한 설교자이다.
사실 미국의 역사가 이민교회 역사인만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미국에 장로교회를 가져왔고 영국이민자들은 해변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다면 정치적 힘이 없던 이들은 인디안 원주민들과 접촉하는 산맥을 중심으로 중부와 남부에 정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 종교개혁의 날 스코틀랜드 개혁자 존 녹스를 기념하며 그의 기도문과 고백문(ScotsConfession, 1560, http://www.creeds.net/reformed/Scots/)을 사용한 예배를 준비하였다.
종교개혁주일을 지키며 지역주일의 민족성을 살리고 계속 개혁함을 외치는 의식을 통하여 교회가 개혁을 안 하면 결국 문을 닫고 말아야만 하는 미국 기성교단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았다. 개혁교회의 모습에서 이민자들이 등장하는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예고하며 담임목사는 본인의 인종인 백인남자의 안경을 벗고 예수님의 시각으로 사랑을 나누자고 성서정과를 따르는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22장 34-46절을 설교하였다. 이는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끝나지 않고 21세기의 개혁으로 이어짐을 말한다며 의미심장한 내용을 전하였다.
스코틀랜드 민족성을 바탕으로 발전된 미국장로교 전통예배에 매우 충실한 1시간 예배를 통하여 한국 이민교회의 방향성을 엿볼 수 있었는데 이민교회에서도 한국 민족임을 나타내는 상징과 요소들이 기도와 함께 어우러져 예배드려짐이 앞으로 기대된다. 오늘 예배에서는 스코틀랜드 문양만 소개되었는데 한국문양을 비롯한 여러 다른 민족의 문양이 추가된 의식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입구에 마련된 Scottish Short Bread Cookie를 집어 들고 그 달콤함에 잠시 매료되었다. (허정갑)
Posted in 교회탐방기 | Print | No Comments »
Paul Huh on Interview
October 26, 2008 by admin.
ON THE HORIZON is a monthly e-mail newsletter designed to inform, to inspire, and to nurture ongoing communication between the General Assembly Council/Executive Director’s Office and middle governing bodies. Your feedback is strongly encouraged, as is your input for future editions. You are invited to share the information and stories in this newsletter with your own partners in ministry.
Lives Transformed
“Bringing more voices to the table” – The Rev. Paul Junggap Huh
by Emily Enders Odom
Associate, Mission Communications
Presbyterian Church (USA)
DECATUR, GA, October 22, 2008 – Having long ago “fallen in love” with the art of creating worship resources, the Rev. Paul Junggap Huh found himself newly articulating one of the great paradoxes of the faithful.
“Which comes first,” Huh wondered, “one’s passion or one’s calling? I believe they work simultaneously.”
Where passion and calling have most recently converged for the editor of Come, Let Us Worship: The Korean-English Presbyterian Hymnal and Service Book (Geneva Press, 2001) [http://www.pcusa.org/korean/resources.htm], was witnessed on September 23 by a host of exuberant worshipers at the Presbyterian Center in Louisville as Huh was commissioned – alongside fourteen others – to serve on the national committee to develop the next Presbyterian hymnal [http://www.presbyterianhymnal.org/HymnalSplash.asp].
“Being introduced to the work of General Assembly changed my life,” Huh said. “Not only did the Korean-English hymnal I edited open the door to my serving here at Columbia Seminary, but my experience with it also led people to support my application by recommending me for this new opportunity to work with the Presbyterian hymnal project. It’s all connected.”
Huh,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at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http://www.ctsnet.edu/], said that the hymnal committee’s greatest challenge would be to identify the “new song” that the Presbyterian Church (USA) is singing at this stage in its journey.
“As a committee, we are open to the ongo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leading us to new texts and tunes for our time and beyond,” Huh said. “In its day, the 1990 hymnal was both an entryway and a symbol for uniting the former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 and 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We very much face the same task now, to identify what divides us as a church, whether it be theology or worship styles, and to design a hymnal that will help us to be united with one another.”
Huh observed that the Presbyterian Publishing Corporation (PPC), which is assuming all costs for the development and production of the hymnal, including the expenses of the Hymnal Committee, took great care to appoint a diverse committee to the task. Mary Louise “Mel” Bringle, professor of philosophy and religious studies and chair of the Humanities Division at Brevard College in Brevard, NC, serves as committee chair. David Eicher, a member of the PPC staff, is the new hymnal’s editor.
“What we develop may not please everyone,” said Huh, “but we can attempt to bring more voices to the table to find that new entryway to bring us together.”
Undaunted by the anticipated 5-year commitment, Huh is instead looking forward to what the new hymnal will both represent and achieve. “Written documents help us to agree with one another,” he said. “By addressing and bridging our cultural, language, and other differences in creating a new hymnal, we can say and we can proclaim that we are one.”
Posted in Blogroll | Print | No Comments »
KAM Lay Leadership Training Program for Korean Track
October 26, 2008 by admin.
Preparing the Way:
CTS’ Korean American Program Gets Underway
Korean Church Pastors in Atlanta area (front row, from left to right)
Sam Young Kim, Bong Jang, Byung Ho Choi, and Soon Hong Kang
Korean-American Ministries (Paul J. Huh, Director) with Lifelong Learning at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offers a lay leadership program for training newly elected candidates of elders and deacons for their ordination requirement. As the Korean speaking churches in the Greater Atlanta area have struggled with providing quality education and training programs for nurturing ordained lay leaders, this certification program seeks to equip and prepare the ordination for officers in Korean-American Presbyterian Church (U.S.A.).
For 10 weeks on Mondays from 8 p.m. to 10 p.m., the class meets at Bethany Presbyterian Church (Marietta, GA) &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campus. First class began on September 22 and the last class ends on December 1 with a graduation ceremony on Saturday, December 6 on Columbia campus. In addition to 20 hours in class time, 10 hours of off-class project with a report is due on exam day, which is required for a passing grade.
Preparing the way for the immigrant church education happens very late at night after people return from their work late in the evening. At 8 PM, most of the participants have not had a chance to go home from work that Bethany church prepares each week a light sandwich dinner for the hard working students. Currently there are 43 registered laypeople from 3 different congregations in greater Atlanta area. The program plans to repeat the course next Spring for new students from different congregations and offer a different curriculum for those who may want to continue.
The lectures focus on understanding the core value of local church for which all the candidates are called. And it helps to consolidate their identity and goal of the local church which the candidates are represented. This particular emphasis is instructed by the Rev. Byeongho Choi, pastor of Bethany Presbyterian Church in Marietta. The church administration lecture explores how to moderate meetings with better understanding of bi-laws and church organizations including the role of session and presbytery. The instructor is the Rev. Young Kap Kweon, pastor of Good News Garden Presbyterian Church in Norcross.
The pastoral leadership session studies the uniqueness of pastoral leadership from general principles of leadership so that all the candidates can have an awareness of the critical virtue of pastoral leadership in the local churches. The session is led by the Rev. In Soo Jung, pastor of Korean Community Presbyterian Church in Duluth and a long standing board member of CTS. On stewardship for elders and deacons, the session addresses the dimension of spirituality of church leaders in their leadership and deal with how to improve the stewardship. Instructor for the session is the Rev. David Hoonjin Chai, Asian Leadership Associate from General Assembly in Louisville, KY.
Worship course leads the students to have a deeper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the worship service and the meaning of Sacraments for the local churches on the Lord’s Day. Instructor is Dr. Paul J. Huh, Worship Professor at C.T.S. and director of Korean American Ministries. The class on history of Presbyterian Church offers a glimpse of how Presbyterianism has evolved since 17th century until now. The instructor is Dr. Dent Davis, Dean & the Vice President of Lifelong Learning Center.
A Session on confessions of Presbyterian heritage introduced historical evolution of theological confessional perspectives which have developed in Reformed tradition. The instructor is Rev. Dr. Kimberly Clayton, Director of Lifelong Learning Events. The essence and mission of Korean-American Church lecture explores the theological essence of the church in Korean-American context so that the prospective elders and deacons may have a broad and historical perspective on the mission of the church.
Instructor is the
Rev. Sam Young Kim, the pastor of th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Georgia in Jonesboro.
Polity course will cover the essential parts of polity described in the Book of Order with its instructor, the Rev. Bong Jang, pastor of Korean Central Presbyterian Church in Chamblee. The committee system of Presbyterian denomination and the characteristics of team ministry are covered by the Rev. Soon Hong Kang, a newly installed pastor at Hanbit Presbyterian Church in Duluth. The last class on sharing dreams with the participant’s church pastor based on submitted project report is instructed by the Rev. Jae Hong Kim, the coordinator of the Lay Leadership Training Program for Korean Immigrants. And Graduation and Commissioning Service is planned for Saturday, December 6, joining Portuguese and Spanish Immigrants track of the Lay Leadership program.
Korean American Ministries at Columbia stands to serve the churches of Jesus Christ in South Atlantic area advising Korean, Korean American, and Asian students in all degree programs of the seminary, providing Lifelong Learning Programs for Korean American, Korean and other Asian American churches, and raising Korean American and Asian theological voices in U.S. and global context.
Being an immigrant child and raised in U.S. from 8th grade in middle school, I was brought up in both worlds of Korea and America. These two cultures often pull me apart in different directions, and at the same time they provide a creative tension in developing a new identity. We live in two worlds at once, the one always informing the other. The followers of Jesus Christ are to be truly in the world and at the same time live in the world of the Bible preparing the ways for others to follow.
The Lifelong Learning Center and Korean American Ministries will prepare the way of Jesus Christ’s coming in providing conferences for the Korean Pastors on March 2-5, 2009 and the Calvin Institute of Worship granted event of “Korean Conference on Worship & Music,” August 3-6, 2009. A number of other ministry resources including quarterly academic journal of Korean American Ministries is also preparing the way for its very first printed issue. It is an exciting time to be at Columbia! (Paul Junggap Huh)
Posted in Blogroll | Print | No Comments »
KAM Newsletter 10호, 2008년 10월
October 25, 2008 by admin.


인사의 글
한미목회실에서 콜롬비아 평생교육원의 한 프로그램으로 9월 22일서부터 지역교회 안수집사*장로 제직 리더십 훈련을 시작하였습니다. 월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10주간 베다니장로교회, 조지아 한인교회, 한빛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교수진과 애틀랜타 지역교회 목사님들을 강사로 짜여지고 12월초에 신학교에서 주는 수료증을 졸업식과 함께 수여할 계획입니다.
현재 총 43명의 인원이 등록되어있으며 2009년 봄학기에도 계속교육이 진행되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많은 교회와 제직들이 계속참여하는 알찬 교육이 되어지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아울러 한미목회실의 첫 공식 교육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게 애써주시고 도와주신 애틀랜타 지역 장로교회와 목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저녁은 노량진교회 강신원목사님(전 시카고 한미교회 담임)께서 오셔서 한인학생들이 인도하는 예배의 설교를 하십니다. 이미 지난 학기에 졸업한 Christopher Hobson이라는 미국학생이 한국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며 주말에는 노량진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지라 콜롬비아 신학생들의 관심과 기대속에 오십니다. 앞으로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이러한 교류와 기회가 더욱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학교에서는 이번 학기 가르치는 “예배와 음악“수업과목과 함께 평생교육원 소위원회 위원장의 역할을 맞게되었고 8월에 있을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모일 예정입니다. 또한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사물놀이 팀과 현악4중주가 생겨졌으며 매일 새벽기도회 및 수요 저녁예배등 활발한 기도모임들이 학교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총회 출판위원회와 예배신학위원회가 추진하는 2012년 발행예정인 미국 장로교 찬송가 위원회에 위촉되어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혼자서 할 수 없음을 옆에서 보던 아내가 자원하여 한미목회실의 일을 도와주게 나서게 됨이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을 통하여 하루 하루 한미목회실의 사명과 하여야 할 일들이 드러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음 달에는 그동안 준비하였던 영문학술지 출판의 소식을 전하여 드리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10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료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주님의 계명
10월 한 달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설교함을 계획한다.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는 산상복음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신 예수님의 계명을 조명하며 출애굽기의 십계명 중 제1, 제2, 그리고 제4계명에 집중한다. 또한 율법사들과의 논쟁에서 사랑의 새 계명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통하여 주님의 계명을 강조하는 연속 주제설교(lectio continua)를 실천한다.
10월 5일: 27번째 평주일
출20:1-4, 7-9, 12-20; 시19; 빌3:4b-14; 마21:33-46
십계명 중에서 제4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루어본다.
하나님의 계명이 전해졌을 때, 안식일의 계명은 가장 길고 제일 이해가 가지 않는 사항이었다.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성경에 나와 있는 두 곳의 십계명 본문(출애굽기20:8-11과 신명기5장12-15)에서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서로 다른 형태로써 나타난다. 두 곳 모두 같은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즉,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는 쉬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명을 지켜야 하는 서로 다른 이유를 말하고 있다. 두 가지 이유 모두 인간을 향한 하나님 관계의 근본적인 진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출애굽기(20:8-11)에서 안식일을 기억하라는 말씀은 창조이야기에 근거하고 있다. 인간들이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모형은 창조주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간다. 하나님께서 쉬신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도 하루를 쉬어야 한다. 일과 쉼 사이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속에 있다.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들은 이 계명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경배한다.
반면 신명기(5:12-15)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노예의 신분에서 막 풀려난 사람들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노예들은 하루도 쉴 수가 없다. 쉼은 자유인들만 가능한 것이다. 일곱 번째 날이 되어 일을 멈출 때마다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이 노예의 신분에서 그들을 구하였음을 기억하고, 그들의 땅에서는 아무도, 심지어 기르는 가축까지도 휴식 없이는 일을 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고된 노예 생활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되풀이하여 증거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 견해로 나타나는 안식일의 계명은 히브리 성경의 창조와 출애굽, 하나님 형상 속의 인간, 그리고 사로잡힘에서 해방된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이야기와 신앙을 요약하고 있다. 이 두 본문 속에서 하나는 거룩함을 이야기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은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체를 유대교 율법인 토라의 유형을 통하여 보여 준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은 출애굽기와 신명기의 개념과 함께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세 번째로 더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는 이전과 달리 변화되어 이제부터 거룩한 날은 제7일이 아니라 제8일이며, 창조, 해방, 그리고 부활의 세 가지 안식일의 의미가 주의 만찬을 중심으로 천국잔치의 종말론적 신학으로 이어진다.
27번째 평주일 설교실제 도로시 배스, “좋은 안식일은 좋은 그리스도인을 만든다,” 『일상을 통한 믿음혁명』허정갑 옮김 (예영출판사, 2004)을 편역하여 상황설교로 정리함.
우리는 유한한 인간으로서 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복잡한 소용돌이와 같은 현대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루를 떼어 쉬면서 예배하는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이에게 평화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의 개념을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안식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안식일이 오면 상업은 멈추고, 잔치가 벌어지며,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같이 놀 수 있는데 세상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동시에 한 주에 일하는 신성한 노동을 확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식일의 훈련은 유대교의 중심적 사상에서 시작되며, 조금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이 주는 놀라운 선물을 만끽하기 위해서, 먼저 부정적인 선입견들을 버려야 합니다. 안식일은 규칙이나 제한된 모습이 아닙니다. 흔히 가톨릭에서는 지켜야할 의무로, 개신교에서는 어린이들이 놀지 못하는 날쯤으로 다루고 있지만 안식일은 성경의 창조와 출애굽, 부활에 맞추어 그 의미가 재조명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형식은 엿새는 일하고 하루는 쉰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과 기독인들의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이야기는 제 칠일을 등장으로 최고조에 이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휴식을 취하십니다. 그리고 이날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선포하시는 모습입니다. 쉰다는 것은 만들어 놓은 것들을 즐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더 낳은 세상이나 인간보다 더 훌륭한 피조물을 계속 만드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안식일은 유대교의 심장입니다. 신앙에서 멀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자 할 때 랍비들이 한 목소리로 안식일(샤밧)을 지키자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운 역경 속에서도 그들의 주체성을 유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이 가져다주는 유대인으로서 삶과 리듬을 강조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이 전하여지는데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지켰노라”고 합니다.
샤밧은 금요일 저녁 해 질 때에 여주인이 안식일 초에 불을 붙임으로써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옷을 잘 차려입고 가장 좋은 식탁 장식과 음식을 준비하며 손님들을 환대합니다. 안식일의 예배에서는 전통적인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슬픔을 생략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축복하고 그들에게 달콤한 향을 먹여 평화의 안식일이 혀끝에 오래 머무르도록 합니다.
유대교 예배와 율법은 샤밧에 해도 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은 바로 노동입니다. 한 주간 내내 인간은 자연과 씨름하며 경작했지만 안식일에는 자연 그 자체를 경축하고 평화와 감사 속에 공존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 역시 감사함으로 세상의 선물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이 날 무엇을 하여야만 하는가요? 유대인들은 특별한 종교 의식으로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율법서를 읽습니다. 그러나 샤밧의 거룩함은 율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날 사람들이 체험하는 기쁨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결혼한 부부가 이날 사랑의 관계를 갖는 것 모두 선한 행위로 인정됩니다. 걷는 것, 쉬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야기하는 것, 읽는 것 등은 모두 좋은 것으로 인정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유대인의 샤밧이 따분한 제도나 구속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매주 안식일로 짜인 생활을 하는 자들에게는 안식일이야말로 자신과 자연, 일, 하나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힘 있게 묶어주고 고쳐줄 수는 훌륭한 방법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유대인과는 조금 다른 안식일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계약에 기초하지만,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합니다. 물론 모세의 계명과 유대인들의 전통을 함께 공유하면서, 유대인들처럼 매 안식일마다 창조주와의 관계를 감사하고 이집트를 탈출한 해방의 기쁨을 나눕니다. 그러나 여기에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추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승리는 안식일을 매주의 휴식과 예배인 날인 동시에 부활의 잔치의 날로 만드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게 한 주간의 첫째 날은 제자들이 부활한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특별한 날입니다. 이 날 이스터(Easter)에 그들은 같이 모이고, 먹고,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 날은 휴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때는 과도기로서, 유대인을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에 큰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에게 파괴된 뒤 새로운 유대교의 모습을 만들어야 했던 랍비들은 하나님과 언약의 마지막 상징으로 샤밧을 강조하였고,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면서 점차로 회당 출석과 유대법 준수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일요일에 하루를 쉬고 예배드리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도 유대교의 안식일을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랍비와 달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선포하며,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습니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다른 9가지 시내산 계명과 함께 안식일의 계명도 귀하게 지켜왔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거룩한 날은 제7일이 아니라 제8일이며, 매 주일을 성찬 등의 의식을 통해 예수님의 고통과 부활을 돌아보고 큰 잔치로 맺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리듬을 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일을 하고 돈을 써야하는 상황뿐만 아니라 다른 방해물들이 안식일 지키기를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일요일이 특별한 날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각종 국가 자격 시험들이 일요일에 치러지고, 결혼식 등의 행사들이 일요일에 열립니다. 두 번째 방해물은 오히려 지나치게 안식일의 행동들을 통제했던 기독교의 과거 역사입니다. 일요일마다 종일 교회에 있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일요일날 여가를 즐기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은 재미없는 날로 인식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오늘날의 경제 상황입니다. 현대사회는 일요일의 쇼핑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상업 활동에 내몰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오늘날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에 바쁜 우리 2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도 다양성을 존중하며, 기쁨을 열망하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영원히 지속되는 창조와 해방, 부활에 뿌리를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하면서 서로를 도울 때만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풍부한 창의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공회 신부인 틸든 에드워즈는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유연성을 갖도록 권면하면서 안식일주의가 아닌 ‘안식일 시간’을 맞이하라고 호소합니다. 장로교 목사인 유진 피터슨 매주 월요일 마다 아내와 함께 시골로 여행하며 안식을 즐깁니다. 물론 안식일을 자기가 편한 아무 때나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 서로 도와야지만 절대 평범하지 않은 이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일요일이 제일 좋은 안식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성찬의 잔치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모이고, 하루를 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 승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함께 예배하는 친구들과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교회 가는 일 말고 기독교에서 지키는 안식일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각 상황에 따라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에 무엇이 옳지 않은 것인가요? 이것은 3,000년이 넘는 유대교의 사상을 차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옳지 않은 것은 일과, 상업, 근심입니다. 7일중 하루만큼은 일을 안 하고도 먹고 살 수 없다면 이것은 관대한 조물주의 풍성함을 거부하는 자만의 모습으로 비쳐질 뿐입니다. 7일 중 하루 일에서 떠나서 쉬는 것은 하나님과 기쁘고 감사한 관계를 재정립하고 자연을 평화롭게 감상하게 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 시간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다른 이들에게 무리한 일을 강요하지 않도록 일깨워줍니다. 상업 역시 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한 필요조건을 만들어 가며, 사실 그 자체가 일입니다. 그리고 ‘근심’이란 걱정을 우리의 마음에서 완전히 몰아내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근심을 안겨다 줄 활동을 멀리 할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돈을 지불하고, 세금 내고, 다음 주에 할 일에 대한 계획표를 미리 만들기 등을 멀리 함을 말합니다.
기독교 안식일에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요? 가장 중요한 것은 기쁨의 예배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의 다른 지체들과 하나 됨을 회복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모든 일요일은 부활주일입니다. 말씀을 듣고 떡을 떼며 그리스도를 알아봅니다. 이날은 축제요, 마음에서 솟아나는 생수요, 일 뿐만이 아닌 모든 비난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는 날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일예배가 그저 ‘교회에 다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모습에 깊이 참여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예배 후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필요합니다. 다음 주의 스케줄을 빈틈없이 짜는 ‘유용한’ 시간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와 같이 놀고, 웃고, 그냥 시간을 같이 보내며 즐길 수 있는 ‘버리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혼자만의 시간, 낮잠, 독서, 명상, 걷기, 기도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거동이 불편한 자들을 찾아 방문하거나 외로운 자들을 기독교 안식일에 초청하여 식탁을 나누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얻는 기쁨은 다른 약속에서 느끼는 압박감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교회 역시 안식일의 자유를 빼앗아서 종교적인 의무 사항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좋은 안식일은 좋은 기독인을 만든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정기적이고 절제된 영적 생활은 신실함의 기초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서로 도와주며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하나님의 창조, 해방, 구원이 말뿐이 아닌 실제적으로 적용되고 실천되며, 온 세상에 그 복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좋은 안식일은 좋은 사회를 만듭니다.”
안식일 지키기 운동은 현대 기술 문명에서 인간이 자립하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일에서의 자유를 정기적으로 누리는 것은 사회와 지구 공동체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주는 행동을 반성할 수 있고 돌아볼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안식일은 좋은 사회를 만들고, 일의 권리와 열매의 균형을 가져다주며, 모든 일하는 사람과 축하하는 사람들의 균형을 이룹니다.
한 주일의 하루, 휴식과 예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결코 많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좋은 시작일 수 있습니다. 일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다른 이들과 서로 축하하며 우리가 진실로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이 진정 중요한지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 주 거듭되는 이 하루에 우리는 매일 매일을 새롭게 하도록 삶의 여정을 지탱할 닻을 내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설명이 필요하겠습니까? 안식일은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우리의 편의주의로 지키는 율법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를 지켜줄 안식일을 우리는 제대로 지킬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계명의 근본적이요 기본적인 모습인줄 믿습니다.
10월 12일: 28번째 평주일
출32:1-14; 시106:1-6, 19-23; 빌4:1-9; 마22:1-14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본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그러나 본문은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의 위험한 찬양을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기다리다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모세를 기다리지 않고 애굽에서 가져온 귀금속 장식품들을 꺼내어 우상을 만드니 아론이 그 이튿날이 여호와의 절기임을 공포하였다. 다음날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면서 축제의 절정을 이룬다.
우리는 홍해를 건너 그들을 구원한 하나님을 까마득히 잊고 이처럼 파렴치하게 어긋난 모습으로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만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대상을 혼돈하기에는 마찬가지로 높은 위험순위에 있음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송아지의 모습을 선호하여 우리 옆에 두고 조정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주위에 신들이 있고 또한 이보다 큰 권능의 하나님이 계심을 기록하고 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질투하는 하나님은 이를 어기는 자들에게 삼 사대까지 벌을 내리시고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약속하신다.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찬송이 더 좋으냐? 혹은 설교내용이 내 마음에 드느냐? 혹은 예배가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느냐? 에 있지 않고 예배의 대상이 오로지 하나님께만 있느냐? 에 대한 답을 찾고 계심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찬양의 대상이 분명치 않으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본다. 구도자 예배를 주장하며 쉽게 그리고 정서적으로 민감한 비신자 초청의 목적으로 예배를 준비함이 또한 예배자를 스스로 가두는 결과를 보게 된다. 반면에 기독교가 불상을 훼손한 사례들을 보면서 오히려 다른 집의 잘못됨을 지적함 보다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 자신의 모습에서 없애지 못하는 우상의 모습들을 없애는 것이 첫 순서이지 않은가 싶다. 특별히 권력을 지향하는 기독교와 이에 반응하는 한국시민들의 예민한 감정대립 속에서 우리 자신의 우상은 무엇인지를 돌아본다.
이집트의 농경문화에서 시내광야의 유목민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의 상징이 표현하듯 유목민이 아닌 다시 농경문화로 돌아가기를 지향하는 바와 같이 우리를 안정되게 할 수 있는 편안한 세상적 성공 가치관을 선호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현실의 이익을 계산하여 먹고, 마시고, 일어나서 뛰노는 잔치를 더 좋아한다.
이에 화가 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명을 어긴 백성들을 진멸하려 하심을 보고 모세는 간청을 한다. 그 논리의 주장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기를 아뢰인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과 맹세한 영영한 기업을 여호와께서 잊지 않으시기를 기도하는 모세로 인하여 그 화를 삼키시고 뜻을 돌이키사 백성들을 품으시는 장면으로 본문은 마무리된다(14절).
10월 19일: 29번째 평주일
출33:12-23; 시99; 살전1:1-10; 마22:15-22
십계명중 2번째 계명은 우상을 새기지 말라(출20:4)고 하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성전에서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를 놓고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사용하시며 시험을 당하신다. 교회는 정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신앙인은 더욱 더 정치세상에서 빛을 발하여야 한다는 주장의 대립선상에서 그 해결책을 구하고자 본문이 자주 인용되지만 그 내용의 범위를 넘어서 본문의 내용이 아닌 것을 확대하여 이야기함은 자제하여야 할 것이다.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시험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헤롯당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로마를 지향하며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을 통치하는 권력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었고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종교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로마통치를 수동적으로 받아드리는 종교인들이다. 서로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두 집단이 예수님의 약점을 잡는다는 공동의 목적으로 모처럼 손을 잡고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이방제사장인 로마황제 가이사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 우상을 놓고 일어난 사건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가르치신 것일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동전으로서 그 분의 형상을 나타내길 바라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가이사가 우리의 재물을 원한다면 기쁜 마음으로 돌려줌으로서 재물에 매여 있지 말라는 가르침과 함께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먼저 따라야 함을 본문은 암시하고 있다.
사실 세금에 대한 권력의 모습은 빙산의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더 큰 엄청난 요구를 하는 세상과 온전한 헌신의 계약을 계명으로 요구하시는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신앙인은 갈등한다. 그러나 본문의 가르침은 양 쪽의 요구를 다 충족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세상의 의무와 책임감을 100% 시민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의무와 책임감도 100% 천국시민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하며 이중 언어를 사용하는 이중국적의 신앙인을 말한다. 두 나라를 동시에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의 모습이다.
사실 동전에 새겨진 대상을 위하여서는 동전에 해당되는 이익을 돌리면 되지만 그 이미지가 쉽게 새겨질 수 없는 조물주께 드리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 피조물의 모든 것을 드려야 함이 마땅하니 더욱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언젠가는 가이사의 것도 하나님께 돌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10월 26일: 30번째 평주일
신34:1-12; 시90:1-6, 13-17; 살전2:1-8; 마22:34-46
사두개인들이 물러서자 바리새인들이 몰려와 예수님을 시험하여 율법 중 어느 계명이 큰지 물어본다. 물론 율법학자라는 전문인의 방법론으로 그를 곤경에 처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총 정리하여 새 계명 2개를 소개하시는데 이는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신명기 6:5)과, 둘째로 이웃을 사랑할 것(민수기 19:18)을 가르치신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십계명을 포함한 수많은 구약의 율법들을 총 정리하여 요약한 계명이다.
처음으로 돌아가자! 처음도 사랑이요 둘째도 사랑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 황금률 계명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결정체로서 예수님 공생애의 첫 가르침으로 안내하고 있다. 그는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마태5:17)를 말씀하시며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기를 바라신다. 산상복음의 요약이기도 한 이 계명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일관된 목회관과 교육관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계명이 더 큰가에 대한 질문에서 예수님의 대답은 어느 율법이 제일 중요한 것을 밝힘 보다는 율법의 전체성을 보여주며 어떠한 작은 율법이라도 그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태5:19)라고 하신 예수님의 첫 가르침 내용인 산상복음을 기억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계명의 근본임을 확인시켜주는 장면이다.
게임을 즐기는 과정 속에 본래 의도하였던 규칙이 희미해지고 분명치 않을 때에 의견이 달라지며 혼란이 일어난다. 이 때 누군가 처음의 규칙을 정확하게 다시 규정지으며 밝힐 때에 그 게임은 더욱 흥미로워지고 임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집중하게 된다. 계명은 우리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라 우리를 자유롭게 함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이웃 간의 관계를 분명히 하여주고 그 안에서 마음껏 사랑을 즐길 수 있도록 하여준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을 주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첫 가르침이며 우리를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안내하시는 계명인 것이다.
첫 사랑의 회복, 이것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새 계명의 핵심이다.
Posted in Newsletter | Print | No Comments »
KAM Newsletter 9호, 2008년 9월
October 25, 2008 by admin.


인사의 글
곧 2008-2009 새 학기가 시작합니다.
새 오피스가 한미목회실로 배정되었습니다. Harrington Center 229호실로 2층 채플실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2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는 Suite입니다. 그동안 Richardson Center 3층에 위치한 저의 교수 개인연구실은 한미목회실로 사용하기에 여러모로 불편하였는데 총장님과 Lifelong Learning Director인 Dent Davis교수님의 도움으로 좋은 사무실로 이전하게 되어 기쁩니다. 여러분들의 방문을 기대하여 봅니다.
이번 학기에 새로 입학한 M.Div. 학생들은 합50명입니다. 그 중 한인 학생들은 5명인데 모두 영어권의 남학생들입니다. 학교 입학처에서는 내년 새 기숙사가 완공됨과 함께 입학정원을 75명선까지 올릴려고 합니다. 더 많은 한인학생들이 지원할 수 있습니다. 현재 재학생 7명과 Th.M.에 새로 입학한 5명을 합하면 17명의 한인학생들이 학위과정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D.Min.과정과 정규학위과정이 아닌 특별학생들을 포함하지 않은 숫자입니다. 이 중에서 아직 교회봉사가 정하여지지 않은 학생들을 위하여 교회안내를 시도할 계획입니다.
오는 9월 22일서부터 지역교회 안수집사*장로 평신도 제직교육을 시작하기로 하였습니다. 월요일 저녁시간을 이용해 10주간 진행되는 프로그램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 교수진과 애틀랜타 지역교회 목사님들을 강사로 짜여지고 12월초에 신학교에서 주는 수료증을 졸업식과 함께 수여할 계획입니다. 문의 사항은 김재홍목사(678-665-9927)에게 연락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겨자씨의 믿음이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9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료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초청
하나님 나라에서는
서로 용서하라고 초청하시고 (마18:15-20)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또 부탁하시며 (마18:21-35)
포도원의 일군으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일군으로 초청하신다. (마20:1-16)
우리 또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기쁨으로 참여하도록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마21:23-32)를 감사하며
9월의 말씀을 준비한다.
9월 7일: 23번째 평주일
출12:1-14, 22-23; 시149; 롬13:8-14; 마18:15-20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시마고 말씀하심은 정말 획기적인 주님의 약속이다. 두 사람이 모이면 세 가지 네 가지 다른 견해로 갈라지고 나뉘어져 하나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예수님도 알고 계신 것 같다.
우리는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의 효과로 시청과 중앙청에 수 십 만의 인파가 모여들어 하나된 것처럼 보이지만 대중이 다(多)중이 되고 구경꾼으로 전락한 군중의 모습에서 서로의 이익만 추구할 뿐이지 진정으로 하나 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기만 하다.
서로의 갈라진 관계가 회복되고 합심하여 하나 됨은 용서와 화해와 같은 실천이 있기 전에 상대방에 대한 관심, 시간, 물질이 동반한 투자가 있어야 한다. 본문의 내용은 회중속의 동등한 두 사람의 화해를 말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지도자와 청중의 관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두 사람이 합심하지 못함은 공동체의 한 지도자가 목자의 책임감을 벗어 던지고 잃어버린 양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말한다. 무엇이 두려워서 그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에 처한 양을 구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처럼 하나 된 모습으로 믿고 따르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이 세상에 못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다.
지도자나 청중의 실수와 과오를 그냥 덮어두거나 용서하지 못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합심하여 같이 그 잘못을 나누고 화해하는 모습,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책임을 서로에게 묻는 것 보다는 잘못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사건을 분석하여 서로 더 좋은 지도자와 청중이 되도록 배려하여 주는 공동체의 모습을 말한다.
아울러 ‘두 사람’을 개인으로만 보지 않고 확대하여 본다면 두 문화, 두 언어, 두 이념 등 결코 하나 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이질 공동체를 조명할 수 있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이념이 달라도 서로 합심하면 이 땅에서 풀지 못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현대교회에 부탁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제목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용서하고 기억하는’ 교회공동체 모습으로의 부름이다. 서로를 용서하라는 부르심을 기억하여 겸손함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아름다운 회복의 사역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선한목자로 그의 목숨을 바쳐서 우리를 구하여주심을 기억하여 서로 용서하고 하나 됨을 추구하는 온전한 공동체 사역이 되기를 기도한다.
9월 14일: 24번째 평주일 (추석)
출14:19-31; 시114; 롬14:1-12; 마18:21-35
용서의 공식이 수학문제 풀듯이 존재하겠는가? 예수님의 비유로 진행되는 본문은 임금이 그의 종들과 잔금을 치르고자 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폭력과 용서가 진행된다. 공평을 강조하는 듯 시작된 비유의 전개는 용서의 반전을 이룬다. 그런데 용서받은 종이 그의 동료의 숨통을 조인다는 소식을 들은 임금은 그의 자비를 번복하여 화를 감추지 못한다.
우리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폭력과 죄에 대한 벌의 모습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생각되지만 이것이 바로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인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폭력과 인과응보의 사상으로 얼룩져 있음이 사실인 것이다. 어떠한 모양이든 이 세상은 죄에 대한 값을 치루거나 보상을 받아야만 하는 원칙으로 살아야하는데 진정하고도 무조건적인 용서가 있을 수 있는가?
본문의 비유가 과연 용서를 가르치고 있는가? 이야기의 첫머리에 임금이 갚을 길이 없는 종의 빚을 탕감해주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잠시 일어난 용서이다. 그 종이 그의 동료를 용서하지 못하고 빛 진 자의 목을 잡고 빚 갚기를 위하여 옥에 가두는 것을 듣고 임금은 그의 용서를 다시 번복하여 옥에 가두고 빛을 다 지불할 때까지 고문을 마다하지 않는다.
인내의 한계에 다다르면 폭력으로 치닫는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유의 줄거리는 우리의 능력으로는 조건부적인 용서가 가능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은 무조건적이며 관대한 용서만이 불가능을 가능하게 함을 가르치고 있다. 7번이란 숫자를 세지 말고 무한정의 용서를 되풀이 할 것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기심과 물질만능주의로 손해 안 보려는 욕심과 폭력으로 만연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어려운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방문하여 친지를 만나게 된다.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나 모두 용서의 새로운 관계가 필요한 때이다. 가족끼리 아직도 풀리지 않는 관계가 있다면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용서하는 사람이 되도록 초청함을 잊지 않는다.
9월 21일: 25번째 평주일
출16:2-15; 시105:1-6, 37-45; 빌1:21-30; 마20:1-16
포도원 일군을 비유로 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초점이 일군의 먼저 됨과 나중 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에 있다.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쉬지 않고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님의 수고하심에 있지 우리의 노력이나 재능에 있지 않음을 확인하여주는 본문이다. 본문은 누가 먼저이고 누가 나중이냐의 질문,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공평함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 즉 소명을 제공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조명하고 있다. 만약 포도원 주인이 그 다음날 일군을 찾으러 아침 6시에 나갔다고 하면 아무도 일하러 오질 않았을 것이다. 오후 늦은 시간에 일을 시작해도 같은 일당을 받는데 왜 이른 아침부터 수고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포도원 주인과 일군의 심정 및 태도의 차이이다. 탕자의 비유(눅15)와 같이 순서가 뒤 바뀌는 반전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자를 찾게 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할 일없이 빈둥대는 백수와 백조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역에 참여하도록 초청받는 신나는 일이다. 포도원 비유는 하나님 나라로의 초청에 그 핵심이 있다.
윌리암 윌리몬(William Willimon) 미국연합감리교 감독의 설교를 소개한다. 그는 미국 10대 설교자 명단 안에 열거되는 영어권 강단의 영향력 있는 학자요, 교회행정가, 설교자이다. 본문의 비유가 진행하는 반전의 이야기 전개와 같이 윌리몬은 설교의 내용까지도 이야기의 반전을 꾀하며 긴장을 갖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끝까지 들어야 하는 귀납적 내러티브 설교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교회력 설교자료를 제공해온 윌리몬은 세례를 통하여 보는 설교란 주제를 화두로 던지며 다음과 같은 상황설교를 마태복음 20장 본문을 중심으로 펼치고 있다.
상황설교 [윌리암 윌리몬의 설교 편역 - Peculiar Speech (Eerdmans, 1992)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때가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우리가 참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의 윤리도덕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가리켜 마치 추수를 앞둔 포도원 주인과 같다고 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새벽부터 시장에 나가서 일할 고용인을 찾습니다. 일군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씩 약속을 합니다.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면 오늘날 적게 잡아서 5만원, 아니면 많이 생각해도 10만원이 아닐까 합니다. 일군들은 오늘만큼은 놀지 않고 일하게 됨이 감사하여 아침 6시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오전9시쯤 되어서 농장을 바라보니 일을 끝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일할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그래서 다시 시장으로 나가 일할사람들을 찾습니다. 아직도 일거리를 찾지 못해서 서성거리는 사람들을 부릅니다. 제일 귀중한 아침시간이 다 지나가는데도 포도원에 들어가 일하기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본문엔 “상당한 보수”라 하지만 원문과 대조할 때 “정당한 보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주인은 계속하여 12시 오정시간에도 시내에 나가봅니다. 주인은 역 근처에서 할 일 없이 서성거리는 자들을 불러 일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날의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오후3시에도 다시 시내에 나가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청년 두엇을 발견합니다. 벌써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긴 그림자를 밟는 시간입니다. 할 수 없지! 하면서 그들도 고용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정당한 보수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주인은 쉴 수 없습니다. 곧 큰비가 올 것인지 아니면 포도가 너무 익어서 지금 안거두면 상하게 되는지 이유야 어쨌든 할일이 아직도 얼마나 남았기에 마지막으로 오후 5시경에 다시 한 번 시내로 들어갑니다. 이제는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시간입니다. 하루의 일할 때는 이미 지나간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두 사람이 일을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인 오후 6시까지는 이제 한 시간밖에 안 남았는데도 주인은 마찬가지로 정당한 보수를 약속하며 고용합니다.
이미 아시는 바대로 포도원에서 땀 흘려 일한 사람들의 노동 시간의 차이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12시간, 9시간, 6시간, 3시간, 혹은 1시간만 일한 이 들도 있습니다. 자! 이제는 일한 삯을 지불할 때가 되었습니다. 본문을 기억하신다면 일군들과 약속한 정확한 액수는 한 데나리온. 오직 제일 처음에 온 일군들에게만 약속한 액수입니다. 그러나 이 고용인은 평범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게 제일 마지막에 온 일군에게 먼저 지불합니다. 모든 이들을 깜짝 놀라게도 한 시간만 일 하였는데 한 데나리온을 건네줍니다. 다른 일군들은 잠시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12시간동안이나 땡볕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한 우리들은 혹시 12데나리온을 주시지 않을까?
아닙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이미 약속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습니다. 곧 불평의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공평하지가 못하다고. 그러나 공평은 표면상의 모습이지 그들이 이미 주인과 약속한 한 데나리온은 이미 정당하게 지불된 상태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20장의 비유가 시작되기 전 19장 마지막 절에 다음과 같은 암시를 하여 줍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장 31절에 또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하십니다.
“아하! 알겠습니다.” 제자들은 말합니다.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고 예수님을 시험하고 조롱하는 그 바리새인들이 바로 하나님나라에 먼저 된 자들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교만성과 자신들만 의롭다고 하는 눈가림이 결국에는 나중으로 밀려나고 조롱받고 핍박받는 우리들이 그들을 앞서 천국에서 먼저 될 것이라는 것이군요.”
“아하! 알겠습니다.” 초대교회는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약속된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나라에서 나중 되고 우리 소외된 이방인들이 처음 될 것이라는 말이군요!” “우리는 비록 하나님나라에 나중에 왔지만 처음 온 자들과 꼭 같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군요!”
글쎄요! 오늘도, 지금 이 시간도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불평과 시기, 질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처음 온 사람들이야 할 수 없지! 하고 나는 마지막에라도 참석했으니 다행이야”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여기까지만 여러분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셨다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복음의 핵심을 받아들인 바는 못 됩니다. 다음의 비유가 도움이 되시리라 믿습니다.
강의 첫 시간에 교수는 학생들과 대면하면서 이렇게 과목을 설명합니다. 학생여러분, 자 여기에 대단히 어렵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수학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이 문제 하나를 여러분이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이번학기 성적이 달려있습니다. 이 문제를 학기 첫 시간서부터 여러분께 드리는 이유는 지금부터 당장 작업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목을 패스하려면 지금 이시간서부터 시작하세요. 여러분 모두가 이 문제의 해답을 풀음으로 모두 A의 성적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A를 받고자 하는 저는 그 문제를 안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학기 첫 주간서부터 열심히 책을 읽습니다. 도서실에서 모든 자료들을 뒤적여 봅니다. 해답을 얻을 수 있는 공식을 만들어 보려고 밤낮으로 갖은 애를 다 써봅니다.
그런데 학기의 중간이 지나가도 같은 클래스에 있는 학우들이 나처럼 열심을 내는 모습이 통 보이지가 않습니다. 게을러서 공부 안하는 거야 할 수 없지, 나만이라도 열심히 해야지. 아마 학기말이 오면 모두들 후회할거야 하고 학기 첫 주간서부터 공부를 시작함에 사뭇 자랑스럽게 생각하여봅니다.
학기말고사 1주일 전에 저는 수학문제의 마지막 정리를 여유 있게 다듬어 나갑니다. 클래스의 다른 몇 친구들은 이번 주에 집중하여 열심히 풀어나가면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들은 아직 시작도 못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정하여진 시간 안에 완성하여 제출한다는 것은 그들에겐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자! 드디어 학기말을 끝내는 마지막 시험 날이 왔습니다. 저는 자랑스럽게 준비된 문제해답을 잘 묶어서 교수에게 제출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클래스에 있는 모든 학우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그 어려운 문제를 다 풀어서 교수님께 제출하는게 아니겠어요? 도대체 어떻게 해내었을까? 궁금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문제해답지를 제출하면서 제각기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습니다. “교수님, 지난주에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교수님이 안도와 주셨으면 저는 아마 아직도 못 끝냈을 겁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교수님 여기 있습니다. 모두 마쳤습니다. 어제 저를 도와주셔서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이야기합니다. “교수님! 어제 저녁에 밤늦게 저희 기숙사에 와주셔서 도와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여기 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미칠 지경입니다. 어쩐지 수상하더라! 내가 열심히 문제를 풀기 위해서 혼자서 끙끙 거리며 도서실과 공부방에 한 학기 내내 처박혀 있는 동안 이 교수님은 쓸데없이 학교 캠퍼스를 온통 돌아다니며 모두에게 그 해답공식을 가르쳐 주고 있었단 말인가? 나만 빼놓고 모두에게 특혜를 준 셈인데 너무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합니다.
참다못하여 교수에게 따져봅니다. 그랬더니 대답은 “왜 나에게 불평입니까? 내가 선하게 한일이 잘못됐습니까? 클래스의 이번학기 목표는 그 수학문제를 푸는 것에 있었습니다. 원우께서는 그 어려운 문제를 혼자서 풀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학생과 같지 않아서 나의 도움이 조금씩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번학기 당신의 점수 A입니다. 다른 학우들도 모두 A점수를 받았어요. 그것이 뭐가 잘못됐다는 겁니까? 내가 약속을 어기는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그래도 왠지 속이 시원치가 못합니다. 그냥 배가 아파옵니다. 내가 받은 A성적을 보니 처음부터 원하던 바이기는 하나 다른 친구들 모두 A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A성적이 진짜 A같지가 않아요. 여러분 이상하지 않아요? 교수의 모든 학생이 성공하기를 원하는 어진은혜가 나에게는 감사히 받아들여지지를 않는다 이 말입니다. (아무도 아멘하시는 분이 없으시군요)
아마도 이것은 이야기의 초점을 아직도 학생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포도원의 비유 또한 이야기의 핵심은 일군과 정당한 품삯에 있지 않고 바로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에 있습니다. 또한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 데나리온씩을 받음과 수학문제의 어려움에 상관없이 모두가 A를 받았음에 우리는 흔히 이번 본문의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란 결코 큰돈이 못됩니다. 아무도 한 데나리온이 얼마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노동자와 그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하루 생활비로 겨우 쓸 수 있는 돈입니다. 하루의 한 데나리온은 관대한 지불이 못됩니다. 다시 말하여 고용인인 포도원 주인이 관대함으로 돈을 뿌린다고는 결코 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바로 우리의 기독교 윤리적인 표본으로 직장인의 품삯을 정하시려고 이 이야기를 하심은 더욱 아닙니다. 바로 오늘의 이야기는 포도원 주인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포도원과 장터를 오고가는 모습에 그 핵심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인은 이른 아침부터 계속하여 일꾼을 구하기 위하여 쉬지 않고 돌아다닙니다. 도대체 왜 주인은 보는 사람마다 포도원으로 부르기로 결심하였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포도원의 열매가 너무 익어서 오늘 중으로 다 따야하는지? 내일은 엄청난 비가 오겠기에 오늘 중으로 수확을 끝내야 하는지? 아니면 일을 못 찾아서 노는 이들과 그 가족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는지?
우리는 자세히 모릅니다. 본문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자세히 묘사된 부분은 어느 주인이 그의 포도원과 장터사이를 수차례 오고가면서 자동차기름을 엄청 없애면서도 길 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쉬지 않고 실어 날랐다는 점입니다. 모든 이들은 아니군요. 주인이 제시한 정당한 보수에 동의하여 일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들입니다.
네! 그러면 무엇이 정당하다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통하는 정당성이란 개인의 기준과 위치에 적당한 보수를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한 직분이나 분야에 오랜 경험과 기술을 갖고 있으면 그것에 상당하는 보수를 요구합니다. 학교의 전문지식을 습득한 석사, 박사학위 소지자는 그만치 시간과 학비를 투자하여 공부하였다 하여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합니다. 머리가 똑똑하다 하여 IQ가 높다 하여 더 많은 보수를 요구합니다. 나이가 많다하여 사회의 경험이 풍부하다 하여 권력과 거기에 상당하는 존경을 받고자 함이 우리에게 통하는 정당성입니다. 교회라고 이러한 지극히 인간적인 정당성이 존재하지 않다고 보시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당성과는 좀 다른 면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당성을 따지자면 포도원 주인도 그의 약속에 어긋남이 없는 보수를 지불했습니다. 단지 모두에게 똑같이 지불했다는 점이 틀릴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가르치는 공명정대함은 바로 주인이 일꾼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한 데나리온이 결코 정당성의 본보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쉬지 못하는 주인이 포도원으로 일꾼을 계속하여 부름에 그 공명정대함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공명정대함은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느냐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모두를 일꾼으로 부르시는 그 초청장에 있는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쉬지도 않으십니다. 계속하여 우리를 천국잔치에 초청하시려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타난 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와 평등 속에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비즈니스의 관념에서 하늘나라와 교회를 이끌어 간다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비즈니스는 다르게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끈기 있게, 인내심으로 계속하여 초청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초청장이 하늘나라의 비밀인 것입니다. 바로 이비밀이 이 땅의 천국으로 세워주신 우리교회의 신념이어야 될 줄 믿습니다. 혹시나 우리의 노력과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서, 밤새워 철야기도한 응답으로서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한 우리의 모습으로서 지금의 우리교회가 세워진 것이라 생각하신다면 큰 오해입니다. 아직도 오늘의 본문말씀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현재 예수그리스도의 한공동체인 교회로서 이 땅에 설 수 있음은 오로지 하나님의 초청장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본문의 은혜의 말씀은 주인의 장터를 향한 번거로운 발걸음에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에 있지를 않습니다. 주인은 모든 이들이 포도원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볼 때까지 만족하지를 못합니다. 의로운 교수는 클래스의 모든 학생들이 A를 받을 때까지 밤에 잠을 못자며 학생들을 도와줍니다. 하늘나라의 잔치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는 잔치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배불리 먹고 마시며 만족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공평하심만을 바라신다면 그것만이 여러분께는 전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께 할당된 한데나리온만 집어 들고 떠나십시오. 그것이 성경의 주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데나리온에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의 참뜻을 헤아릴 수 있는 자들은 기다립니다. 모든 이들이 초청되어 주인과 함께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그 날을 기다리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우리 회중 속에는 여러 종류의 모습으로 초청을 받으신 분들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이른 아침부터 오셨습니다. 수고하며 애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오신지 얼마지 않습니다. 아직 초청을 받지 못하신 분이 계십니까? 아직 이곳에 오시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도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초청장은 우리 모두에게 어느 누구에게나 일할 기회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바로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일찍 온 사람, 늦게 온 사람 상관없이, 우리의 행위나 업적에 관계없이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이것이 사망에서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진리입니다.
9월 28일: 26번째 평주일
출17:1-7; 시78:1-4, 12-16; 빌2:1-13; 마21:23-32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신다. 그러자 어떠한 자격으로 그리고 누가 이런 권위를 허락하였느냐고 시비를 건다. 그러자 하나님의 권세를 가르치시며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종교지도자들의 “무슨 권세로?”라는 질문은 하나님으로부터인가, 사탄으로부터인가, 아니면 스스로 만든 것인가의 질문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권위와 그 가르침(마7:29)은 공생애 시작서부터 계속하여 대두되어온 질문으로서 성전의 권위자들은 이제 예수님을 법정에 세우기 위한 약점을 잡기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 상황이다. 그러하기에 성전에서의 가르침은 특별하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시대가 요구하는 하나의 윤리도덕 선생으로 예수님을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선지자로 보느냐의 갈림길에 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레위인, 에세네파, 헤롯당, 그리고 열형당원 등과 같은 유대 민족주의자들이 칼과 권력으로 무장하여 각 분파로 나누어진 유대인들의 정치 현실에서 누구의 권세로 사람들을 모으느냐의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여 누가 뒤를 봐주느냐이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질문하시며 누구의 권세인지 되물으신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 하자 마태만이 전하는 두 아들의 상반된 이야기를 비유로 전하신다. 누가 아비의 뜻대로 포도원에서 일하였는가? 포도원에 일하기를 초청받은 두 아들은 서로 다른 대답과 실천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사역은 포도원 주인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탁하신 일임을 내비치며 누구의 권위이냐가 아닌 누가 아버지의 권위에 순종하는가를 되돌려 묻는 이야기이다.
물론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겨냥한 비유이지만 오늘의 교회에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교회를 하나의 기관으로서 여기며 하나님 사역을 위한 전도와 갱신을 기쁨으로 행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포도원에 일하러 간다고 하면서 길에 있는 돌이나 치우고 있지 정작 포도를 추수하는 일에는 손도 대지 않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
두 아들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악한 농부들의 비유(21:33-46)와 임금의 혼인잔치 비유(22:1-14)는 권위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으로 연속하여 전해지는 3개의 종합세트 비유시리즈이다.
Posted in Newsletter | Print | No Comments »
KAM Newsletter 8호, 2008년 8월
October 25, 2008 by admin.

2008.8.3. 연합장로교회에서 거행된 목사안수식의 김재홍*김시몬 목사와 캔들러*콜롬비아 학생들
인사의 글
긴 여름 기간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제는 개학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동안 한미목회실은 2개의 그랜트를 받았습니다. 하나는 $15,000의 칼빈대학교와 릴리재단이 주는 예배와 음악 컨퍼런스 (2009년 8월 3일-6일 콜롬비아 캠퍼스)비용이고 또 하나는 루스재단과 기독교 미술학회가 주는 $5,000의 ‘서예와 한국기독교 미술‘에 관한 워크샵 비용입니다.
그랜트가 주는 격려와 함께 준비된 행사를 잘 계획하여 좋은 모임들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또한 남대서양대회가 준비한 파나마시티에서의 20차 연합가족 수양회 총회에서 나눔과 같이 평신도들을 위한 평생교육, 목회자들을 위한 계속교육을 준비하고 이민신학을 위한 영문저널을 발행하기 위하여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계속 기도하여 주시고 새로 입학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인도하여 주시길 기도 부탁드립니다. 곧 새학기가 시작되면 청소년 전도사를 원하는 교회들과 사역지를 찾는 목회자들을 서로 이어주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내일은 35명의 월드비전 선명회 합창단원이 캠퍼스를 방문하고 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예정입니다. 부디 애틀랜타를 오고가는 분들의 아름다운 휴식처가 되는 한미목회실이 되어지기를 소망하며 건강하고 즐거운 목회와 가정사역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위 사진과 관련된 안수식에서 전한 권면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To: Jaehong Kim & Simone Sunghae Kim for the Ordination in the ministry
“For God did not give us a spirit of timidity, but a spirit of power, of love and self-disciple”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7)
이제 안수받은 김재홍 목사님과 시므온김 목사님께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조금 있으면 태어나서 처음하는 축도를 영어와 우리말로 하게 될텐데 어떠한 심정일까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 토시 하나 안틀리고 전달하기 위하여 수십번 연습하고 또 되풀이하여 기억하였을텐데…
우리는 왜 목사안수를 갖 받은 분에게 축도를 받게 되었을까요? 여기 목회경험도 많고 훌륭하신 분들도 많이 계신데 가장 신참목사에게 축도를 부탁합니다. 그 이유는 여기에 계신 모든 목사들중에 목사가 된후 가장 죄를 적게 지은 두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죄를 지을 시간도 없었기에 죄짓기 전 깨끗한 분들에게 축복을 받으라고 안수 받은 목회자의 첫 축도를 선호합니다.
새로운 목회자가 되신 두 분은 담대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간직하십시오. 이것이 두 분의 삶과 목회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두 분과 함께 신학교 사역을 하게되는 저로서는 두 분의 목사안수가 너무나 기쁩니다. 이민교회와 한인신학생들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김재홍목사님은 콜롬비아 신학대학원의 한미목회실의 산파역할을 돕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돌보며 한미목회실의 실제적인 활동들을 기획하고 세우는 일에 열정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시므온김 목사님은 에모리 대학 캔들러 신학대학원의 목회상담교수로서 한인학생들을 돌보는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저를 비롯한 세 사람을 연합장로교회를 통하여 한 팀으로 묶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서로 힘을 합하여 한인학생과 이민교회를 위한 신학커뮤니티를 세우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Simone and Jaehong, I am honored to participate in this your ordination to the ministry of Word and Sacrament. 우리말로 말씀과 성례전의 목회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Word and Sacrament: Minister of aptism, Communion, the Sacraments. 이는 말씀만 전하는 설교자가 아니라 성만찬과 세례를 비롯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거룩한 상징으로 세워짐을 말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는 예배공동체의 엄청난 사명을 말합니다.
오늘의 안수식이 혼자 받는 안수가 아니라 같이 행하여짐은 귀중한 상징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민목회는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1세와 2세, 영어권과 한국어, 남성과 여성, 장로교 신학교인 콜롬비아와 감리교 신학교인 에모리, 한국과 미국… 우리는 서로 다른 점보다 서로 공유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합심하여 같이 기도하여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언제나 우리는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성령님과 함께 하여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미래가 불확실하여도, 그리고 때로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담대히 나아가며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있습니다.
My dear friends, brother and sister in the ministry, always remember that your life belongs to the Lord and do not be afraid but have courage for God’s power, love, and self-discipline. God bless you!
성서정과 8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하나님의 아들 - 정체성의 드러남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요한이 죽자 예수님은 그의 사역을 더 이상 감추시지 않으시고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행보를 걸으신다. 그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 아들로서의 정체성의 드러남이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으로 모인 군중에게, 물 위를 걸으심으로 배 안의 제자들에게, 애걸하는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심으로 이방인에게,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시몬 베드로에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인지시키며 조금씩 분명하게 확대되어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감추어진 보물이 그 빛을 발하듯이 이 어두운 세상에 아무리 숨기려해도 감출 수 없는 빛과 같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은 시간과 흐름과 함께 여러 사람에게 확인되어진다. 이를 정리하여 주는 것이 8월 마지막 주의 본문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현현 ‘스스로 있는 자’이시다. 비유의 숨긴 뜻과 같이 감추어져 있던 주님의 모습이 이제는 만천하에 드러나며 믿음 없는 자들이 확신을 갖게 되는 모습들이 8월 한 달 교회력에 따른 성서정과의 평주일 본문으로 안내되고 있다.
8월 3일: 18번째 평주일
창32:22-31; 시17:1-7, 15; 롬9:1-5; 마14:13-21
한창 여름휴가 철의 절정인 8월의 첫째 주일이다. 사촌인 세례요한의 죽음소식을 접하신 예수님께서 혼자 계시기 위하여 한적한 곳을 찾으셨으나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몰려온다. 그러나 모인 백성들을 멀리 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는 광야에서의 풍성한 잔치식탁을 마련하신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상징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광야로 갔다. 잠시 사람들을 피하여 쉬시고자 한적한 곳을 찾으신 예수는 그곳까지 따라온 수천 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신다.
너무 늦은 시간이다. 제자들은 관중들을 물리치고 그들만의 식사시간을 준비하고자 하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을 무언가 먹이기 위하신다.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가 전부이다. 그러나 그것을 나누자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고도 12바구니의 음식이 남는 일이 생겨졌다. 어디를 봐도 음식이 넘쳐난다.
이 놀라운 기적은 하나의 비유와도 같다. 비록 광야의 삭막함이지만 예수님이 계시니 변하여 생명의 풍성함이 넘쳐난다. 궁핍한 자들이 주님의 풍성한 은혜로 치료받고 배불리며 쉼을 얻는 극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제자들의 모습과 같다. “그들을 물리치소서” 예수께서 물으신다. “무엇을 갖고 있느냐” “가진게 별로 없습니다” 무언가 손에 쥐고 빨리 먹어야만 하는 긴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풍성함의 여유가 없다. 우리는 언제서야 삶의 풍성함을 누리고 나눌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은혜만이 우리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하여준다. 항상 부족하다는 결핍증에 시달려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관대한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서로 나누라고 하신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오늘도 만족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상황설교
오늘 본문말씀에 따르면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서 광야로 좇아갑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열심을 다하여 따라다니는 무리들을 피하여서 혼자 조용한 곳으로 휴가를 떠난 상태입니다. 아니면 혼자서 기도하시러 광야로 가신 겁니다. 상황배경은 예수님의 사촌인 세례요한이 헤로디아에 의하여 목이 잘려 그의 제자들이 시체를 가져다가 묻고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예수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서 따로 빈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세례요한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보다 먼저 광야에서 단식하며 회개하라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던 광야의 소리였습니다. 그 광야, 갈릴리 해변 곧 빈들에 예수님은 홀로 가십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사람들은 좇아가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병 고침을 간절히 원합니다. 자유하기를 원합니다.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기적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면 나타나는 특이한 사항이 있습니다. 한 가지 드러난 사실은 사람들은 대책 없이 몰려다닌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누가 좋다하게 되면 사람들은 몰리게 되어있습니다. 제자들 또한 대책이 서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기준은 한 가지, 예수님이 계신 곳이면 어디든지 가오리다, 따라가리다 입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 또한 말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시고 그 중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문제는 저녁이 되어 늦은 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을 해산시켜 마을에 가서 각자 음식을 사먹도록 유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명하십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음식을 얻어다가 이 많은 무리에게 먹게 하겠습니까? 적어도 남자만 5,00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 다 합하면 약 2만 명은 되어 보입니다.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져오라 하시고 축사하시며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고 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아무리 적은 양일지라도 그 은혜를 베푸심에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니 열두 바구니에 차도록 남았다고 합니다. 풍성한 은혜가 차고 넘치는 장면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기적의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나라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비록 빈들인 광야이지만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사막에 꽃이 피고 마음과 몸의 상처가 치유되며 배고픈 자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얻게 됨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근심과 절망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예수님, 저들이 돌아가게 해주세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감당 못합니다. 아니면 기적을 베푸시어 저들의 아픔을 낳게 하시고 필요한 요구사항들을 채워 주시옵소서.” 맞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십니다. 연민의 정을 가지시고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저희는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생선 2마리와 떡이 몇 조각 있을 뿐입니다.” (영어로는 빵인데 우리말성경에는 떡이라고 되어있군요)
언젠가 캘리포니아의 심장과 의사인 김동규씨의 자서전『3일의 약속』을 읽어보았는데 815해방 후 함경도 청진에서 의학공부를 하다 625전쟁 시 홀로 남하하여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미국에 공부하러 손가방 하나에 50불과 영한사전 1권만 들고 도착한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그 50불과 영한사전이 그를 미국에서 풍성한 삶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내용입니다.
생선 2마리와 떡 몇 조각. . .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적다고 하지 말고 나누어야 한다. 모두 드려야 한다. 그리고 주의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주어야 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무언가 부족하다는 압박 관념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밖에 나갔다 올 때에는 돌멩이라도 주워 와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어느 한 집에 오래 살면 살수록 잡동사니한 물건들을 쌓아놓고 삽니다. 그러다가 이사 갈 때는 그것들을 또 싸들고 옮겨 다닙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아이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이거 내거야!”입니다. 제가 40이 넘어도 이렇게 날씬한 것은 어려서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고 커서 그렇다고 합니다. 저에게 남자동생이 셋이요, 여자동생이 하나, 합해서 5남매가 같이 자랐는데 항상 식탁에서 먼저 먹는 사람이 많이 먹습니다. 항상 자랄 때는 형제들끼리 식사하면 순식간에 테이블의 음식이 사라집니다. 본래 저의 먹는 행동이 느리기도 했지만 악착같이 많이 그리고 빨리 먹어야겠다는 마음은 지금도 없습니다.
우리사회의 모습들을 돌아봅니다. 너무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우리의 일을 빼앗아 갈 것이기 때문에…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빈민자 들에게 돈을 너무 많이 주지 말자. 왜냐하면 경제에 구멍이 나기 때문에… 기본임금을 올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경제 인상조치로 내가 사먹는 밥값이 올라가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을 꼭 쥐고 놓지 말라. 언제 IMF가 또 닥칠지 모른다… 만약에 내가 내 것을 당신에게 주게 되면 나는 망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그리고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50불과 영한사전 그리고 성경책이면 족하였는데 이제는 아무리 돈을 모아도 부족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장만하여도 무언가 아쉽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광야에 계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광야 같은 세상에서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고 정신은 맑았었는데 언제부터인가 거지근성이 살아나며 내 것, 내 집, 내 자식, 내교회하면서 주워 모으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광야에서 적응하려면 하루 먹을 것으로 족합니다. 하루의 만나만 있으면 됩니다. 그 다음날에는 또 어디로 가야할지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광야의 삶은 나그네의 삶입니다. 거지같이 주워 모으는 삶이 아니라 나그네같이 나누는 삶입니다.
바울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빚만 지라고 합니다.” 사랑만이 주고 또 주고 다 주어도 계속 남아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주면 줄수록 받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것을 주면 나는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을 얻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 중에 얼마나 제자들에게 강렬한 기적으로 기억에 남았으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모든 4복음서에 기록된 유일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매우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오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언제서야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때가 오겠습니까? 언제서야 예수님의 크고도 넓은 그리고 풍성한 은혜를 맛보겠습니까? 언제서야 넓은 마음을 갖고 내 것만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에서 나누어주는 넉넉한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시렵니까?
우리는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두 손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간난아이의 꼭 쥔 두 손 안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갖고 있다고 하는 것, 우리자신의 모습은 엄청나게 풍요로우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찬가지로 요구하십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엄청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조금이라도 형제자매들과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이웃들과 나누라고 하십니다. 피부색깔이 틀리고 언어가 틀려도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여러분의 삶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름의 장마와 비의 수해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나누라 하십니다. 태풍과 지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과 나누라 하십니다. 식량부족으로 고생하는 북한주민을 사랑으로 대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8월 10일: 19번째 평주일
창37:1-4, 12-28; 시105:1-6, 16-22, 45b; 롬10:5-15; 마14:22-33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같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 또한 현대인에게 다가가기 무척 어려운 과제이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도 받아드려지기 힘든 사실이었겠지만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속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모습임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홍해를 가르신 출애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사건도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있다. 욥기9:8, 하박국3:15, 그리고 시편 77:19을 보면 물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무서워 떠는 제자들에게 응답하는 예수님의 대답인 ‘ego eimi’가 출애굽기3:14에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 가시덤불의 하나님과 연계된다. (8월31일 본문참조) 그러나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무시하는 텍스트는 아니어야 하겠다. 물위를 걸으신 예수는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메시아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이 부여하신 자연의 법칙이 아닌 초자연적 권능을 보이시는 인간 예수를 말한다. 그러하기에 베드로에게도 같은 기회가 주어지며 그 또한 물위를 잠시나마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물 위를 걷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모습은 판이하게 다르다. 오직 마태복음만 베드로가 갈등 하고 있는 믿음과 의심의 사이를 그가 물 위를 걷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데 앞으로 있을 베드로의 고백과 3번 그리스도를 부인함을 예고하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다, “믿음이 적은 자여.” 이는 8:28에서 풍랑을 맞은 제자들이 두려워함을 보시고 하신 같은 말씀이다. 그리고 16:8에서 ‘믿음이 적은 자’를 다시 한 번 언급하신다.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는 신앙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를 다룸으로서 설교의 적용이 가능하겠다. 베드로는 걸어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초청만 의지하여 앞으로 나아가여야 하는데 바람과 함께 무서운 두려움이 엄습하여 물에 빠지게 된다. 두려움으로 인하여 꿈도 포기하고 시작도 해보지 못하는 일상의 새로운 도전들이 물거품과 함께 사라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본문은 물위를 걷는 기적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배 안의 제자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함으로 결론을 맺는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디어 제자들에게 인식되어지는 순간이다. 기적에서 기적으로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숨 가쁜 상황 속에서 제자들은 그들의 닫힌 마음이 열리고 트여진 눈으로 메시아를 보게 된다. 더 이상 감추어지지 않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이를 시작으로 베드로의 고백(16:16)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가 그 절정을 이룬다.
8월 17일: 20번째 평주일
창45:1-15; 시133; 롬11:1-2a, 29-32; 마15:(10-20)21-28
어느 한 이방여인이 등장한다. 지중해 해변에 위치한 두로와 시돈지방의 가나안 여인으로 알려진 그녀가 딸을 고쳐달라고 간구함으로 인하여 유대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의 경계선을 넘으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위한 그의 선교목적을 선언하였는데 (24절) 여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방여인으로서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유명한 남성 종교 지도자에게 공중 앞에서 당당히 대응한다.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신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그 여인을 좇아 보내기를 권하지만 여인은 절대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얼마나 그녀의 믿음이 크기에 예수님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또한 칭찬까지 하시는가? 그녀를 시험하시려고 모욕을 주는 언사를 하셨던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본문이요 상대적으로 의아한 예수님의 행동이시다. 적극적이다 못해 불손하기까지 한 이 여인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그들의 요구가 관철되기까지 쉰 목소리로 부르짖으며 애걸하는 사람들에게 억척스럽고 뻔뻔하다고 비평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오히려 삶이 편안하고 안정되며 교회에서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교회 안 보다는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들을 줄 알아야겠다. 로마 정책에 의하여 두로와 시돈 도심지에는 잃어버린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희랍문화권의 여러 인종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 가나안 여인의 배경은 가장 비천하고 업신여김 받으며 농경으로 먹고사는 오리지널 지역주민을 대표한다. 가나안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 다음으로 유대인들이 경멸하고 업신여기는 인종이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고 비천한 여인의 믿음이 크게 드러난 상황은 예수님을 믿지 않음을 인하여 능력을 행치 아니하신(마13:58) 유대마을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장로들의 전통과 법을 어긴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마15:1-20)을 뒤로 하고 가신 곳이 두로와 시돈이기에 더욱 두드러진다.
식탁에 있는 떡과 부스러기는 성만찬으로 연결하여 주님 식탁의 모습으로 안내할 수 있다. 식탁에 초대된 사람들만이 아니라 주변인물로서 숫자에 포함되지도 못한 여인들과 어린이들, 그리고 장애인들과 외국인들을 돌아보며 그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선포하고 모두 함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그 날을 기원한다.
우리는 5천명을 먹이신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의 풍성한 사랑을 목격하였다. 그리고 그의 넘치는 사랑은 본문의 이방여인을 통하여 가로막힌 경계선을 넘어 온 세상에 전하여진다. 우리는 교회라는 울타리의 경계선으로 안과 밖을 철저히 구분하여 지키고 있음에서 벗어나 우리의 눈과 귀를 세상으로 돌리어 하나님나라의 모습과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역이 되어야 하겠다.
8월 24일: 21번째 평주일
출1:8-10; 시124; 롬12:1-8; 마16:13-20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그가 누구신지 모르셔서 묻는 질문은 아니다. 단지 예루살렘에 올라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기에 앞서 3년 동안 같이 생활한 제자들의 생각들을 확인하시는 것이리라.
가이사랴 빌립보는 예수님의 고난이 처음 선포된 장소로서 제자들과 함께한 공생애 동안 다니신 여러 지역 중 변모산으로 알려진 헤르몬산과 함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이다. 또한 로마황제 시저의 여름별장이 위치한 곳으로 새로이 조성된 휴양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곳을 전환점으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심층교육을 시작하시고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사역을 펼치신다. 더 이상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교하시지 않으며 또한 병 고침의 기적도 자제하시며 오로지 제자들을 가르치시기에 전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삶을 연결하여 주는 다리역할임을 깨닫는다. 우리도 세상의 삶과 교회의 삶을 동시에 사는 자들이다. 두 가지 삶이 그저 분리된 상태에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무언가 연결하여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십자가의 고난’임을 알게 하신다. 고생 속에서 다져진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열매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 확립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를 통하여 답이 이루어진다. 십자가 고난으로의 여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하고 특별히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가 그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준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3:17)라는 하늘의 소리가 예수님의 세례에서 확인 되었듯이 마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그가 누구인지 다시 한 번 명시한다.
마태는 베드로를 여러 번 등장시키지만 그를 뛰어난 인물로 묘사하기 보다는 아주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실수와 넘어지기를 거듭하는 제자로 다루고 있다. 그를 비롯한 여럿 제자들의 고백은 예수가 누구인지 확신하지만 왜 십자가를 지셔야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베드로의 고백이 그가 스스로 깨달았거나 사람들이 가르쳐주어서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알게 하여주심을 상기시키며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허락하신다. ‘반석’이라는 베드로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신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는 대답한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8월 31일: 22번째 평주일
출3:1-15; 시105:1-6, 23-26, 45c; 롬12:9-21; 마16:21-28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엄청나고도 위대한 사건이다. 불타는 가시덤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으로의 부르심이다. 사건의 정황이 우리에게 대단한 흥미를 일으키는 것은 보통의 장소에서 보통의 사람을 부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평범한 곳에 하나님께서는 찾아오시고, 이야기하시며, 소명을 주신다.
호렙산에 혼자 있던 모세이다. 호렙의 뜻은 “불모지”이다. 아무 쓸모없는 덤불만 자라는 외진 광야에 하나님은 오신 것이다.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교회의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평범한 덤불이 자라는 광야에 오신 것이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을 찾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제사장도 선지지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일 뿐이다. 아니 모세에게는 애급에서 죄를 짓고 몸을 숨기기 위하여 잠시 머무는 장소일 뿐이다.
그런데 가시덤불이 불에 탄다. 덤불이 불붙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지만 이상한 것은 꺼지지 않고 오래 탄다. 불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모세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심정으로 불에 가까이 다가간다. 궁금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겠기에 가까이 다가간다. 이제껏 보지 못한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모습에 하나님은 갑자기 다가오신다. 우리의 궁금증을 유발시키며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으신다.
또한 하나님은 궁금증으로 인하여 일손을 멈추고 다가가는 모세에게 새로운 사명을 자세히 설명하신다. 많은 사람들은 평면적이고도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가끔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나라의 사이에 가로막힌 장애물을 거두시고 그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신다.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여 곁눈질로만 볼 수 있는 경우도 있겠고 아주 작은 힌트의 구멍으로 눈을 씻고 안경의 렌즈를 닦고 보아야만 하는 경우도 있겠다. 또한 새벽의 이슬, 석양의 노을, 어린아이의 얼굴, 가을단풍의 절정,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는 벼의 모습,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말 한마디를 통하여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영광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평범한 광야의 가시덤불을 사용하셨듯이 그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과 사물들을 사용하신다. 천한 계집종임을 자처한 마리아의 고백과 같이 성육신의 때와 장소는 구별됨이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열망하는 자의 가슴에 불을 붙이시는 사건을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이 성례전적인 삶이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와 뜻임을 고백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 모세가 기도로 준비하거나 계획한 것이 아님을 확인한다. 그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위험하거나 특별한 일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명은 모세를 정하시사 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로에게 전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아픈 자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권력의 남용을 다스리시며 새로운 질서를 회복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Posted in Newsletter | Print | No Comments »
KAM Newsletter 7호, 2007년 5월
October 25, 2008 by admin.
인사의 글
저는 현재 한국에 있습니다. 서울 외국인학교를 졸업하는 아들 졸업식에 참여하고 대천에 있는 외국인 수양관에서 지내며 지난 1년동안 진행되었던 치아교정 치료를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17일 졸업식 후 급히 오느라 이번 호에 실고자 하였던 한인 졸업자 사진을 실지 못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첫번째 졸업식인 이 날 2명의 목회상담 Th.D., 2명의 D.Min, 1명의 Th.M., 그리고 4명의 M.Div. 한인 졸업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확한 명단과 사진을 다음 호에 실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저의 가족은 7월 12일 서울을 떠나서 L.A.에 들려 21일 애틀랜타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리고 7월 28일서부터 Panama City, Florida에서 시작하는 KPC 연례 가족 수련회에 온가족이 참여하기로 등록하였습니다.
부디 평안하시고 가족수련회에서 반가운 얼굴 뵙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한미목회실 뉴스레터 다음 호(7월)는 쉬게 되는지라 이번 호에는 6월자료와 함께 7월 설교자료를 미리 보내드립니다.
성서정과 6월(A)과 7월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순종의 제사
사무엘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 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사울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자기 욕심만 채움을 꾸짖는 말이다. 겉모양만 번듯한 제사의 행위보다는 그 마음에 진실을 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동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심을 말한다. 여름의 문턱에 서서 만물의 성장함을 바라보는 6월을 맞이하여 ‘순종의 제사’를 주제로 다루었다. ‘찬미의 제사’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몸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기를 설교한다(신11:13). 첫째 주일은 산상복음의 결론에 해당되는 반석 위에 세운집의 비유로 말씀에 순종함을 다루었고, 둘째 주일은 지시한 땅으로 떠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람의 이야기, 셋째 주일은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열두제자들의 모습, 넷째 주일은 죄와 사망을 죽음으로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의 모습, 그리고 마지막 주일은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순종을 다루고 있다. 순종과 제사를 견주어서 어느 한 쪽이 더 중요하다고 단정 지음 보다는 말씀의 순종과 준비된 제사가 둘 다 포함된 ‘순종의 제사’를 행동으로 보여준 이야기들을 이번 달 설교의 주제로 묶어 보았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희생의 의미를 가진 제사(sacrifice)가 순종과 함께 한다면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6월 1일: 9번째 평주일
창6:9-22, 7:24, 8:14-19; 시46; 롬1:16-17:3, 22b-31; 마7:21-29
반석위에 세운 집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만세반석 되심을 본문은 전하고 있다. 매 주일마다 설교를 듣고 전하며 성경말씀에 반영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삶의 기초를 쌓아나간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의 풍파와 어려움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인내와 믿음의 기초를 안내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며 신앙에 근거한 반석위의 집을 짓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본문은 마태가 전하는 산상복음의 종결부분으로서 예수님이 항상 가르치시는 옳은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신다. 이는 ‘주여 주여’ 부르짖는 종교성의 언어도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의 은사도 아니며, 선지자의 행위도 아니라고 단호히 결론을 내리시며 설교의 마무리를 장식하신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의 모습으로서 구약의 가르침과 같이 토라(Torah)에 기초한 순종의 삶을 반석위에 세운 집으로 비유하신다. 오늘날 우리의 지혜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얻어진 경험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모습이지만 마태가 전하는 지혜의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순종하는 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이번 주일의 강조점은 진실을 선포함에 머무르지 않고 그 진실을 행동으로 실천함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에 있다. 전하시는 말씀을 위한 이미지 전달은 든든한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자와 대조하여 비추어진 그림이다. 비가 오고 물이 넘치며 바람이 불 때에 집의 기초가 흔들리고 무너짐이 그 차이를 드러냄을 가르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들이 아는 다른 종교지도자들과 판이하게 다름을 보고 사람들은 놀란다. 이 비유는 하나의 경고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에 옮기지 않는 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경고로서 그들은 기초가 든든하지 않은 집과 같이 멸망할 것임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의 희망의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있다. 본회퍼의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는 말과 같이 순종하여 그의 말씀을 우리의 삶으로 받아드림이 인생의 지혜임을 알게 된다.
6월 8일: 10번째 평주일
창12:1-9; 시33:1-12; 롬4:13-25; 마9:9-13, 18-26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첫 번째 말씀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명령과 함께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전하신다. 그 땅은 아브람이 알고 있는 경계선의 범위를 벗어난 미지의 세계임을 말한다. 위험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공간이다.
이념의 유목민으로 방랑하는 현대인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삶의 울타리를 넘어서 하나님만 의지하여 앞을 향하여 나아감을 전함이란 어떤 모습일까?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고생하는 동포 이민자들의 삶을 조명한 이민신학이 본문을 근거로 되풀이되어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경계선을 넘어 약속의 땅을 찾아감에 있다.
현대사회의 현주소인 글로벌 국제화시대에서 시간의 차이는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그리고 공간의 차이는 국경선이 무색할 정도로 비자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표준시간대이고 무엇이 우리의 표준경계선인가?
아브람은 그의 표준시간대를 하나님의 시간으로 맞추어 말씀에 순종하고 인간이 정한 경계선을 허물어간다. 아직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을 갖고 나아간다. 이것이 그의 일생에 어떠한 변화와 도전을 가져오는지 모르면서 집을 떠난 위험한 여정을 시작한다. 한 번으로 끝난 여행이 아닌 두 번씩이나 계속하여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삶의 방식과 리듬을 받아드려 만나는 사람들과 전쟁과 협상을 거듭하며 하나님만 의지하여 한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된다.
그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철저히 지킴으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을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의 생활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삶이 평탄하지만은 아닌 것이 가나안에서의 가뭄, 애급에서 바로에게 받은 위협, 그리고 조카 롯과의 분쟁 및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비롯하여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통하여 얻은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처럼 평범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아가며 언제나 경계선을 건너는 모험의 삶을 이어나간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현대적 유목민의 모습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장소, 새로운 기회, 새로운 가능성에 이끌리어 믿음만을 갖고 순종하여 나아감을 말한다. 앞을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 뛰어넘어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길을 여는 믿음을 이어간다. 세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경계선으로 이루어져있다. 분단된 조국의 남과 북을 가로막는 삼팔선을 비롯하여 국가적 경계선 및 언어적 한계를 비롯한 여러 모양의 장벽과 장해물이 널려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가로막는 장애를 허물어주시고, 나누어지고 깨진 관계를 회복하시며, 사랑과 일치로 우리를 치유하여 주신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또한 장벽을 허물며 경계선을 넘어서 이 세상에 사랑과 일치를 위하여 일하라고 이르시며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명하신다.
6월 15일: 11번째 평주일
창18:1-15 (21:1-7); 시116:1-2, 12-19; 롬5:1-8; 마9:35-10:8(9-23)
예수님은 더 이상 혼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신다. 그를 주인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제자들을 부르사 권능을 주시고 추수할 일군으로 세우신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심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며(마19:28)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시는 (6절) 그 명령과 일치한다. 이는 이방사람들을 복음에서 제외함이 아니요, 이스라엘에게 우선적 대우를 하심도 아니요, 오로지 전도의 유효한 순서를 가르치고 있다.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할 기회를 제공하심을 보며 사울에게 전하여진 ‘순종의 제사’를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본다. 마태에게 먼저 유대인을 우선순위로 두는 것은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이는 사도바울을 통하여 다시 강조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주님은 첫째 복음의 전파와 또한 치유의 사역을 가장 우선적으로 명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이 두 가지, 즉 말씀과 치유의 실현을 선교적 사명으로 두고 있는데 교회도 복음의 말씀과 사회적 치유의 두 축을 중심으로 목회가 진행되고 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린하는 백성들을 예수님께서는 불쌍히 보시고 민망히 여기심을 본문은 기록한다(9:36).
그러나 부르시는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으로 받아드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문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고 있다. 이는 열 두 제자들에게만 한정된 사명이 아님을 시사한다. 특이한 점은 7절에서 보듯이 제자들이 받은 사명이 정하여진 장소가 아닌 하나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데 분명하게 ‘가면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하라 말씀하신다.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삶을 가르치시며(8절) 목적지가 중요함이 아니라 길을 가는 여정에서 외치며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며 치유함을 명하신다.
제자들에게 명하신 순종의 의미는 길을 ‘가면서’ 말씀을 전함에 있다. 목적의식을 갖고 도착하는 지정된 장소나 시간이 아니라 스케줄에 얽매이지 않고 길을 떠난 여정에서 언제나 항상 순종의 모습을 보임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항목이다.
6월 22일: 12번째 평주일
창21:8-21; 시86:1-10, 16-17; 롬6:1b-11; 마10:24-39
죄와 사망을 말씀에 순종함으로 이김을 전하는 로마서 본문은 세례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세례를 통한 구원의 길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길 밖에 없다. 세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약속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의 책임이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자(5절), 즉 접붙인다는 뜻의 희랍어 σύμφυτοι는 질이 다른 두 나무가 접합하여 같은 질의 한 나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순종하여 그의 죽음을 본받고,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된다.
죄와 사망을 죽음과 부활로 이기신 예수님의 순종이 우리에게도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신다. 이삭의 순종과 대칭되어 십자가를 몸소 지시고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순종은 사도바울을 통하여 주님의 지체가 되는 교회의 순종으로 이어지고 있다.
죄에서 해방된 우리는 의의 종이 되어야 함을 본문에 이어 롬6:12-23절은 설명한다. 신앙 고백의 행위인 세례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새로운 출발을 시사한다. 결코 세례가 신앙의 수업을 졸업하는 뜻이 아니라 새로운 신앙여정의 출발점이기에 그 목적을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순종과 헌신의 약속을 다짐함이 옳은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을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줄을 믿는다(8절). 기독교 성례전인 세례가 이러한 고백을 안내함에 있어서 과연 얼마나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가 돌아본다. 적은 양의 물을 머리에 적시는 예식의 세례에서는 죽음을 맛보기 힘들지만 흐르는 강물에 세 번 담그는 침례예식에서는 잘못하면 세례를 받다가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
세례를 받음으로 죽을 수 도 있음을 고백함이 우리의 신앙인데 세례를 너무 쉬운 과정으로 그리고 축복으로만 포장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여본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함과 같이(9절)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지 하나님을 대하여서는 산자로 여김을 받을 것임을 약속하고 있다(11절). 그러므로 죽을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라고 바울은 계속하여 전하고 있다.
6월 29일: 13번째 평주일
창22:1-14; 시13; 롬6:12-23; 마10:40-42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주저하며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리의 결심과 행동을 요구하고 계신다. 제자도의 길을 따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기독교인의 옷을 벗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의 삶을 사는 미지근한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위협적일 수도 있다.
아브라함에게도 두려움과 떨림의 위협적인 시험무대가 주어졌는데 이는 늦은 나이에 얻게 된 독자 이삭을 산에 올라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인 것이었다. 그는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으로 삶을 살아온 신앙인이다. 그런데 순종의 마지막 시험은 제사를 올리라는 것이다. 그것도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죽여서 바치는 일이다. 이보다 더 심하게 혼란스러운 이야기가 성경에 또 있을까? 그러나 창세기 22장은 첫 장면인 1절에서부터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함이란 목적을 제시하고 있다. 아브라함만 모르고 있지 우리는 이것이 오로지 시험의 과정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동을 학대하시는 잔혹하신 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순종을 시험하고자 하심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는 팔레스타인과 온 세계에 위협을 주는 테러범들이 폭탄을 등에 업고 자살행위를 함을 인정하여주는 본문이 아닌 것이다. 우리 몸과 평화를 파괴하는 행위들을 하나님은 결코 인정하시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말씀에 순종하여 그의 아들과 그의 중심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침을 확인하고자 하신 것이다. 모든 상황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을 보면서 이삭이 제사를 위하여 지고 간 나무가 바로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임을 알게 된다.
랍비전통에 의하면 모리아 산의 제단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진 장소의 초석으로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 제단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제사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역사의 현장이다. 아브라함이 치룬 시험의 핵심은 아버지나 남편의 역할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서의 자세이다. 그는 이 시험을 훌륭히 통과한 것이다. 여기에서의 시험은 유혹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을 어떻게 사탄의 유혹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항상 핑계를 대며 주저하는데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용기를 주신다. 어쩌면 우리가 아는 자신의 모습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계시며 칭찬으로 제자도를 안내하신다.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가?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하고 풍성한 삶을 바라보지 못하는 제한된 우리의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한다.
예수님의 비유
프랑스 떼제공동체는 그들의 수도원 내규를 정하여놓은 규례서를 “공동체의 비유(Parable of Community)”라고 이름한다. 이곳은 여러 인종과 교단의 차이를 뛰어넘어 연합하여 함께하는 아름다움을 비유의 모습으로 직접 실천하는 곳이다. 이 세상의 번민과 고통에 참여함이란 대화가 아니라 같이 기도하는 공동체가 됨을 선언한 떼제는 성육신된 생명의 교제를 위미하는 하나의 비유로서 새로운 영성공동체 모델을 세계교회에 안내하고 있다.
7월 평주일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비유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그 중 우리는 은유에 가까운 멍에의 비유,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그리고 밭에 감춰진 보화의 비유 및 진주, 그물, 그리고 풀무를 사용한 천국의 모습을 설교하게 된다.
예수님의 비유는 분명한 목적의식과 의미전달을 전제로 한 가지의 구체적인 해석이 전부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이 먼저 비유를 말씀하신 후 제자들에게 그 해석을 하여주심을 볼 때에 이야기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윤리적 가르침이 드러나는 비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 비유의 해석은 여러 가지 모습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한 가지만의 해석이 아니라 비유는 다양한 풍유 즉 알레고리적 상황으로 이어지면서 여러 가지의 상반된 해석이 동시에 발생하는 흥미진진한 전달방식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비유설교는 설교자의 풍성하고도 상상력있는 해석을 요구하는 매체이다. 한 여름의 뜨거운 태양빛이 장마의 빗물과 함께 만물을 성장시키듯 비유를 설교하는 7월 한 달이 크고도 넘치는 은혜 안에서 놀라운 믿음 성장의 강단이 되기를 기도한다.
7월 6일: 14번째 평주일
창24:34-38, 42-29, 58-67; 시45:10-17; 롬7:15-25a; 마11:16-19, 25-30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29절)”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30절). 쉽다는 말은 ‘친절하다’는 뜻으로 이 특수 제작되어 만들어진 멍에는 지어야 하는 어깨에 부담이 없기에 짐이 가벼워짐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명하신 우리의 짐을 감해주신다는 의미보다는 그 짐을 쉽고 가볍게 지을 수 있도록 그가 직접 만든 멍에를 메라고 하신다.
여기서 ‘배우라’ 말씀하심은 나의 가르침을 듣고 행하라는 그저 학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보고 배우며 따라하는 제자도를 말한다. ‘멍에’의 메타포는 새로운 면을 밝히는데 이는 예수께서 직접 지고계심을 말한다. 보통 멍에는 2마리의 소가 끄는 목재로 만든 기계인데 혼자서 짐을 지지 않고 옆에서 함께 끌어주심을 약속하고 계신다. 우리 혼자의 짐이 아닌 예수님께서 같이 끌어주시는 멍에는 쉽고 가벼울 수밖에 없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그의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을 본받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김은 예수님과 같이 겸손함과 인자함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의 주인이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우리는 보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더 나은 멍에를 제공하신다. 그분은 그의 행동, 가르침, 그리고 그의 인자함으로 천국의 모습을 보이고 계신다. 마음이 무거운 자들에게 엄청나고도 놀라운 초청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한 가족으로 부르시며 교회라는 지체로 인도하시는 주님은 용기를 갖고 위험을 무릅쓰며 상상력의 날개를 펴서 주의 백성들을 품으라고 하신다. 멍에가 고난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사명을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하여야 하는 일군에게 멍에는 짐이 아니다. 오히려 일을 잘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설교자는 현대사회에서 ‘멍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고 본문을 전하여야 한다. 나의 고집과 힘이 들어가지 않고 효과적으로 천국의 비밀을 증거할 수 있는 주님의 멍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하는 멍에에는 학위, 직장, 가족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분명히 주님의 멍에이어야 하고 또한 주님을 통하여 배우는 학습자가 되어야 함이 본문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는 이 엄청난 초청의 말씀은 그냥 듣기만 하는 청취자가 아니라 일을 행동에 옮기는 실천자의 모습으로서 이 특별한 멍에를 이미 메고 계신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도의 응답이다.
7월 13일: 15번째 평주일
창25:19-34; 시119:105-112; 롬8:1-11; 마13:1-9, 18-23
씨 뿌리는 자인 농부는 밭을 갈기도 전에 씨를 넓게 그리고 자유로이 흩어서 뿌린다. 그 중에는 뿌리도 내리지 못하고 말라서 죽어버릴 것을 알면서도 추수 때가 되면 풍족한 열매를 맺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널리 뿌린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 농부라면 그렇게 귀중한 종자를 낭비하며 아무데나 뿌릴 수 있을까? 비유의 핵심은 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 뿌리는 농부의 모습에 있다고 본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모습을 비유한 천국의 비밀인 것이기 때문이다.
씨는 복음이다. 어느 한 곳에 모아서 모종하듯 조심스럽게 심는 모습이 아니라 아무데나 낭비하듯 멀리 던지고 뿌리는 복음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모습이다. 1세기 갈릴리 농부에게 좋은 추수라 함은 뿌린 씨의 10배를 거둠을 말한다. 보통의 추수는 약 7배를 거둔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의 모습은 평상시의 기대치를 훨씬 뛰어넘어 널리 그리고 멀리 선포되어 백배, 육십배, 혹 삼십배로 거두어지는 신비의 모습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특별하게도 비유의 해석을 첨부하고 있다. 그 해석이 씨가 떨어진 땅의 4가지 종류에 집중하고 있기에 흔히 복음을 청취하는 자들의 마음 밭을 조명하는데 오늘은 그 초점을 오히려 씨를 뿌린 농부에게 맞추어보길 원한다. 이는 복음의 씨를 뿌리는 자의 모습이다.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은 씨앗 하나하나를 아끼시지 않으시고 무작위로 여러 곳에 던지신다. 길 가, 돌밭, 가시떨기 위, 그리고 좋은 땅 모두에 뿌리심을 예수님은 선포하시며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넓은 사랑과 엄청난 열매의 힘, 즉 천국의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만이 아니라, 되고 싶은 사람만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고 열매 맺는 모습을 그린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는 정하여진 사람들에게만 전하는 말씀이 아닌 길, 돌, 가시와 같이 마음이 닫힌 사람들도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임하신다. 교회는 선택된 엘리트 집단만 훈련하는 곳이 아니다. 어느 누구에게든지 열려있는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모습은 그 엄청난 비밀을 씨 뿌리는 농부의 손길을 통하여 보여주신다.
7월 20일: 16번째 평주일
창28:10-19a; 시139:1-12, 23-24; 롬8:12-25; 마13:24-30, 36-43
가라지의 비유는 알곡과 비교되어 소개되지만 여기서의 초점도 역시 농부의 인내심에 있다.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30절) 어쩌면 예수님은 생각하시길 우리 인간들에게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여 떼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간파하고 계신지 모르겠다. 가라지 같은 알곡도 있고 알곡 같은 가라지도 있기에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서로 참으며 인내를 키워야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이번 설교는 은혜의 비유설교가 될 수 있다. 또한 비유가 허락하는 이야기의 반전으로 인내를 갖고 보는 시각에서 가라지가 알곡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구별된 삶이란 무엇일까? 성도의 삶이란 거룩한 삶을 사는 구별된 사람이기 이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지칭한다. 거룩함이란 세상과 분리됨이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안고 열매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을 말한다. 바로 세리인 마태가 이 반열에 속하고, 창녀인 라합, 그리고 키 작은 삭개오가 이 목록에 올라 성서를 통하여 그들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아주 평범한 날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의 모습이다. 또한 평주일의 단조로움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통하여 귀중하고도 구별된 날로 변화될 수 있음을 말한다. ‘성도’의 의미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내용과 같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사람들이다. 교회에 처음 방문한 ‘000성도님’의 개념이 아니라 철저히 헌신하기를 다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한다, “나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그러므로 어느 한 개인 개인이 아닌 교회 전체가 성도이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자들일 뿐이다.
그 안에는 준비되지 못하고 자격이 없는 부족한 자들도 그 반열에 같이 설 수 있음을 본문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날에는 철저히 나뉘어져 풀무에 던져 불로 소멸됨을 경고하신다. 이는 제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이루어진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해석이다.
7월 27일: 17번째 평주일
창29:15-28; 시105:1-11, 45b; 롬8:26-39; 마13:31-33, 44-52
예수님의 비유시리즈는 본문에서 회중을 대상으로 하는 2개의 비유와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로 나눠진다. 첫 번째 묶음은 하나님의 사역이고 두 번째 묶음은 인간의 응답이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세상과 함께하는 교회성장의 모델이 아니고 겨자씨와 같이 작아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누룩과 같이 반죽에 섞여 숨겨져 있다가 하나님의 시간에 커지는 이미지를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미래지향적인 모습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부풀어지며 우리에게 소리 없이 다가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1절의 내용과 같이 모든 비유들이 천국의 ‘비밀’을 엿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진주 목걸이의 진주와 같이 겨자씨, 누룩, 보물, 진주 등 연속으로 진행되는 ‘천국비밀’ 비유시리즈를 다음과 같이 마치신다,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52절) 잘생기고 부유하게 보이는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들고 있는 가방에서 귀중한 물건들을 꺼내어 놓는 그림을 상상하여 본다. 물건 중에는 오래된 진품 명품도 있고 신세대 IT상품도 있다. 예수님이 말하시는 ‘제자됨’은 천국의 보물들, 옛것과 새것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보물을 소개함을 말한다. 주일마다 전하는 설교를 통하여 교인들은 어떤 보물을 보게 되는가? 가장 많은 반응은 설교를 통하여 미처 알지 못하던 시각을 보게 될 때에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한다. 오래되고 익숙한 기독교 정신이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다가올 때 우리는 설교의 매력을 느낀다.
설교자는 그 기쁨을 알고 있다. 탕자의 비유를 설교할 때에 익숙한 내용이기에 기대감은 떨어지지만 설교자의 안내로 새로운 시각을 경험하게 되면 미처 알지 못하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면서 그 기쁨은 더하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옛것의 기쁨도 엄청나다. 익숙함에 젖어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닌 몸과 가슴으로 확인하는 옛것의 새로운 발견은 보물과 같이 귀중한 체험인 것이다.
새 시대에 새로움만이 전부는 아니다. 세상은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지만 우리는 옛것을 기억하며 오늘의 시공간에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새로이 발견하고자 몸부림치며 안내한다. 그러나 이것은 기쁨의 몸짓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실 때 그들은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천국을 비유로 설명하시며 잃은 양을 찾고, 비밀히 성장하는 씨앗, 혹은 밭에 숨기어진 보물을 찾아내는 사람들의 비유를 접하며 그들은 당혹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것은 옛것에서 새로움을 찾아내시는 주님의 지혜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배는 옛것과 새것이 어우러지며 익숙함과 낯설음이 혼합되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시공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것과 옛것을 동시에 사용하시며 우리를 기쁜 마음으로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 명하신다. 지금의 이 세상을 말하신다. 또한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전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옛것에서 새것을 찾으신 다거나, 새것에서 옛것을 찾으심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를 함께 소개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우리는 역사속의 지혜를 구하고 성서의 해석을 추구하며 찬송가 그리고 경배와 찬양을 통한 하나님 백성의 고백을 귀담아 듣는다. 그리고 오늘 일어난 뉴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을 듣고자 노력한다. 지금 역사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구원의 이야기를 옛것과 새것의 모습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중에는 옛것에 익숙하거나 새것에 익숙한 편견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하며 분열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가지 모두 하나님 나라의 귀중한 보배임을 고백한다. 옛것의 전통과 익숙함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줌과 동시에 새것의 갱신과 신선함이 섬기는 목적과 내일의 방향성을 힘 있게 안내할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 두 가지 보물의 은혜를 찬양을 통하여 누리고 또한 주님의 사역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안내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믿음의 옛 선조들을 통하여 과거의 은사와 구원을 감사할 수 있고, 새것을 통하여 신선한 시각과 비전을 허락하신다. 이러한 은혜가 오늘의 삶을 인도하여 주신다.
상황설교 “씨급 인생” 마태복음 13:31-35
“C급 인생”은 A급인생과 비교되게 모자라고 떨어짐을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지라 항상 학생들에게 주어야하는 성적과 씨름을 합니다. 신학교의 대학원과정에서는 학부과정과 달리 C를 받으면 낙제점수와 같습니다. 적어도 B는 주어야하는데 C는 주는 사람도 불편하고 받는 사람도 불쾌합니다. 경쟁사회인 요즘 C는 F와 같이 낙제점수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C급은 삼류인생과 같이 취급당합니다.
누가 삼류인생을 좋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못나고 가진 것 없고 부족하기만 한 삼류가 하나님의 은혜로 쑥쑥 성장하여 일류가 되는 것이 복음의 진리이고 하나님나라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윗왕도 그가 왕이 되기 전에 형제 중 가장 작은 자로서 삼류, 즉 C급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하나의 작은 겨자씨로 사용하시사 한 나라의 왕이 되는 A급 재목으로 삼으시고 훈련시키시며 크게 만드셨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갈릴리 어부들과 같이 삼류의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되어 A급 인물로 거듭나고 성장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인생역전 혹은 반전의 로또와 같은 성공사례가 아니라 아무리 작은 자라도 크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고백함에 있습니다. 그것이 천국의 비밀입니다. C급 인생이 변화되고 성장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류가 되는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재가 확실시되고, 드러나며, 또한 밭에 감춰진 보화와 같이 그 비밀의 소유를 위하여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고 소유를 다 팔아 하나님 마음의 그 밭을 사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십니다. 오히려 A급이라고 교만하기보다 C급임을 자처하여 겸손히 섬길 때에 겨자씨로 사용하시고 크게 하시며 많은 사람을 돌보는 안식처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기에 여러분께 ‘씨급 인생’을 소개합니다. 이는 ABC의 ‘C’급이 아닙니다. 씨앗 할 때 쓰는 우리말 ‘씨’를 말합니다. 씨앗은 영어로 말해도 씨드(Seed)라고 우리말과 영어발음이 거의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C급 인생이 아닌 씨급 인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아무도 본인이 ABC의 ‘C급 인생’이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씨를 소개하며 ‘씨급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겨자씨 한 알입니다. 이는 모든 씨 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마13:32)고 하십니다.
만물이 성장하는 한 여름에 본문은 하나의 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도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로 유명한 겨자씨입니다. 겨자씨는 나물과에 속합니다. 결코 나무의 종류가 아닙니다. 매년 자라서 그 해에 죽는 일년생 식물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씨가 자라서 밭에 심은 모든 식물보다 더 크게 성장하여 나무처럼 그늘을 만들고 하늘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안식을 취한다고 천국의 모습을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여름 옥수수 키가 쑥쑥 커지고 모든 식물이 한창 커지는 때에 가장 적합한 실물 교육인 것 같습니다.
‘씨급 인생’은 이와 같이 작은 자가 몰라보게 커지는 모습을 말합니다. 그 씨급 인생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씨가 귀중한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린 자에 있습니다. 바로 씨를 뿌리는 농부의 손에 그 씨의 행방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농부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자기 밭에 씨를 뿌릴 때에 풍성히 뿌린다는 것입니다. 이 농부는 아주 특별한 농부입니다. 세상에 어느 농부가 이처럼 한답니까? 얼마 전만 해도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유가상승에 농사를 짓는 분들이 트랙터 경운기 사용도 부담이 되고 비료 및 사료값 상승에 신경 쓰여 농사도 제대로 맘 놓고 못하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 농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특별한 농부는 씨를 뿌립니다. 이곳저곳에 뿌립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함에 신경 쓰지도 않습니다. 농약도 치지 않습니다. 논두렁을 손질하거나 돌보지도 않습니다. 들에 핀 백합화와 같이 그냥 자라게 놓아둡니다. 무엇이 잡초이고 무엇이 곡식인지는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 봅니다. 참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분명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가려내겠다고 합니다. 오로지 뿌린 씨가 뿌리 내리고 크게 성장하여 귀하게 쓰임 받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는 아름다운 농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의 비유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가르치시면서 계속하여 빵을 부풀게 하는 누룩에도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특이한 사항은 ‘가루 서 말’이라고 구체적인 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밀가루가 서 말이면 약 22kg으로 100여명이 먹을 수 있는 양입니다. 그냥 집에서 손님을 초대하여 먹는 식사개념이 아닙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양을 기록함은 잔치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식사가 아니지요. 한 여인의 부엌에서 만들어내는 식사치고는 엄청난 양 아닙니까? 바로 천국잔치의 모습입니다. 메시아를 모신 향연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개의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갑자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지극히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인생이라고 생각하시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귀하게 쓰임 받는 모습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 갑자기 일어나는 일입니다. 감추어진 누룩이 부풀려지듯 그리고 미세한 겨자씨가 한 여름에 나무가 되듯 갑자기 바뀌는 상황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씨급 인생’의 비밀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일등시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겨자씨와 누룩입니다. 그런데 씨는 땅과 하나 되고 누룩은 밀가루와 하나 되어 크게 성장합니다. 옛것과 새것이 만납니다. 화학작용이 일어나듯 성령의 은혜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더 이상 삼류가 아닌 일등시민으로 바뀌는 ‘씨’급 인생이 여러분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오직 하나님 손안에 쥐어지는 은혜가 있으시길 기도합니다.
Posted in Newsletter | Print | No Comments »
KAM Newsletter 6호, 2008년 4월
October 25, 2008 by admin.

4월 1일 새 기숙사 기공식에서 공연한 상모춤
인사의 글
여러분의 교회와 가정에 평안을 기도드리며,
허정갑 목사
Rev. Paul Junggap Huh, Ph.D.
Assistant Professor of Worship and Director of Korean-American Ministries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성서정과 5월(A) 설교자료
*현재「목회와 신학」별지부록「그 말씀」에 연재중인 허정갑교수의 “교회력에 따른 설교”를 매달 뉴스레터와 함께 제공합니다. 성서정과(Lectionary)를 따르는 예배와 설교를 준비하시는 교회와 목회자 분들을 위하여 설교본문안내를 합니다. 본문에 대한 예배자로와 참고문헌은 www.textweek.com을 참고하세요.
다문화권의 하나님
5월 4일: 부활절 7번째 주일 (어린이주일)
행1:6-14; 시68:1-10, 32-35; 밷전4:12-14, 5:6-11; 요17:1-11
예수님의 승천을 기리는 주일로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구름 속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사건을 본문은 기록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살아서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오시기를 약속하시며 하늘로 오르신다. 승천일이 목요일에 이루어짐은 부활 후 40일째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승천일을 지키지 않기에 부활절 7번째 주일을 주님의 승천을 기억하며 본문을 생각함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하늘로 올리워 가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사렛예수의 승천은 이 땅으로 해석할 수 없는 신비를 안고 있다. 목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그가 이제는 하늘로 오르사 창조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 (시110:1). 그는 창조주와 함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신다(마28:18). 승천과 창조의 신비는 세상의 눈높이로는 결코 풀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인지라 일상생활에 분주한 우리의 작은 견해로서 이 큰 그림이 상상이 가지 않음을 보게 된다. 오히려 우리의 작은 문제들에 눈이 가려져 땅만 보고 살지 감히 위를 올려보지 못하는 답답함에 있음을 말한다.
승천에 대한 교리는 5월의 화창하고도 푸릇푸릇한 봄 날씨와는 거리가 먼 두려움과 경외로움이 가득한 종말론의 모습이다. 이는 가장 어둡고 심각한 마지막 날에 대한 신앙이며 믿음인 것이다.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하여 고난 받으시고,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시며, 그의 백성들에게 버림받으신 그 분께서 올라가신 사건이다. 그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우리에게 교회를 맞기시고 그의 몸을 허락하시며 그의 백성을 부탁하시었다. 이제 그만 하늘을 쳐다보고 세상을 바로 볼 줄 알아 누가 대통령이 되었든지 또 신문에 어떤 기사가 그 머리를 장식하든지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여야 한다. 하늘과 땅 온 세상이 그의 손에 달려있음이다.
특별히 이날은 어린이주일로서 예배 후 어린이들과 함께 풍선을 하늘로 올려 보내는 이벤트를 준비하여 승천주일과 연결하여 봄도 바람직하다.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행1:11).
5월 11일: 성령강림주일 (어버이주일)
행2:1-21; 시104:24-34, 35b; 고전12:3b-13; 요20:19-23
하나님은 다문화권에 거하신다. 성령의 강림은 우리 사회의 이웃사촌, 이주노동자, 다문화가정, 외국인 유학생, 일반 외국인, 및 탈북자를 포함한 모든 백성에게 임하심이다. 본문이 소개하는 새로이 만들어진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한 자리에 모여 오순절잔치를 맞이한다. 이는 히브리어 “shevuot”으로서 주간이라는 뜻으로 유월절이 지난 7번째 주간 약 50일째를 말한다.
농경 문화권에서는 보리나 밀, 첫 소출을 축하하는 잔치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게 됨을 기억하는 날이기도 하였고 또한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전하여 받음을 기념한 날이기도 하다. 이처럼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하나님의 선물을 다양한 모습으로 나누게 된 이 날 성령의 선물이 기독교 공동체에게 주어진다. 불과 바람의 상징으로 다가오는 성령은 서로가 받은 선물을 나누는 간증의 시간을 안내한다.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웃들과 어떻게 나누고 있는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오순절 날 각 지역에서부터 한곳에 모인 유대인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같은 신앙을 갖고 있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결코 서로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들은 서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나눔의 기적을 맛보게 된다.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세대간의 차이와 문화, 음악, 그리고 언어 등을 생각하여 볼 때 그동안 우리를 갈라놓았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음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더군다나 평범한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큰 일을 증거함은 더욱 엄청난 기적인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를 높여 이야기 함이란 엄청난 용기를 요구한다. 더군다나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함이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하심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있는 곳 어디에서든지 남녀노소 및 빈부귀천 구분 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구원의 소식을 말함이다. 주님의 성령이 임하시사 누구든지 말씀을 증거하고 외치는 잔치의 주일이 오순절인 것이다.
성령이여 오시사 우리의 입을 여시고 막힌 말문을 트게 하사 부끄러워 하지 않고 담대함으로 주님을 복음을 증거하게 하소서. 또한 어버이 주일로서 하나님 어버이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버이 하나님께서는 다문화권에 속한 그의 자식들을 보시기에 모두 똑같이 사랑하시지 않을까? 유대교와 기독교 오순절의 다양한 의미들이 오늘 어버이 주일과 다시 한 번 접목됨을 통하여 하나님을 증거하는 선물로 주신 성령의 역사를 조명하는 권능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5월 18일: 삼위 일체 주일
창1:1-2:4a; 시8; 고후13:11-13; 마28:16-20
성경은 인간들과 대화하려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모습을 기록한 구원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다른 방향을 선택하며, 우상을 섬기고, 주님과의 대화를 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계속하여 우리를 찾으신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조상들, 선지자들, 그리고 율법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구원의 비밀을 펼치신다. 십자가 형벌이라는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나시며 부활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신다. 계속하여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초록색의 기간인 평주일의 시작이 여기에 있다.
이제는 긴 50일 여정의 부활절 기간도 지났지만 다시 한 번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신 주님은 지정된 어느 장소나 시간에 매이지 않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인시키신다. 무소불능의 하나님(욥42:2)이시다. 마르틴 루터는 일찍이 하나님의 “유비쿼터스”를 주장하며 언제 어디든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였다. 유비쿼터스는 물이나 공기처럼 시공을 초월해 장소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네트웍에 접속하는 현대적 컴퓨팅 용어가 아닌 신학적 용어이기도 하다. 어거스틴 또한 하나님의 충만하고도 풍부한 “plentitude”를 이야기하며 예를 들어 두 세가지 종류의 꽃만 창조하심이 아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자의 꽃 종류를 창조하심을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멈춤이 없이 영원하며 차고 넘치는 충만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옴을 말한다.
하나님은 다문화권에 거하신다. 복음서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4개임을 볼 때에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증거하는 다양한 시각을 확인한다. 누군가 마태복음만을 주장하며 다른 복음서가 필요치 않다고 할 때에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기 위하여서는 적어도 4개의 복음서가 필요하다고 반박한 교부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이 성서의 정경을 이룬 것이다. 하나님의 다문화는 삼위일체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삼위일체신학은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저 멀리계신 개념의 대상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의 가족관계를 이룬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심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부모와 자녀 및 부부역할만 강조함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성을 조명함과 같이 삼위일체 주일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관계성을 상고하는 날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 또한 우리는 닮아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을 이루시고 하나 됨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화목한 가정이 이루어지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가족처럼 돌보는 목회의 현장이 되어지기를 바란다.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께 끊임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지속적인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성령 하나님 또한 서로의 관계를 교통하심과 도우심이 긴밀하다. 여기에 사랑, 사랑하는 자, 그리고 사랑받는 자가 하나 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다.
5월 25일: 8번째 평주일
사49:8-16a; 시131; 고전4:1-5; 마6:24-34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이야기가 평주일의 시간 속에 이어지며 마태는 재물에 관한 가르침을 전개한다. 재물의 아람어는 ‘맘몬’이다. 그 자체에 부정적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질만능주의에 속한 현대사회에서 재물은 우상과 같은 해석으로 다루어짐이 본문에 나타난 ‘재물’의 위치이다. 소비자 문화권에서는 물건이 없어지기 전에, 혹은 다른 사람이 갖기 전에 무언가 지녀야하고 갖추어야하는 압박감으로 매출을 부추기며 많이 가진 자가 축복받은 자로 여기는 현대사회에 본문은 하나님과 맘몬을 구분하는 지혜를 소개하고 있다.
일상생활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과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빌4:6)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며 염려하는 모습을 깨우치며 아무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시사하는 본문을 통하여 설교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다른 다문화적 시각을 안내할 수 있다.
먼저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시각으로 새와 꽃보다 더 귀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각시킬 수 있다. 좀 더 많이 가진 자는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누고, 없는 자는 염려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고 전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가난 속에 태어나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는 새와 꽃과는 비교가 안 되게 귀중함을 확인시킨다.
둘째로 생태학적 입장에서 서로 존중하여야 하는 환경문제를 다룰 수 있다. 인간의 욕심으로 더럽혀지는 자연의 파괴를 심각히 생각하여 생명체간에 서로 연결된 관계성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말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새와 꽃들의 자연세계를 인간들의 욕심으로 더럽히고 망쳐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제대로 알게 될 때에 비로서 인간들은 욕심을 저버리고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감사의 잔치를 안내하는 시각이다. 들의 풀과 백합은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심과 같이(32절)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난한 자들의 심정을 돌아보고 자연을 지키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가꾸는 청지기의 사명을 말한다. 진정한 안식은 그 마음에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고 그날에 족함을 마음껏 누리는 일이다. 6일 동안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7일째 안식을 취하시며 만족하시었다. 더 이상 할 일이 남아있지 않은 완성된 창조의 모습을 마음껏 누리시었다. 더 이상 할 일이 필요치 않은 이유는 그 창조가 완벽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가는 우리들의 생활도 진정한 안식을 누리기 위하여 오늘의 일을 열심히 하여 만족한 삶을 누리고 감사의 잔치를 벌이며 내일 일은 염려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는 게으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심히 하루를 생활하였기에 더 이상 후회가 없는 만족과 감사의 모습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34절).
Posted in Newsletter | Print | No Comments »